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 별다방으로 향하는 정은은 마치 자식 두고 가는 어미 심정만 같았다. 발걸음을 얼른얼른 떼어놓을 수가 없었다. 불편함만 가득했던 버스 정류장에서의 조우 이후 첫 만남이었다. 볼펜은 왜 받겠다고 해서는.. 어차피 맞을 매 제때 맞고 비겁해지지 말자 마음먹고는 이내 두 발에 힘을 실었다.
“딸기 딜라이트 요거트 1개, 티라미수 케이크 1개 주세요. 오늘은 부가세 포함 맥시멈 사천 원 이상은 무리지 싶어 계산은 내가. 커피 말고 다른 거는요?"
예쁜 애 옆에 또 예쁜 애는 찬성이지만 줄줄이 단것은 아니올시다였다. 단것 먹으며 스트레스를 푼다지만 정은은 오히려 스트레스가 쌓이는 듯했다. 참다못한 그녀가 인범의 커피에 입을 가져다 댔다.
“시장조사 두 번 했다간, 요새 2030 여성들이 선호하는 별다방 메뉴라고, 차라리 설탕물을 마시지. 으.."
정은이 얼굴 근육을 총동원해 ‘싫어요’를 눌렀다. 그녀와 달리 인범은 핸드폰 삼매경에 ‘좋아요’를 눌렀다. 그런 그의 모습에 말없이 ‘싫어요’를 꾹 눌렀다.
“그거 나 줄 거?"
옆자리에 놓인 쇼핑백을 가리키자 인범은 말없이 쇼핑백을 건넸다. 정은이 쇼핑백 안에서 볼펜과 메모지를 꺼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선을 쭉 그었다.
“이름 석자가 먼저 아닌가? 보통은 그러던데.”
“빨간색은 불길하니까. 볼펜 잘 나오네.”
'만나자마자 할걸.' 뒤늦은 인범의 반응에 비쭉 나온 속마음이었지만, 애써 눌렀다.
“어쨌거나 회사 비품이고 영업용인데 이만큼 가져도 되는 건지? 나야 좋지만.”
걱정하는 척하며 정은은 느릿하게 말했다.
“누가 쓰던 잘만 쓰면 되는 거고. 그만큼에 표도 안 나고.”
분명 정은에게 하는 말인데 인범의 눈은 여전히 핸드폰 안에 있었다. 선약도 지켰고 볼펜도 받았지만 버스 정류장에서의 일이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다. 핸드폰만 오매불망하는 그의 태도가 거슬렸지만 한 번 더 대화를 시도해 보려 그녀가 입을 열었다.
“매운 거 당긴다. 요 앞에 떡볶이 잘하는데, 갈래요? 튀김도 맛나고.”
“다음에요. 오늘은 좀 피곤해서.”
‘그건 전자파 때문이 아닐까!! 핸드폰만 그리 보고 있었는데 말초 신경을 자극한 나머지 피곤도 할 테지.' 이는 정은의 마음의 소리요. 인범이 들을 수 없는 소리였다. 커피숍을 등진 두 사람은 짧은 인사를 서둘러 전하고 반대 방향을 향해 걸어갔다. 저만큼 가던 정은이 뒤를 돌아보았지만 더 이상 인범의 모습은 없었다.
“해님 아직이니 이거 엄연한 낮술이고, 의사 선생님과 낮술이라.."
산에게서 전화가 온 건 인범과 헤어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늦은 점심이라 해도 좋고 한참 이른 저녁이라 해도 좋으니 얼굴이나 보자는 것이었다. 인범은 말했었다. 재미는 없지만 산은 큰아들 같아 묵직하고, 지훈은 곰살맞은 막내딸 같으나 손이 좀 많이 간다고.. 평소 묵직한 산이 오늘따라 말이 길어지고 있었다. 일종의 신호일지도 모른다 여긴 정은은 그의 제안에 두말 않고 흔쾌히 응했다. 그가 정한 장소는 집 근처의 삼겹살 집이었다. 제 친구들과도 요전날 지훈 연희와 인범과도 함께 했던 곳이었다. 프랜차이즈가 가진 힘은 실로 대단했다. 선택의 폭이 넓어서 혹은 그 반대여서 그로 인해 우왕좌왕할 때 낯익은 간판은 사람들을 조종한다. 이미 먹어서 익히 들어서 뇌와 혀에 박힌 각인된 '아는 맛'을 상기시킨다. 정은이 그랬고 그녀의 친구들이 그랬으며 지훈과 연희 그리고 인범 또한 그러하였고, 이제 산이마저 그랬다. 보태어 일요일에 짜장라면을 먹지 않는 이들 역시도 그랬다. 가게 안을 휘둘러보던 정은의 시선을 산의 목소리가 잡아챘다.
“거긴 예약석, 옆자리는 빈 좌석.”
“왼쪽 얼굴이 미남이신가 봅니다.”
산이 지정해 준 자리에 앉으며 정은은 장난스레 말을 건넸다.
“전화하길 잘했어. 툭 던지는 선배님 농담에 위로도 받고 때론 설레기도 해요. 뭐 나만 그런 것도 아니고."
“설마, 취중진담?”
“두 사람은 왜?"
인범이 정은 옆자리에 앉으며 산과 그녀를 번갈아 보았고 정은의 시선도 같았다. 그들이 어리둥절해하는 사이 산은 빈 소주잔을 채웠다.
“첫 잔은 원샷.”
잔에 담긴 소주를 단번에 털어 넣은 산의 표정은 쓸쓸해 보였다. 단지 소주의 쓴맛 때문은 아닌 듯했다. 정은의 눈에는 분명 그래 보였다.
“수술 당직 수술, 간만에 오프인데 병원 귀신하기는 싫고 텅 빈 집은 외롭고, 마침 선배님 생각이 나더라. 때마침 인범이가 전화를 한 거고. 그런 이유로.. 일요일마다 만나기로 한 거 아니었어?"
“방금 헤어졌어.”
“벌써? 열혈팬 1호인 네가?”
앓는 소리를 내는 인범을 향해 따져 묻고는 스스럼없이 면전에서 일러바치는 그런 산을 향해, 중요하다는 듯 정은은 또박또박 말했다.
“have to 아닌 let’s meet when we have time~, 덧붙이자면요.”
"이번 주는 한반도여서. 자꾸 선을 그어."
“내가 언제요?”
“버스 정류장, 아까 커피숍 메모지, 방금 전.”
두 사람의 짧은 랠리가 끝나자 산이 입을 열었다. 심판처럼 말이다.
“사랑싸움이로구나.”
“아니야.”
두 사람이 동시에 외쳤다. 마주 보았지만 찌찌뽕은 생략했다.
“때맞춰 찾아가서 같이 가자는데 그걸 뻘짓이라 하는 사람이야.”
“완벽한 문장이 아니잖아요. 술자리가 마침 가게 근처였고 일어난 시간이 퇴근 시간이랑 얼추 같아서 버스 정류장에서 우연히 만났으나, 방향은 같아도 목적지가 다르기에 정중히 거절한 거죠. 뻘짓이라니? 난 그런 단어 자체를 몰라. 생사람 잡기는.."
“어찌 됐든 결론은 선 그은 거 맞잖아. 정중히?? 뜻은 알고나 말하는 건지.”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은 가자미 모양이었다. 그러고는 이내 등을 돌렸다.
“사랑싸움 맞구먼. 뭐.”
“아니라고.”
두 사람의 입이 동시에 열렸지만 역시나 찌찌뽕은 없었다. 찌찌뽕은 원래 동성 간에 행위인가? 인범이 빈 잔에 소주를 채우려 하자 산이 병을 뺏어 대신 잔을 채웠다.
“자작하면 삼 년간 재수 없데. 그죠?"
“저니는 좀 그래도 돼요.”
다부지게 팔짱을 낀 채로 정은은 미운 말을 내뱉었다.
“시선 처리 옳지 않다.”
“주먹도 쥐어야 자연스러워 보이겠지.”
산의 권고에 인범이 끝내 수긍하려 들지 않았고, 이를 탐탁지 않게 여긴 정은이 들고 있던 젓가락을 양철 테이블 위에 힘껏 내려놓자 날카로운 소리가 금세 퍼졌다.
“너도 참 한결같다. 계절 바뀔 때마다 이러잖아. 외로워. 보고 싶어.”
“내가 의사인 게 좋았던 이유. 사람 살리는 대의명분?? 물론.. 바빠졌는데 더 생각나는 건 왜일까? 하아.."
인범이 따라준 술이 엄청 쓴가 보다. 잔을 내려놓은 산의 얼굴은 씀바귀나물을 처음 맛본 어린아이 같았다. 그런 산의 모습이 정은의 두 눈에 가득 들어왔다. 마음에 품은 그녀가 대관절 어떠하였길래 기다리고 아파하는 건지,, 궁금했다.
“두 사람은 어떻게 만났어요? 안주거리 삼자는 거 아니고. 알고 싶어요."
“못 들었어요?”
산이 고갯짓으로 인범을 가리켰다.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아픈데 굳이 그러고 싶지는 않더라.”
인범의 목소리에 미안함이 묻어 있었다. 친구로서 미안했던 건지 아니면 혈육이라는 입장이 미안했던 건지 인범은 끝내 고개를 떨구었다.
“헤어졌더라면 차라리 조금은 편했을지도,, 오롯한 나의 짝사랑. 여름 방학에 함께 간 워터파크에서 물놀이 삼매경에 빠진 인해 수영복이 그만.. 비키니 수영복 상의가.."
“안 돼.”
절망적으로 외치는 정은을 보며 산은 간신히 말을 이었다.
“인해 보러 간 거였고 애당초 물놀이 따윈 관심 밖이었어요."
“인해 씨 그때 몇 살이었어요?”
“초등학교 6학년. 우린 고1.”
“맙소사. 2차 성징 그딴 거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게 아니거든. 그때쯤은 이성에 대한 눈이, 감성이 먼저 싹트는 시기니까, 참고로 나는 중학교 2학년 때 등굣길 버스에서 옆에 선 동창생한테 트림했어요. 그리고 졸업할 때까지 그 애 얼굴을 똑바로 못 봤지."
술이 가득 담긴 잔을 정은이 건네자 기다렸다는 듯 산은 벌컥 들이켰다.
“낮술이 은근히 취하니 천천히요. 상황 탓이잖아. 시작조차도 못하는 이런 말도 안 되는 사랑이 어딨어!!"
정은의 목소리에 분함과 원망이 가득했다.
“이래 봬도 나 고백도 한 사람이에요. 술의 힘을 조금 빌리긴 했지만.”
부끄러운 듯 산의 얼굴이 슬쩍 붉어졌다.
"그녀의 답변은 알 것 같아. 그러니 pass."
"고맙네요. 결과야 어찌 됐든 잘한 거 같아요. 내 사랑에 솔직한 거니까."
바라다본 산의 얼굴에 슬픔이 엿보였다. 그러나 마지막 말은 분명 행복이었다. 세상엔 다양한 방식의 사랑이 존재한다. 산은 지금 사랑을 위해 살아가는 중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으며 소리 없이 그의 사랑을 응원했다.
힘내. 이산~..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이 여러 개였다. 살짝 기울었던 해님도 진즉에 퇴근을 했고 꼿꼿하게 허리를 치켜세웠던 세 사람도 느슨했고 편안해졌다. 턱을 괸 채 한쪽 어깨가 살짝 내려앉은 정은을 향한 산의 목소리가 나긋했다.
“술이 제법 들어간 모양입니다. 전에도 그러던데.”
“그런 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자세를 바르게 하며 싱긋- 그녀가 웃었다.
“인해도 그러던데.”
“아~, 그런 이유로. 치..”
“전혀 다른데.”
산을 향해 짓궂게 농을 던지는 깨알 같은 틈을 파고드는 진득함 없는 인범을 놓칠 정은이 아니었다.
“그건 나도 알아요. 엄청 미인일 테지. 나도 그런 사람 있었다 뭐. 졸릴 때 목 긁는다고 기억해 주던 사람.."
추억에 잠긴 듯 정은의 목소리는 나른했다.
“그건 강아지들 습성 아닌가. 닭띠라며 민증 꺼내 봐요.”
인범이 멍멍거렸다. 겁도 없이 말이다.
“그 자식은 누구야? 정답지는 이거지.”
젓가락으로 테이블을 치며 동의의 뜻을 표하는 정은을 더듬던 눈으로 이내 산을 조준하며 따지듯 인범은 물었다.
“그 자식보다는 네놈이 더 궁금해. 두 사람 처음 아니지?”
“두 번째다. 인마.”
“그러니까 왜?”
“난 만인의 선배님이니까.”
어처구니없다는 듯 인범은 웃었다.
"당신 이상형이 흰 가운인 거 아는데 산이는 안 돼. 덧붙이자면 건물 약사님도 안 돼. 안 어울리니까. 여기저기 흘리고 다니지 좀 말지."
“이인범이가 잘못했네. 외로운 친구 앞에다 두고. 넌 마 벌주야. 선배님도요.”
산이 투정을 부리며 두 사람의 잔에 가득 술을 부었다. 그러나 술잔을 쥐려는 정은의 손이 반박자 늦었다. 인범이 정은의 잔을 슬며시 본인 앞으로 가져갔다.
“나 아직 멀쩡해요. 더 마실 수 있다고. 외로운 이들끼리 짠해요. 짠.”
“이거 마시면 나랑 사귀는 거다.. 방금 나 되게 정우성 같았지!!”
푸흡- 인범의 웃음 선창에 산과 정은도 푸하핫- 제창을 했다.
어둠이 절정인 도시의 거리를 인범과 정은은 느릿하게 걸어갔다. 건물 외벽에 제멋대로 달린 각양각색의 간판들,, 평소라면 심란해서 눈길도 주지 않았었는데 동공이 취한 모양인지 밉상처럼 보이지 않았다.
“슬퍼서 아름다운 건지 아니면 아름다워서 슬픈 건지!! 결국 우리 모두.. 나 안 취했어요."
“그 할 말 나한테는 없나 봐요.”
정은의 두 눈은 가느다랗게 변했다 이내 커다란 동그라미가 되었다.
“선배님의 은밀한 사생활에 관심 끄고, 졸릴 때 내 버릇 알려준 남자는 비밀!!”
“취했네. 관심 없다고 분명 말했는데. 사과 아직 안 했잖아.”
“설마, 버스 정류장. 그 일?”
“단박에 알아듣는 거 보니 찜찜은 했나 봐요.”
취하지도 않은 술이 확 깨는 듯했다. 재빨리 두 손을 허리에 단단히 얹고서는 앙칼지게 쏘아댔다.
“찜찜? 전혀요. 오늘 커피도 내가 샀고, 디저트 사양한 건 후배님이고, 떡볶이도 권유했지만 마주 앉아 밥 먹기 싫다고 등 돌리고 팽- 가버린 사람이 누군데. 적반하장도 유분수지."
“피곤하다고 했지. 내가 언제.”
“그런 사람이 전화는 왜 한 건데. 현장을 내가 잡은 거지. 찰칵!!”
정은의 눈꼬리와 입꼬리가 동시에 올라가자 인범의 목소리는 잦아들었다. 말없이 선 그의 모습이 왠지 짠했다. 모성애가 많아 여자라지..
“오늘은 내가 배웅해 준다. 기분 좋게 마신 술자리 틀지 말고. 그만하죠. 어~ 저기 빈 택시.”
도로 쪽으로 한 발짝 나아가 빈 택시를 잡은 후 인범을 뒷좌석에 밀어 넣고는 보름달처럼 환하게 정은은 웃었다.
“조심히 가고 메모지랑 볼펜 잘 쓸게요. 오늘 즐거웠어요.”
아파트 앞 횡단보도에 멈춰 선 정은의 손에 쥐어진 핸드폰이 깜냥 울어댔다. 띵-
'마지막 말은 나도, 첫 번째 말은 반사, 그리고 중간 말은 손님들이랑 간호사들에게 절대 뿌리지 말 것. 회사 이름 박힌 거라 유통 경로 역추적 들어올 수 있음.. 이상 통신 끝.'
횡단보도 신호등은 빨간불, 여전히 화난 상태지만 정은은 주황불이었다. 오렌지 과즙 터지듯 팡팡 웃음이 터지고 있었다. 혹여 신호 대기 중인 멈춰 선 차들이 보기라도 할까 싶어 황급히 손으로 입을 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