- 보통의 연애소설 -
커피숍 삼 년이면 원치 않아도 귀가 트이는 법,, 각양각색 손님들의 사연을 되뇌긴 싫기에 가요, 팝송은 가리지 않는다만 경음악은 없었다. 경음악 선율 위로 사람들의 목소리가 오버랩되기에.. 테이크아웃 잔에 얼음을 들이붓는 순간 때아닌 <비창>이 울려 퍼졌다. 뜬금없이도 말이다. 생경스러운 소리의 근원지는 카운터와 마주한 테이블 위에 놓아둔 인범의 휴대폰,, 어지간히 화장실이 급했었나 보다. 출입문의 풍경소리와 맞물려 한결 차분해진 낯빛으로 인범은 발을 들여놓았다. 이에 정은의 입이 절로 벌어졌다.
“'넌 감동이었어' 님의 부재중 전화가 있습니다만.”
시모넬리 아피아의 추출 버튼을 누른 정은은 휴대폰을 덮칠 듯 맹렬한 기세로 기울고 있는 인범의 뒤통수에 대고 말을 했다.
“베토벤이 직접 붙인 'pathetique'라는 부제는 프랑스어로 '비장한, 감각적인, 감동적인'의 뜻이고 정작 우리의 머릿속은 한자어로 번역을 한 '마음이 몹시 상하고 슬픔'이라 각인되어 있죠. 문화적 차이로 발생하는 오역이라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당장 전화하지 않으면 '넌 감동이었어' 님의 마음이 몹시 상하고 슬플 것 같다는,, 관찰자의 시점에서 보면요."
“내 거 먼저 줘요. 잠깐 동안에 이 생각 저 생각하느라 정작 커피는 엉망일까 봐."
양볼이 홀쭉해질 때까지 힘껏 빨아대고서도 부족했는지 인범은 재차 맛을 확인했다. 커피 감정사라도 된 듯 말이다.
“그 정도에 흔들릴 짬은 아닙니다만.”
본전도 못 찾게 정은은 못을 박았다.
“유명세는 익히 알고 있었지만 곡에 얽힌 사연은 처음 들어요. 클래식 들으면 마음이 좀 차분해져서일까? 요 근래 엉겨 붙는 회사 동료. 통화 버튼 누르기 전 마음의 준비 운동 같은,, 그런."
피식- 정은이 웃자 재빠르게 인범은 물었다.
“사연 있는 듯한 그 웃음은 뭘까? 음악회 갔다가 뻥- 차인 사람처럼.”
“덮어놓고 남자라고 생각할까? 물론 나도 그랬지만, 충분히 오해할 상황이었잖아.”
“또, 또.. 부러 별일 만든다. 궁금했던 참에, 말 나온 김에 알고 가자는 거지. 왜는 무슨.”
“티 없이 맑은 날 차창을 내리고 고개를 내민 채 <비창>을 들어 본 적이 있는가? 손을 뻗으면 쨍-하고 금세 깨져 버릴 것만 같은.. 운동장 돌계단에 앉아서 하늘을 향해 손을 이렇게 뻗고서, 여자 선배였으니 힘 빼지 말아요."
천장에 달린 전구를 향해 힘껏 손을 뻗으며 정은은 슬며시 웃었다.
“따라 부를 수 있는 노래가 취향인지라 클래식은 뒷전이었는데, <월광 소나타>는 좋아요. 제자이며 연인이었던 줄리에타에게 헌정한 곡, 청력을 잃은 베토벤이 피아노 뚜껑 위에 왼쪽 귀를 대고 연주하잖아요. 꽤 오래전 기억임에도 지금도 눈에 선하게 그려지는 건, 게리 올드만의 밀도 있는 연기 때문이겠지. <불멸의 연인> 봤어요?"
“아뇨. 그런 하늘 본 적 있어요?”
“아직요. 그 선배 집이 문경새재 아니 문경이라, 집 가는 길에 올려다본 하늘이 너무 청아해서 고속도로 갓길에 차 세우고 창문 내린 채 얼굴을 내밀고는 그렇게 보았다고. 운전자도 아닌데 그런 여유도 없고, 섬세한 감수성은 더더욱 없어서.. 건너 들은 얘기로는 시인되었다 해요."
“아..”
“월급쟁이일 때 발신자 번호 서비스 요긴하게 써먹었지. '내일은 내일에 맡겨요~' 하며 회사 전화 깡그리 무시했는데. 여전히 인류의 평화를 위해 봉사하고 있으니 상 줘야 하는 거 아닌지!!"
"여전히 잘 쓰고 있잖아요. 그새 잊었나 보네. 나쁜 놈."
"네놈은 귀신이더냐? 인간을 왜 망각의 동물이라고 하겠어!! 여기 봐요. 레드썬."
'나쁜 놈' 세 글자에 유독 감정을 실어 때아닌 속마음을 여과 없이 드러내는 인범을 향한 정은의 목소리는 곱지 않았다. 그러나 닥친 상황을 벗어나려는 정은의 의도를 알아챈 인범은 호탕하게 웃었고, 이에 헤벌쭉 웃으며 정은도 맞장구를 쳤다.
병원 1층에 멈춰 선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자 정은은 종종걸음으로 몸소 ‘천천히’를 실천 중이었다.
“뭡니까?”
"이 시간에 어떻게?"
병원이라는 장소적 특성상, 발견한 인범이나 들킨 정은이나 반갑지 않은 것은 매한가지였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고."
방금 전까지 정은의 손에 들려 있던 처방전은 어느새 인범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순식간에 벌어진 상황에 눈동자만 꿈벅거리는 정은은 상관없다는 듯, 그는 처방전을 찬찬히 살폈다. 이에 포기한 듯 그녀가 말했다.
“그새 약사님이 바뀌셨나 봐요.”
“농담이 나옵니까!! 지금.. 차 지하에 있어요. 금방 올 테니 같이 움직여요.”
정은의 손에 스마트 키를 쥐어 주고 인범은 열린 엘리베이터에 몸을 집어넣었다.
“들어가 있지. 왜? 그러라고 키 준 건데.”
“그건, 도둑이나 하는 거고, 빈집이나 빈차나.”
벌어진 입을 앙- 다물고는 차문을 열어 운전석에 오르는 인범을 따라 그제야 정은도 앞자리에 앉았다.
“위내시경 했어요?”
“오~, 3년 차 찍으면 반의사 되겠네.”
인범이 미간에 부러 실주름을 만들자 정은은 입을 씰룩거렸다.
“혹 그럴까 싶어 금식하고 왔더니만 스트레스성 위염이래요. 해서 알록달록한 거 엄청 많이 받아왔지요."
마치 사탕 봉지라도 되는 양 약봉지를 힘차게도 흔들어댔다.
“위내시경이 목적이었다면 집 근처에도 많잖아요.”
“오늘은 무슨 일로 왔누-, 그 한마디면 약도 주사 없이도 낫는 거 같다는. 코흘리개 때부터 다녔던 병원인데 오랜만에 왔더니 원장님도 많이 늙으셨네요. 자주 찾아뵈어야겠어요. 하하."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현대인의 두통처럼 자영업자에게 위장병은 다반사라는.”
“가게 근처에 죽집 있어요? 가는 길에 들르게.”
“죽 먹을 정도로 위중하지도 않고 영양 가득 엄마표 도시락 있어요. 아침 전이면 같이 먹을래요? 우리 엄마가 손이 큰 편이라."
풋- 그제야 인범이 웃었다.
“웃었다.”
“차라리 가정의학과에서 봤다면 덜했을 거야. 위내시경은 아무 때나 안 하니까. 괜찮아 보여서 다행이야. 하아.."
말끝을 흐리며 짧은 한숨으로 마무리를 짓는 인범을 넌지시 바라보다가 정은은 저도 모르게 그만 마음을 흘렸다.
“부러우면 지는 건데. 여자 친구는 좋았었겠다.”
인범의 얼굴빛이 금세 정색을 하자 이에 정은은 변명을 늘어놓았다.
"약 부작용인가? 헛말이 나오네. 하아."
어깨 쪽으로 고개를 슬쩍 내린 후 해죽- 그녀가 웃었다. 필살기라도 되는 양 말이다.
"그 시간에 거기서 딱~. 심장이 대신 놀랐는지 위가 하나도 안 아파. 후배님이 명의신가?"
'이 말 저 말 하다 보면 뭐 하나는 걸리겠지.' 하는 심정으로 정은의 입은 쉼 없이 벌어졌다.
"아프니까 넘어가는 거예요. 한 번만 더 그래봐. 어디."
눈은 웃고 있었지만 인범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인범은 불나방이었고 여왕벌의 일벌이었으며 결국 수컷 가시고기가 되었다며, 언젠가 지훈이 속상한 맘에 털어놓은 하소연 한 자락을 귀동냥했던 정은이었다. 그녀와의 이별이 꽤 오래 전의 일임에도 그의 몸속 세포들은 여전히 반응하는 듯했다. 거짓 없던 그의 마음과 마주한 순간 불쑥- 고개를 내민 주책없는 속마음이 미웠다. 애써 동여맨 마음 보따리의 끈을 공연히 잡아당긴 것만 같아 심장이 저만치 내려앉은 듯했다.
예가체프 500ml 2병, 케냐 250ml 5병, 레몬청 2병, 자몽청이 5병이었나? 6병이었던가? 삼십만 원을 향한 인범의 그래프는 목표 달성이 코앞이었다. 주문 내역을 확인차 정은은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ㅅㄱㄷㅇㅇㄴㄴㄱㄴㄱㅁㅎㄷ.. 인범의 카톡 프로필은 업데이트되어 있었다. 해보자는 건가!! 이내 끙- 하는 한숨 소리가 새어 나왔다. 본 이상 그냥 넘길 수는 없었다. 주객이 전도된 셈,, 머릿속 낱말 카드들이 빠르게 짝을 찾고 있었다.
'서교동역 언니네 그냥 갈 만하다 - 맛집은 아니라는 건가?'
'산과 들에 아낙네 가는 길만 한 달 - 시? 문학소년은 좀 의외인데?'
머리가 차가워야 할 상황, 서둘러 손에서 핸드폰을 놓고 케냐 더치 보틀을 종이 박스에 넣으며 그녀가 중얼거렸다. ‘너의 속마음은 대체 뭔데?’
종일 불어대던 바람은 밤이 되니 본격적으로 거세졌다. 네이놈을 통해 확인한 내일의 날씨는 비 올 확률 90%였다. 꼬마 별 하나 박히지 않은 먹빛 하늘을 보며 정은이 작게 말했다. '내일은 비 님이 오시겠구나 반갑지도 않게 말이다.' 그때,, 손에 쥔 휴대폰이 소리 없이 울어댔다. 발신자는 후배님.. 그 세 글자가 바람의 방향대로 흔들리는 것 같아 덩달아 마음도 심란해졌다.
“기다리던 전화가 있었나 봐요.”
휴대폰에서 눈을 뗀 정은은 옆에 선 인범을 보고 화들짝 놀랐다.
“이 밤에 버스 정류장에는 무슨."
“전화를 받았으면 한 번에 해결될 일을. 근처에서 술 한잔 했고 얼추 퇴근 무렵이라 방향도 같으니.. 택시를 잡으려면 횡단보도로 가야 할 텐데."
“방향은 같지만 목적지가 다르잖아요. 중간에 내려서 버스 기다리면 결국 비슷할 거야. 내 버스는 전 전류장 출발한 상태고."
버스 도착을 알리는 전광판을 손으로 가리키며 여러 줄의 선을 그었다.
“부러 시간 낭비, 체력 소모하고 싶지 않아요. 지친 하루였어요. 택시는 저기서 많이 서더라. 버스 기다리며 많이 봤거든."
정은의 불안한 눈동자가 인범의 눈치를 살폈지만 이렇다 할 움직임은 없었다.
“그럼.. 조심히 가요. 나 먼저 갑니다.”
서둘러 말을 마친 인범은 망설임 없이 횡단보도를 향해 걸어갔다. 바람이 그의 등 뒤에서 부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이내 정은의 머리카락을 휘저어댔다. 한차례 비가 쏟아질 듯 하늘은 암흑 같았고 공기는 무거웠다. 바람도 어지럽기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