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oth sides now

- 보통의 연애소설 -

by 슈크림빵

적당히 어두운 매장 안은 그루브감이 있는 도회적인 시티팝으로 가득했다. 병맥주를 손에 든 채 가볍게 어깨를 들썩이거나 앉은 채로 리듬에 몸을 움직이는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아스팔트와 고층 건물의 대도시를 탈출한 사람들은 세련된 감성 리듬에 몸을 맡기고 있었다. 세상 속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상 같았다.

“거 참 사람 신경 쓰이게. 가리던가. 덮던가.”

무릎 위로 고작 한 뼘 드러난 허벅지가 눈엣가시였나 보다. 연방 잔소리를 해대고도 성에 안 찼는지, 인범

은 재킷을 건넸지만 정은은 극구 사양했다.

"유니폼 벗고 한창 기분 내고 있는데 그걸 또 짚고 넘어가지. 두 사람 피로연이라 입은 거고, 후배님 피로연 할 때는 쪽 진 머리에 한복 입고 갈게요. 오케이!!"

“얼씨구, 그럼 신발이라도 제대로던가. 멀쩡한 게 하나도 없잖아.”

정은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쓰윽 훑은 인범은 보란 듯이 툴툴거렸다.

“학주도 요새는 안 그런다. 한 마디만 더하면 자리 옮길 거야.”

안되겠던지 산은 목소리를 보탰다.

“이런 거 차리려면 얼마면 될까? 표면상으로 보면 같은 물장사지만 본질상으로는 하늘과 땅차이. '맥주 한 병 더'는 다반사지만 '커피 한 잔 더'는 가뭄에 콩 나니까.. 해서 술장사 하던 사람들이 커피 장사 못한다는, 속 터져서. 내가 또 여럿 봤지."

“최종 목적지는 술장사라는 그 말?”

“못할 것도 없지. 주류 판매 가능한 일반 음식점으로 업태랑 종목만 쓰윽 바꾸면, 그게 세무서 하는 일이고."

“뭐지, 이 결연한 의지는?”

“왜요!! 젓가락을 두드린댔어. 니나노를 한댔어. 커피든 술이든 파는 행위가 어때서? 정작 나 자신만 안 팔면 되는 거잖아. 직업에 귀천이 어딨다고."

한껏 팽팽해진 두 사람의 줄다리기를 보다 못한 산이 중재에 나섰다.

“좋은 날, 좋은 자리, 좋은 사람들끼리 왜들 그래요. 연거푸 들이켜던데 화장실 안 가냐? 둘이 움직이면 선배님 혼자 남아 심심하니까 먼저 다녀 오지."

인범이 마지못해 자리를 피하자 기다렸다는 듯 산은 말을 이어갔다.

“저 자식 말은 저렇게 해도 선배님 화장실 간 사이에 시계 한 번, 출입문 한 번 번갈아 보던데요. 높은 구두 신어 혹여 넘어지면 수습은 본인 몫이라고 투덜거렸지만,, 감춘 본심은 걱정하는 마음이니까."

“인해 씨 바보네. 이렇게 좋은 남자 몰라보고. 시어머니한테 꾸중들어 훌쩍이는 안사람 달래 주는 서방님처럼.."

정은이 빙그레 웃자 멋쩍은 듯 산은 콧등을 쓸었다.

“정신줄 놓지는 말고. 2차로 노래방 가자. 결혼 전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르니까. 열외는 없다. 선배님도요."

공석인 인범의 자리에 엉덩이를 붙인 지훈의 음성은 단호했다.

“미리 하는 피로연인데 우리만? 그럴 정신 있어요??”

“물론요. 짝꿍 노래 아직이죠? 가수 뺨치게 불러요.”

지훈의 두 눈은 인범을 찾았다.

“짝꿍 뺨칠까 봐 화장실 보냈다.”

풋- 지훈이 솔직하게 웃었다.

“농담 늘은 거 봐. 다 컸네. 이산.”

“짝꿍은 무슨.”

입을 삐죽거리며 정은은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능숙하게 리모컨을 조작하니 드럼 소리로 포문을 열었다. 이내 본 조비의 <always>가 흘러나왔다. 노래 좀 한다는 남자라면 도전해 본다는 그 곡,, 높낮이가 다른 인트로의 반복적인 드럼 소리가 불규칙한 인범의 심장 박동만 같았다. 이별의 아픔을 표현한 단순한 노래 아닌, 죽을 때까지 아니 죽어서도 당신만을 사랑하겠다는 당신만이 내 사랑이라는,, 한 남자의 애절한 절규였다는 걸 그의 목소리를 통해 깨닫게 된 정은이었다. 때지난 사랑이 당최 어떠하였길래 감정선이 저리도 절절한 건지.. 다 타서 재만 남았다는 그의 지난 얘기가 문득 떠올랐다. 하아- 여과 없이 튀어나온 속마음이 노랫소리에 묻혔다. 다행이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허리를 반듯하게 접은 채 지훈은 공손히 인사를 건넸다.

“윗사람 공경할 줄도 알고 잘 배웠네.”

농을 던지고 정은은 장난스레 웃었다.

“초저녁 잠이 늘어 요 근래 일찍 주무신다고. 12시 이미 훌쩍이라서.”

“이럴 줄 알고 시간 날 때 틈틈이 눈 붙였다는. 근데 간만이라 그런지 피곤은 하다.”

정은의 입매는 억지웃음을 달고 있었지만, 인범을 향한 눈매는 매서웠다.

“다음 만남은 결혼식이 되려나?”

“섭섭한 소리 하기는, 남자들끼리 찐하게 뭉쳐야지.”

“지 혼자 꽃길 가면서. 엄살은..”

산과 지훈의 이야기가 꼬리를 물자 인범은 정은의 팔을 슬쩍 건드렸다.

“우리 먼저 갑시다.”

노래방 간판은 성황리에 영업 중이었만 골목길 상황은 정반대였다. 골목 초입부터 내달리던 오토바이가 제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부우우웅- 거세진 굉음에 정은이 몸을 돌려 반응한 순간,, 인범이 그녀의 어깨를 다급히 감싸 쥐고는 빈틈없이 품에 안았다.

“골목에서,, 미쳤나!!”

멀어져 가는 오토바이를 끝까지 좇던 눈으로 그제야 정은을 바라보았다.

“괜찮아요?”

여기까지는 드라마를 통해 익숙했던 장면,, 전개되는 다음 상황은 생경스러운 장면이었다.

“후배님 옷이.. 안 괜찮아요.”

인범의 품에서 풀려난 정은의 손은 흰 셔츠가 감추고 있는 그의 가슴팍을 가리키고 있었다. 제 빛깔을 조금 상실하긴 했지만 옅은 분홍빛의 선명한 입술 자국이었다. 고개를 내려 가슴께를 살피는 인범을 향해 그녀가 머뭇거리며 말했다.

"벗어요. 세탁해서 줄게요."

“지금?”

“아.. 세탁비 청구해요. 꼭요!!”

약속이라도 한 듯 연희, 지훈, 산은 입을 틀어막았다.

“더 있다간 곤란해질 테니 이만 갑시다.”

히죽- 웃는 인범이 미웠지만 방법이 없었다. 그녀가 그의 뒤를 졸졸 따랐다. 뭐 마려운 강아지처럼 말이다.


연희랑 지훈이 하나가 되는 날.. 구름 한 점 없는 청명한 하늘이 먼저 축하를 보내왔다.

“도망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인데 후회 안 하겠어?”

“아래층 신랑 친구들 물 좋던데.”

“법적으로 이미 부부라서 그건 곤란해.”

인범과 산을 향해 연희가 차례로 댓글을 달았다.

“이 남자들 괜히 샘나서 그러는 거니 한 귀로 흘려요.”

“제일 샘난 사람은 따로 있는 거 같은데.”

“그 샘난 사람 여기 있다. 니들은 나도 안 보고 쪼르르.. 그럴 수가 있냐?”

정은과 인범의 대화에 불쑥 등장한 지훈의 목소리는 뾰로통했다.

“결혼식장 와서 신부 먼저 보면 백년해로한데요. 두 사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라고.”

“아~ 그렇구나.”

순백의 신부인 연희의 자태에 질세라 지훈은 금세 환해졌다.


"신랑, 신부 퇴장."

예식의 끝을 알리는 주례의 우렁찬 목청은 등 뒤에서 넘실거리다 못해 결국 두 사람을 떠밀고야 말았다. 숨을 내쉬어 이는 바람으로 키프로스 섬에 비너스를 안착시키는 '서풍의 신' 제피로스처럼 말이다. '여기여차 돛 달아라.',, 나아갈 방향을 잡았는지 닻을 올린 배는 스르르 미끄러져 나갔다. 바람을 담뿍 담아 한껏 부풀어진 돛을 앞세우고 속내를 감춘 짙푸른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순풍이 분다 아하 돛 달아라 아하.

천남천북(川南川北)에 아하 널리신 재물 아하.

간다 간다 아하 배 떠나 간다 아하.

어야디야 어여차 어그야디여 어여차.


“키는 어떻게 컸데?”

“부모님이 훤칠하세요. 특히 엄마가. 대신 잡채 이만큼 가져왔잖아요. 잔치국수나 잡채나, 소면이나 당면이나. 온 맘 다해 축하와 박수를 보냈다고, 그니까 주례사 내내 딴짓한 후배님시고 못다 한 축하도 꼭 하시고."

혀끝을 살짝 내밀며 정은은 잔치국수가 담긴 그릇을 인범 쪽으로 슬며시 밀어 놓았다.

“이참에 그냥 식 올려요. 하객들도 저리 많은데. 주례 선생님도 아직이고.”

속마음을 감춘 채 산이 억지 좋은 말을 늘어놓던 그때, 낯선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빈 자리면 앉아도 될까요?”

“네. 앉으세요.”

정은이 빈 좌석에 놓아둔 가방을 제 무릎 위로 가져가자, 옆자리에 앉으며 그녀는 목례를 건넸다. 조막만한 얼굴에 큼지막한 이목구비,, 보기 드문 미인이었다.

“지훈이가 얘기 안 했나 보구나. 하긴..”

‘어, 아는 사이? 동창인가?’ 속마음이 한껏 촉수를 세웠지만 경청의 자세를 몸소 실천하는 정은이었다.

“한국엔 언제 온 거야? 지훈이는 또 왜?”

산의 목소리는 생경스러웠다. 딱딱했고 차가웠다. ‘설마 지훈이의 전?'.. 그녀와 맞닿은 왼쪽 귀에 신경 세포들을 장전시키며 정은은 집중했다.

“한 달 조금 넘었지. 교수님 소개로 시립 미술관에 있어. 관장님이랑 지훈이랑 보통 사이는 넘더라. 미주알고주알 안 했더니 관장님 대신 여기 있는 거고, 식만 보고 가려했는데, 잔치국수 안 먹고 가면 백년해로 못한다고 누가 그래서.. 반갑지는 않겠지만 국수 한 그릇만 먹고 갈게. 얼굴 따로 생각 따로 못하는 건 여전하네. 이인범.."

까맣고 동그란 그녀의 눈동자는 인범을 바라보았고 속눈썹 하나 깜박이지 않은 채로 그도 그녀를 응시했다. 식당 내의 수많은 사람들이 목소리와 웃음을 뱉어내고 있었지만 그녀와 인범만이 말없이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정지된 화면처럼,, 그렇게..


“영화 다음에 봐요. 미안해요.”

“피곤하던 참에 잘됐다.”

이렇다 할 표정 없이 미안함을 표현하는 인범을 향해 정은은 거짓 핑계를 댔다.

“예상치 못한 만남이었잖아요. 사계절을 것도 세 번이나 함께 보냈다면서, 소환하고 되뇌고 곱씹으려면 시간 필요할 듯하고.. 딱 오늘만 그래요. 먼저 갈게요."

애써 밝게 웃으며 정은은 서둘러 등을 보였다. 그녀의 등장과 함께 바라다본 인범은 다른 사람 같았다. 웃음도 장난도 없이 몸에서 피가 다 빠져나간 듯 창백했고 무표정했다. 인사를 건넨 그의 목소리에선 감정을 읽을 수 없었다. 차라리 화를 내고 욕을 했더라면.. 그를 침묵하게 한, 보태어 자신까지 들쑤셔 놓은, 원치 않은 만남에 정은의 심장이 저만치 내려앉았다.


“질겅질겅 씹어대고 싶어서. 여기 곱창 맛있어요.”

“곱창에 소주면 끝나지.”

“매운 닭발도 있어요. 간호사 선생님들 스트레스 푸는 단골집.”

주황색 앞치마를 건네며 산은 환하게 웃었다.

“손으로 하는 일이라면 빠지지 않는데. 소문대로 명의신가 봅니다. 전화 반가웠어요. 텔레파시가 통했나 봐."

“혜진이.. 다 지난 일이에요. 담아 두지 않았으면 해요.”

‘혜진이였구나.’.. 들릴 듯 말 듯한 정은의 음성이었다.

“들켰다. 감춘다고 한 건데도. 차라리 잘됐네. 당사자 아닌 게 어디야. 감기랑 사랑은 숨길 수 없다는 말, 진리인 듯.."

애먼 소주잔을 빙그르르 돌리며 말하는 정은의 목소리가 서걱거렸다.

“차라리 뻔한 사람이라면 좋겠어요. 빙 두르다 보면 어느 순간 좁혀지겠지, 아님 그 반대일 수도 있고, 해서 기다리는 거예요."

숨겼던 속내를 툭- 털어놓은 정은의 두 눈동자가 눈 위의 발자국 모양이었다. 깊게 파여있었다.

"한껏 차려입고서는 당신이 궁금해졌어 하더니 이내 반할지에 대한 탐색전은 아니라 하고, 비 맞을까 봐 일부러 왔다면서 속마음은 에둘러 말하고, 우연도 겹치면 인연이라 하지만 오늘 같은 우연도 있으니까.. 솔직히 잘 모르겠어요. 오늘은 아카시아 잎도 모른다 할 것 같아. 하아.."

“들은 물은 얘기는 아직이지만, 하나는 확실해요. 간 보는 거는 아니라는. 그런 못난 자식은 아니에요."

골똘히 정은을 살피던 산은 속에 말을 하나하나 나열했다. 아침, 점심, 저녁 복용약이 담긴 처방전처럼 말이다. 정은이 물끄러미 산을 바라보았고 생각이 가득한 얼굴로 그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인해만 해바라기 했던 건 아니에요. 이 사랑이 맞는 건지 다른 사랑이 있는 건지, 소개팅도 해보고 다른 사람도 만나봤어요. 잠깐이었지만.. 음. 근데 못하겠더라고요. 첫째 나한테 솔직하지 못한 거고, 둘째 상대에게 못할 짓이고.. '작던 크던 핑계를 대며 여차하면 도망가려 한다.' 여자들의 흔한 편견이란 것도 알아요 아는데, 변명 아닌 변명을 하자면, 운전 중에 브레이크 밟는 거 무지 싫어해요. 좋아하는 여자 앞에서는 더더욱,, 속도 조절은 물론 정지선도 지키는 게 옳지만 그게 참 힘들어요. 여자들이 이런저런 생각하는 그 시간에도 남자는 아랑곳 않고 종일 몰두해요. 중반에 속도 내는 여자들과는 달리 초반부터 전력 질주하는,, 그게 남자들이에요. 그니까 마음에 결정 끝나면 손잡고 달려요. 도망갈 여지 그딴 거 만들 틈을 안 주면 되잖아요. 지 연애 엉망인 놈들이 남 연애엔 박사라죠!!"

말을 마친 산은 입술을 앙- 다물고 머쓱한 듯 어깨를 쓱 올렸다.

"알다가도 모르겠고 설레다가도 철렁하기도 하고 손 내밀어 볼까 싶다가도 부러 선 긋게 되고, 사랑을 두 시각에서 바라봤어요. 주기도 받기도 하는.. 그렇지만 다시금 환상을 떠올려요. 사랑이 뭔지 정말 모르겠는데,, 조금씩 번져가요. 마치 종이에 떨어진 잉크처럼.."

미세하긴 했지만 정은의 목소리 끝은 분명 떨림이 있었다.

"사랑은 왜 이렇게 어려운 건지. 수학 공식이라면, 영어 단어였더라면.. 그건 자신 있는데. "

"보이지도 잡히지도 색도 냄새도 형체도 없는 추상 명사니까."

하아.. 참지 못하고 한숨이 새어 나왔다. 마주한 두 사람은 열병을 앓는 사춘기 소년, 소녀 같았다.

“히포크라테스 선서 알죠? '나의 전문적인 업무와 관련이 있든 없든 나는 일생 동안 결코 밖에서 말해서는 안 되는 것을 보거나 들을 것이다. 나는 그와 같은 모든 것을 비밀로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결코 누설하지 않겠노라.' 큰 소리로 외쳐요. 참고로 난 두 번 외쳤다는.."

엄지와 검지로 입에 자물쇠를 채우는 산의 연기가 그럴듯했다. 그가 보내는 따듯한 응원에 정은은 미소 지었다.

“자 그럼 헛헛하고 심란한 이들끼리 한 잔 할까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술잔을 들이켜고는 안주 삼아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좋은 소식 하나 전해줄까요!!”

“갑자기?”

“내가 좋아하는 남자보다 나를 좋아해 주는 남자를 만나야 행복하다는 거, 여자들은 알아요. 본능으로도 알고 엄마의 주입식 교육으로도 알고,, 9회 말 2아웃 주자 만루 동점 상황에서 유격수 키 넘기는 짧은 안타 하나면 역전되듯, 아직 모르잖아요. 힘냅시다!! 노력만으로 안된다는 거 알지만 그럼에도요."

테이블에 놓인 빈 잔에 술을 가득 채우고는 정은이 크게 외쳤다.

“이산의 사랑을 응원합니다!!”

잔에 담긴 술이 넘실거릴 만큼 힘이 실린 건배를 한 그들은 목이 탔는지 한 방울도 남김없이 털어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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