썼다 지운다. 널 사랑해

- 보통의 연애소설 -

by 슈크림빵

콩가루로 산을 이룬 오목한 검은색 그릇이 담긴 네모난 트레이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는 인범의 손길이 조심스러웠다. ‘마마 대령했사옵니다.’ 하듯 말이다. 앙증맞은 다기잔에 가득 담긴 연유를 휘- 두르고 수저 가득 빙수를 담아 입 속에 넣고는 몸으로 말했다. '얼마나 맛있게요!!' 눈앞의 그가 사랑스러워졌다. 뭐,, 사랑? 풋- 새어 나온 웃음에 날린 콩가루가 검은색 트레이의 빈 공간에 불시착했다.

“콩가루가 국내산인가 봐요. 가벼이 흩날리는 거 보면.”

‘너는 어쩜.’ 하듯 인범은 쿡쿡거렸다. 삼복더위에도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멀리하는 정은이 빙수 전문점에 앉아 있다. 칭찬은 고래를 춤추게 하고 사랑은 식성마저도 바꾸는 걸까? 또,, 사랑 이래.

커다란 알사탕을 입 안에 넣은 듯 양볼이 빵빵해진 채 우적우적 먹어대는 모습이, 입언저리에 묻은 콩가루마저도 사랑스러웠다. 이 추세라면 <사랑가>도 너끈히 완창할 듯했다. 괜스레 귓불이 뜨끈뜨끈해졌다. 불은 초동 진화에 성패가 달렸기에 인범의 시범대로 수저 가득 빙수를 담아 입 안에 넣었다.

“구. 우. 웃?"

입을 오물거리며 인범은 어중간하게 물었다. '귀엽네. 저 남자. 귀여워? 놓지 마 정신줄!!' 다시금 수저 가득 빙

수를 담아 입 안에 넣으며 이번에는 주문을 외웠다. 머리와 가슴은 차가워질지어다. 하쿠나마타타~..

"시원하고 달달하고.”

“첨엔 나도.. 달고 시원하고 빙수가 그런 거지 뭐. 팥 하나 없는데도 두고두고 생각나는 맛. 슴슴한 평양냉면처럼, 목욕 후엔 바나나우유를 먹어야 개운하듯, 여름엔 인절미 빙수."

순간, 정은의 마음은 급해졌다. 인절미 빙수가 단종되지 않도록 리뷰를 써야만 했다. 그래야 매해 여름 사랑스러운 인범을 계속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또~사랑!!

"하아..”

필터링 하나 없이 마음의 소리가 툭 튀어나왔다.

“감탄사인 거죠?”

아는 걸까? 모르는 걸까? 인범은 자신 없이 물어왔다.

“맞아요. 비교급을 넘어선 최상급 감탄사.”

하회탈처럼 그가 웃었다. 반반한 구석 하나 없는 그 모습마저도 정은은 좋았다.


빨간 불에 멈춰 선 인범의 차 앞으로 손을 맞잡은 남녀가 보행 신호의 깜박임에 맞춰 유유히 걸어갔다. 정은의 시선이 두 사람을 좇았다.

“누구야!!”

핸들을 가볍게 내리치며 인범은 따져 물었다.

“빨대 하나로 커피 나눠 마신 그 남자, 누구냐고?”

“눈매가 기다랗게 빠진 게 한복이 잘 어울릴 상일세. 쥐어주고 싶다. 방울.”

“어. 어?”

‘해보자는 건가?’ 하듯 인범은 한쪽 눈썹을 높다랗게 추켜올렸다.

“근데.. 땡.”

“슬픈 얘기구나.”

‘어떻게 알았니!’ 하듯 정은의 눈은 순정 만화 주인공처럼 동그랗게 커졌다.

근데와 땡 사이에 멈춤이 있으니까."

“대관절 네놈은 누구더냐!!”

호기롭게 정은이 농을 건넸지만 인범의 눈은 끈덕지게 재촉했다. ‘이실직고 대답해.’

“두 사람이 그랬어요. 내 앞에서.”

“나빴네.”

“그렇게 말하지 마요. 미안한 건 나니까.”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정은은 입을 꾹 닫았고, 인범은 시선은 물끄러미 두고 입을 부루퉁하게 내밀어 말했다.

“더울까 봐 데리러 가고 빙수도 먹인 나는 나쁜 놈이고 그 남자는 감싸는 거 봐. 내리라고 하자니 치사해 보이고, 신호 바뀔 때까지 말 걸지 마요."

이내 창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널찍한 그의 등이 말했다. '나 삐쳤다고.'

“그런 의미에서 저녁은 내가 살게요. 저녁 먹을 배는 남겨둔 거죠?”

"저녁도 안 먹고 헤어지려 했단 말인가? 매너가 꽝이네."

“신호 안 바뀌었는데.”

“혼잣말도 못하나. 참.”

인범의 투덜거림에 새어 나오는 웃음을 감추려는 듯 정은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음. 극장 냄새.”

“팝콘 냄새겠지.”

“극장에 와야 맡을 수 있으니까.”

말을 하다 말고 정은은 인범을 노려보았다. 팝콘을 꼭 먹어야 맛인가? 콜라는 두 개여도 팝콘은 하나여야만 하는 이유는 뻔하잖아. 팝콘 집으려다 손가락이 얽히고, 설피 손을 잡아 볼 양에 팝콘을 집는 건가? 아무튼.. 어둑한 극장 내부는 제법 북적였다. 저들도 저녁을 위한 시간 때우기인가 아니면 일요일의 효과란 말인가. 벽면 중간에 박힌 달, 별 모양의 조명이 은은한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도 인범의 얼굴 윤곽은 또렷해 보였다. 이래서 극장에 오나 보다. 별님 달님 보러.. 쿡-.. '허락 없이 나대지 마라. 심장아.'

“티켓 뽑아 올게요.”

인범이 무인 티켓 판매기를 향해 걸어갔다. 어디를 가나 쉬이 눈에 띄는, 이제는 익숙해진 놈, 조만간 내 집 주방에서도 보게 되는 건 아닌지 사람의 온기가, 건네는 대화가 사라지고 있다. 점점.. 정은이 아이처럼 투정을 부렸다. '나 저 녀석 싫다고.'

“낭만이 없네. 마트 영수증도 아니고.”

손에 든 영화 티켓을 팔랑이며 정은은 뚱하게 말했다.

“눈 돌리는 곳마다 낭만이면 그건 낭만이 아닌 거지.”

“한 귀퉁이 잘라낸 영화 티켓 모았다가 책갈피도 하고, 책상 정리하다 잠시 추억 삼매경 해보고, 그러잖아."

“추억 속의 그 남자들 관심 없다는.”

아쉬운 듯 입을 연 정은을 향해 인범은 고춧가루를 뿌렸다. 퍽-.

“왜 남자라고 단정 짓지?”

“동성 간에 추억은 무슨.”

그가 콧방귀를 뀌었다. 더 말해봤자 좋은 소리 못 들을 것 같아 입을 닫아 버린 그때였다. 두 사람을 향해 쏜살같이 돌진해 온 남자가 어깨에 멘 가방으로 미처 피하지 못한 인범의 왼쪽 얼굴을 가격하고는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 영화관 끝쪽의 엘리베이터를 향해 빠르게 뛰어갔다.

“야!!”

격양된 정은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남자는 대충 인사를 건넸다.

“저 자식이.. 정신이 나갔나.”

“나 괜찮아요.”

“내가 안 괜찮아. 피,, 나요.”

피가 살짝 배어 나온 인범의 입술 가장자리를 살피는 정은의 목소리는 걱정스러웠다. 입술을 만지작거리던 손으로 바지 주머니를 훑은 인범은 표정으로 아차, 했다.

“차에 두고 왔네. 입술이 건조해서.”

그 순간, 정은의 검지손가락이 인범의 입술을 어루만졌다.

“코미디 영화라면서요. 맘껏 웃지 못할 거 같아서. 다됐다.”

립밤 뚜껑을 돌려 닫아 어깨에 멘 에코백에 넣고는 씽긋- 그녀가 웃었다.


“생각대로 입은 거칠고 손길은 의외로 부드럽던데..”

상영관을 빠져나오며 인범은 말을 걸어왔다. 언제부터인가 그는 진심을 말할 때는 말을 짧게 했다. 확인이 더 필요하지만 말이다. 결론은 둘 다 별로라는 건가? 아니면 손길은 부드럽다는 건가? 의외라는 말에 좋아해야 하는 걸까? 정은의 머릿속은 온통 물음표로 가득했다. 마침표가 필요한 시점이기에, ‘단 한 번도 장식품인 적이 없었다. 돌아가라 머리야.' 재촉하는 찰나, '듣고 있어?' 묻듯, 팔뚝의 살을 찔러 누르는 인범을 향해 고심 끝에 정은은 입을 열었다.

“무슨 말 했어요?”

“대체 무슨 생각을 했길래.”

인범의 목소리는 낮게 퉁퉁거렸다.

“결혼했냐는 여자의 물음에 반지 낀 손 대신 오른손으로 입 가리고 웃는 건 뭐냐고, 결국 둘이 이어진 것도 아니던데. 감독의 의도는 뭘까? 그거 생각하고 있었는데. 중요한 말이었어요?"

‘말을 말자.’ 하듯 인범은 입을 꾹 닫았다. 모르쇠,, 적절했다. 퍽이나!! 어쨌거나 서둘러 상황을 넘겼으니 다행이라 생각했다. 가만,, 본디 부사란 용언 또는 다른 말 앞에 놓여 그 뜻을 분명하게 하는 품사가 아니었던가? 그렇다면 ‘부드럽던데’라는 그 말을 하기 위해, 자음 모음을 부러 배열시킨 건가? '의외로'라는 단어가 이렇게 설레는 말이었다니.. 뉘엿했지만 햇살이 남아있었다. 머릿속에서 빙글빙글 돌고 있는 부사가 달콤했다. 그중 단연 으뜸은 인범의 짧아진 말,, 그것이 그녀로 하여금 구름 사이를 노닐게 했다.


연희, 지훈, 산, 인범, 정은이 한자리에 둘러앉은 일요일 저녁, 멤버가 늘어나니 동호회 느낌이 물씬했다. 친목 도모를 위한 본격적인 모임이 된 셈이었지만 딱히 싫지 않은 정은은 그러려니 했다.

“두 사람 오붓한 데이트에 객이 된 것만 같아서.”

“둘 보다는 셋이. 나는 이 멤버 좋더라. 하하.”

맘에도 없는 말을 잘도 내뱉는 지훈을 향해 정은은 어색하게나마 웃음을 보였다.

“심경의 변화라도 있는 거야? 카톡 프로필 말이야. 갈수록 길어져. 연희랑 나랑 이거 알아내려고 머리 맞대고 마신 맥주가 몇 캔인지 알아?"

두루뭉술하게 묻던 지훈이 전략을 바꿔 빠른 직구를 날렸다. ‘실은 나도 그게 궁금했거든.’ 정은의 눈빛은 진지했고 이내 지훈을 향해 무언의 고마움을 전했다.

“ㅅㄱㄷㄹㅇㅇㄱㅊㄱㅅㄱㅇㅇㅇㄹㅂㄷㄹㄷㄷ.. 나도 궁금했어.”

국어 선생님처럼 산은 또박또박 말했다.

“맞추는 사람 선물 있다.”

인범은 빙그레 웃었다.

“그럼 내가 먼저. 시계, 드라이어기, 초, 가습기, 윷, 안약, 립밤, 드론, 여기까지는 어떻게 끼워 맞춰봤는데.. ㄷㄷ은 당최. 해서 등등,, 이 아닐까? 쇼핑하다 보면 원래 리스트에 적힌 것만 사는 건 아니니까. 해서 여지를 남기는 게 아닐까?"

‘제법인데.’ 하듯 인범은 눈꼬리를 슬쩍 올리고 지훈을 바라보았다.

“이번엔 내 차례. 생곤드레, 오이김치, 김, 성게알, 우유, 럼, 밥, 두릅.. 곤드레 비빔밥, 성게알밥 위에 김 얹어서 오이김치랑 먹겠네. 두릅은 살짝 데쳐 초고추장 찍어야 맛나는데, 우유랑 럼은 식후 30분일 테고, 해서 이제 제법 프로 자취러의 포스가 느껴지는데.. 산이 오빠는 병원밥 챙겨 먹지만, 인범 오빠는 커피가 밥이고 술이 반찬이라 친구 먼저 보내는 나쁜 놈 될 거라고 속상해하길래."

말없이 미소 짓는 인범을 보며 연희는 다음 말을 이어갔다.

“근데 ㄷㄷ은 전혀 모르겠더라. 첨엔 두부인가? 근데 ㄷ은 오른쪽, ㅂ은 왼쪽이라 거리가 멀고, 해서 도미인가? 근데 ㅁ은 한영 변환키 옆 제일 아래 있어서 이것도 pass,, 삼성폰 쓰잖아요. 나도 그렇고. 해서 자판 보며 엄청 연구했지. 혹시 떡? 왜 ㄷ, ㄸ, ㅌ은 같은 칸에서 변환되니까. 급한 마음에 ㄷㄷ을 눌러버린 건 아닐까 하고.."

자신 없는 듯했지만 연희는 입 안의 말들을 또박또박 뱉어냈다.

“신연희 제법인걸. 이 자식은 전생에 나라를 구했지 싶어.”

연희에게는 엄지를 들어, 지훈에게는 부러운 시선을 쏘며,, 인범은 감추지 않았다.

“누가 부부 아니랄까 봐 몸도 하나요. 마음 역시 하나인 것이 천생연분이로구나.”

산은 기분 좋게 웃었다. ‘다음 응시생 말해 보거라.’ 하듯 인범의 눈은 산에게 꽂혔다.

“이번 주는 수술이 계속이라. 그냥 궁금만 했어.”

‘탈락이요.’ 하듯 긴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가볍게 내리치고는 정은을 바라보는 인범의 눈에 기대가 가득했다. 그렇지만 지훈이 조금 빨랐다.

“선배님은요?”

“음.. 카톡 프로필까지 챙겨보진 않아서.”

거짓말이었다. 유추해 본 답도 있었는데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안물 안궁 전술을 구사하는 정은으로 인해 지훈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고 인범의 눈엔 서운한 빛이 잠깐 스쳤다.

“모두 땡. 선물은 없는 걸로.”

인범이 부러 크게 말하며 분위기를 전환시켰다.

“선물은 관심 없어요. 해서 정답은 뭔데요?”

연희의 궁금한 마음은 현재 진행형이었다.

“.. 음. 생각날 때마다 쓰는 내 마음의 일기장. 들추는 거 아니라고 인마.”

인범은 그저 담담했다.

“그럼 들키고 싶은 거예요. 아님 감추고 싶은 거예요?”

속마음을 숨기지 않은 채 연희는 차근차근 물었다. 지훈도 늘 그렇던데. 저들 부부의 사는 법이, 대화법이 정은은 부러웠다.

“.. 둘 다? 들키고 싶은 마음이 더 큰 것도 같고..”

말끝을 흐리는 인범은 왠지 자신이 없어 보였다.

“결국 사랑 얘기구먼.”

“내가 넌 줄 알아. 살아가는 얘기라고.”

“나도 일기를 좀 쓸까 봐. 요즘 회사 가기 싫다고. 사장님이 누르고 후배 놈이 기어오르고, 대학원까지 나온 놈이 탄탄대로 걷어차고 내 밑으로 왔단다."

많이 힘든 모양인지 지훈의 불평이 봇물 터지듯 쏟아졌다.

“굳이 왜?”

월급쟁이 마음 월급쟁이가 안다고 편을 드는 인범을 향해 지훈은 얼굴을 들이밀었다.

“내 말이. 아버지가 예전 같지 않으시다고 옆에서 시간 보내고 싶다고.”

“효자일세.”

“나라고 다를까 봐? 우린 죽어라 공부만 했지. 후배들은 환자 중심의 세계관을 갖고 있어. 실력만 갖춘 의사의 시대는 끝난 거 같다."

부러운 듯 턱을 받치고 바라보는 인범과 지훈을 향해 산도 고민을 토로했다. 대화는 어느새 식후 티타임 시간으로 전개되었고 주제는 ‘월급쟁이의 비애’였다. 소주잔과 한숨을 몇 차례 반복하며 세 남자의 대화는 이어졌다.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마법의 다이아몬드 모자를 쓰고 파랑새를 찾아 떠납니다.

치르치르와 미치르는 정들었던 친구들과 헤어지기 싫었어요.

빵, 불, 물, 우유, 사탕, 개, 그리고 고양이마저 슬퍼했어요.


“아직 파랑새를 못 찾았잖아요. 요술쟁이 할머니께는 뭐라고 하죠?”

“우리는 최선을 다했어요. 그걸로 된 거예요.”

빛의 요정이 빙그레 웃었어요.


두 아이는 추억의 나라, 밤의 궁전, 행복의 궁전 등을 여행하며 이상하고도 놀라운 일들을 경험해요. 하지만 결국 파랑새를 찾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오지요. 그런데 놀랍게도 파랑새는 집에서 기르던 새였어요.



찾으려 했지만 결국 파랑새는 없었다. 영원한 것 또한 없다. 그렇지만 사랑은 있었다.

마주 앉아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를 향한 이 시간은.. 사랑이었다. 정은의 심장이 설레게 뛰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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