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럴 줄 알았으면 좀 갖춰 입고 올 걸.. 백화점 1층에 막 들어선 정은은 청바지에 흰 남방, 운동화 차림이 한없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늘어선 명품 매장의 짓누르는 무게로 인해 그런 거라 서둘러 생각을 막설해 보았지만 은은한 광택감이 도는 연그레이 슈트를 갖춰 입은 인범을 보고는 허탈하게 읊조렸다. 오늘 망조로구나!!
“고놈 참 싱싱한 게 제주산인가 봐.”
인범의 양복 재킷 끝자락을 잡고 앞뒤로 흔들며 보란 듯이 비아냥거렸다.
“깜짝이야.”
“그건 내가 더,, 오늘의 드레스코드가 수산 시장이었으면 미리 말을 했어야지. 후배님은 은갈치, 나는 먹갈치,, 가능했잖아. 치."
“새로 장만한 내 양복 욕보이지 마요."
팔짱을 끼고 철통 방어하며 인범은 말했다.
“자랑이 하고 싶었나 봐요.”
정은은 입술을 비쭉거렸다.
“와이셔츠 사러 가자고.”
정은이 거부의 뜻을 피력했지만 인범의 힘이 우세했다. 커다란 손으로 정은의 손목을 감아쥐고는 이내 에스컬레이터 동승에 성공했다.
"목을 잡기도 그렇다고 머리채를 잡을 수도 없으니까. 긴 남방이라 손목 아닌 옷을 잡은 게 엄연한 사실이니 괜히 부풀리지 말고."
한바탕 변명을 늘어놓고는 잡은 손에 힘을 풀었다. 이왕 잡은 거 2층이나 지나고서 놓던가 하지,, 멋대로 나대는 심장 때문에 뇌까지 느낌 전달이 아직인데도 말이다. 목적지는 4층 남성복 매장, 남자들을 위한 세상이었다. 익숙한 듯 인범은 발걸음을 재촉했다.
“어떤 상표를 붙이냐에 따라 목적지가 달라진다는, 즉 원단은 같다는 그 말, 백화점 물건은 엄청 좋은 줄 알지? 퍽이나!!"
정은의 시선도, 목소리도 삐딱했다. 아랑곳없이 그는 정은을 앞세우고 색색의 와이셔츠들이 가지런히 진열된 매장 안으로 들어갔다. 검은색 와이셔츠를 입은 모습은 아직인 것 같아 민무늬 검은색을 집어 들어 양복 재킷에 대보았다.
“누나 눈에는 딱인데. 괜찮죠?”
점원을 향해 정은은 동의를 구했고 처음 만난 사이라 하기엔 두 사람의 합이 좋았다. 이와는 달리 인범의 시선은 바닥으로 향했다.
“맘에 안 들면 다른 거.”
다음 말은 ‘골라보던가’였는데 무릎을 꿇은 채로 운동화 끈을 매만지고 있는 인범으로 인해 입 안에서만 맴돌 뿐 차마 뱉을 수가 없었다.
“말을 하지. 내가 할게.”
“1층에서부터 봤는데 발 뺄까 봐 지금 하는 거니까 그대로 있어. 다됐다. 편한지 움직여 보고."
여전히 인범은 한쪽 무릎을 꿇은 채 정은을 올려다보고 코를 찡긋하며 웃었고, 그런 그를 정은은 바라만 보았다.
“정말 사이좋은 오누이시네요. 하하.”
부러 웃으며 분위기를 돌리려는 점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시선은 흔들림이 없었다.
“누나?? 누나!! 나 참.”
인범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여자 친구 아니에요, 그 말 하기 싫어서. 왜!!.”
정은의 목소리가 낮고 묵직하게 튀었다. 제 앞에 놓인 아이스크림 컵에 시선을 박고 있는 정은의 모습이 거슬렸던 걸까? 인범은 때 아닌 불평을 뱉었다.
“별개 다. 다양한 맛 중에 골라도 하필.”
“31가지 중에 내 최애입니다. 인절미 빙수는 뭐가 나아서? 이따만한 모래성 삽으로 떠먹는 기분이더만. 개인의 취향은 존중해 줍니다."
정은이 다나까체를 선택했다. 진지하다는 말이었다.
“어딜.. 양치하는 기분을 한 숟가락이라도 빼앗길 수는 없지. 나는 상쾌해지고 싶다고.”
슬쩍 내민 인범의 수저를 정은은 완벽히 방어했다. 입 안보다는 머릿속의 상쾌함이 더 시급했다.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바라보던 인범의 표정이 지워지지가 않았다. 대관절 무릎은 왜 꿇어서는,, 일정한 속도를 유지하며 아이스크림을 퍼먹기만 하는 그가 미웠다. 오늘 하루도 길겠구나!! 하아..
“새벽을 밝히는 젊은이구먼.”
검은색 와이셔츠에 주황색 앞치마를 걸친 인범을 향해 정은이 농을 던졌다.
“그분들은 형광색 조끼 입지 않나?”
“우리 동네는 주황색도 입던걸요.”
지훈이 제기한 의문에 답을 다는 정은의 목소리에 자신감이 배어 있었다.
“자고로 부지런한 새가 먹이를 먹는다고.”
산의 목소리가 모범생다웠다. 정직했다.
“밤새 술 먹고 집 가다가 봤지요. 해도 뜨기 전인데 나오시던걸. 그 어둠 속에서도 몸사위를 읽을 수 있었지. 조끼를 괜히 입는 게 아니더라고."
예상했다는 듯 인범은 고개를 저었고, 경험자인 듯 연희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은갈치로도 모자라 이젠.”
키득키득- 제대로 신이 난 지훈이었다.
“재킷 입고 제대로 보여줘요. 끝자락을 펄럭여대면 지느러미가 S자 모양을 그리듯 얼마나 싱싱하게요."
산과 연희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흘렸다.
“본디 신고식은 짓궂어야 제대로인 거지. 새 양복 새 와이셔츠 자랑하러 불러 모은 거니까 몰아주기 콜! 동의하는 사람 손!!"
정은의 선창에 산, 지훈, 연희가 손을 보태며 제창했다.
“여기 고구마 맛있어요. 고민하는 거 같길래.”
메뉴판에 시선을 둔 연희를 보며 확신에 찬 목소리로 정은이 운을 떼자 인범 역시 끄덕이며 뜻을 보탰다.
“처음 아니죠. 두 사람?”
“오늘까지 세 번. 닭띠라 닭을 좋아한데.”
쿡- 인범이 웃었고 정은의 눈은 심술궂게 커졌다.
“식성이 노란색이야. 통닭도 단무지도 맛있어.”
이해가 안 간다는 듯 산, 연희, 지훈이 고개를 갸우뚱했고 인범의 눈은 정은을 향했다. 그런 그를 정은도 피하지 않았다.
“고구마도 그런 이유로? 고구마 찌거나 익히면 노릇노릇하잖아.”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하고 맛있는 닭갈비 먹는다는 거. 중요한 건 그거지. 안 그래?”
피식- 지훈을 보고 웃고는 이내 소주잔을 빙그르르 돌리며 인범은 나지막하게 말했다. 술잔이 부딪히는 소리, 사람들의 말소리, tv에서 흘러나오는 소음들로 매장 안은 시끄러웠지만 인범의 목소리는 똑똑히 들렸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는 그의 진심이..
한잔 걸친 탓인지, 입추가 지나서인지 닭갈비집을 나서니 조금 으스스했다. 정은이 두 팔을 감싸는 그 순간,, 인범이 그녀의 어깨에 슬며시 재킷을 내려놓았다.
“어? 어!!"
호기심에 눈과 입이 동시에 벌어진 지훈과는 달리 인범은 싱거운 말투였다.
"혼자만 냉면 먹었잖아."
“냉면도 맛있다고. 맞죠?”
“볶음밥 다음으로. 이런 날씨에 감기 걸린다고. 아니 그런가, 의사 양반?”
입술이 그럴듯한 핑계를 늘어놓는 사이, 그의 눈은 부랴부랴 산을 찾았다. ‘이 상황을 끝낼 이는 너밖에 없다.' 하듯.
"늦었다. 가자.”
익숙한 상황인 듯 산의 목소리는 자연스러웠다. 인범의 재킷을 걸치고 한 블록을 걸어가는 동안 두 사람 사이에는 별다른 말이 없었다. 몸은 한결 따듯해졌는데 마음은 스산하기만 했다.
“먼저 가요. 아.. 옷.”
정은이 재킷을 벗으려 하자 그가 손으로 저지했다.
“몇 동 살아요?”
“104동.”
“109, 107, 104동이면.. 저기?”
인범의 손끝이 멈춘 곳을 보며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집 앞까지 가요. 가는 내내 싸늘할 거야.”
“따듯해졌어요. 덕분에.”
“들킬까 봐? 청춘을 다 바친 동네라면서.”
“.. 아. 난 또. 늦었다. 가요.”
인범의 까만 눈동자가 한층 더 어두워 보였다. 정은이 서둘러 말하고는 재킷을 벗어 급히 건네었다. 받아든 재킷을 대충 팔에 걸치고 선 인범의 눈빛은 복잡해 보였다.
“거짓말 성의 없게 하는 사람인 거 깜박했네. 들어가요.”
처음 보는 모습이었다. 목소리는 메말라 있었다. 멀어지는 그의 등은 산처럼 높아 보였다. 차오르는 눈물 때문인지 그의 뒷모습은 희미해져만 갔다. 털썩 주저앉은 그녀가 운동화 끈을 바라보며 소리 내어 울었다.
‘한 번에 두 발자국 다가오면 어떡해. 이건 반칙이잖아.’
“원장님. 내가 알아볼 테니 신경 쓰지 말고 일해요. 괜한 얘기는 해서..”
“원장님 아니라 어쩌나. 무슨 일 있어요?”
급한 마음에 발신자 확인도 안 한, 명백한 정은의 잘못이었다.
“노트북이 고장 나서 앞 건물 영어 학원 원장님한테 도움 청했거든. 용건 말해요. 핸드폰으로 음악 틀어서 빨리 끊어야 해."
“아..”
인범의 짧은 숨소리가 전화기를 통해 정은에게로 전해졌다.
“운전 중인가 봐요. 경적 소리 들은 거 같아서.”
“맞아요.”
“급한 거 아니면 나중에 통화해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목소리만으로도 담담히 인범을 대할 자신이 정은에겐 없었다. 13일의 금요일도 아닌데,, 멍텅구리가 되어버린 노트북을 작정하고 째려보았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이 시간에 어떻게.”
“연결해 봐요.”
브리츠의 AUX 케이블을 인범이 건넨 노트북의 오디오&스피커 잭에 연결하니 Jason Marz의 이국적인 음색으로 금세 커피숍다워졌다. 고개를 들어 정은은 그제야 인범의 얼굴을 살폈다.
“어디서 오는 거예요?"
“어디서 오면 기름값이라도 주려고?”
고맙다는 말 대신 엄한 소리를 내뱉는 정은을 향해 인범 역시 밉게 말했다.
“오늘은 필요 없고 내일은 쉬는 날이라, 근데 월요일엔 필요하니까..”
“내일 일 끝나고 돌려줄게요. 고마워요.”
인범의 말끝을 채며 정은은 늦게나마 고마움을 전했다.
“일요일에 친척 결혼식 있어요. 내일 퇴근 무렵이면 이미 평창일 거라서. 말했을 텐데."
“아.. 그럼 일요일.”
“그래요. 또 빵이네. 저번에도 그러더니만. 입만 열면 5천 년의 유구한 역사 부르짖는 사람이 번번이 빵이 웬 말이냐고."
“밀가루도 탄수화물 맞거든요.”
인범의 날카로운 눈매는 빵 봉지를 놓치지 않았고, 한결 부드러워진 음색은 정은의 시선을 붙잡았다. 이에 질세라 정은이 콧등을 찡긋거렸다.
“사용료 제대로 셈할 테니 너무 고마워는 말고.”
"치사해."
물끄러미 바라보던 시선을 뒤로하고 서둘러 장난스럽게 말하는 인범의 목소리 위로 억울해하는 정은의 목소리가 덧입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