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중진담(雨中眞談)

- 보통의 연애소설 -

by 슈크림빵

분명 신호에 걸려 가다 서다를 반복하는 것인데도 평소보다 더디게만 느껴졌다. 해서 비 오거나 눈 내리는 날은 할증료 500원이 추가된다고 강조했던 걸까? 얼마 전 명함을 건네받은 배달대행 직원과의 대화가 생각이 나 핏- 정은은 웃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네.' 라디오의 볼륨이 커지자 이내 빗길 도로 상황을 알리는 55분 교통정보가 버스 안에 가득 찼다. 교통사고, 정체 구간 등,, 비가 내리는 도로 상황은 심란했다. 무릎 위에 놓아둔 가방을 열어 휴대폰을 찾는데 아뿔싸, 운동화 끈을 고쳐 묶으면서 신발장 옆 콘솔 위에 두고 온 것이 생각이 났다. 인범과의 약속이 걸렸지만 '설마 무슨 일이 생기겠어?' 재빠르게 마음을 고쳐먹고, 생각을 떨치려 창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비는 여전했고 도로 위의 차들도 꼬리를 물고 있었다.


설마 했던 일은 현실이 되었다. 약속 장소인 인범의 원룸 앞이었다. 만나기로 한 시간이 45분이나 지났건만 그는 나타나지 았았다. 010 다음의 여덟 자리 숫자는 기억나지 않았고 공중전화는 찾아볼 수 없었다. 무작정 기다리는 건 아니다 싶어 골목 모퉁이의 편의점 문을 열고 들어갔다.

"휴대폰을 두고 왔어요. 한 통화만 부탁드립니다."

온장고에서 꺼낸 베지밀 병을 계산대에 내려놓으며 정은이 조심스레 말하자 마음씨 좋게 생긴 중년 남성은 선뜻 휴대폰을 건넸다.

“여보세요. 엄마.”

시내 도로만큼이나 경부고속도로 하행선 상황도 아수라장이긴 매한가지였다. 죽암휴게소 근처 차량 접촉 사고로 잠시 발이 묶여 있었다고, 넉넉잡아 오십여 분 내외면 대전 집에 도착할 수 있다고,, 정은의 엄마가 인범을 대신해 소식을 전했다. 낯선 동네, 어두운 골목 안, 전조등을 환히 밝힌 인범의 차가 모습을 드러낸 건 빗속의 여인을 자청한 지 정확히 1시간 35분이 지난 후였다. 익숙한 그의 차, 그가,, 반가웠다.

“전화기 두고 온 거 버스 타서 알았어요. 내리자니 약속 시간에 늦을 거 같고, 전화번호가 생각이 안 나서. 엄마한테 들었어요. 나 때문에 막 밟은 거 아닌지. 미안해요."

애당초 휴대폰만 가져왔더라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 접촉 사고가 인범의 잘못도 아닐뿐더러 괜스레 신경 쓰게 한 것 같아 먼저 손을 내밀었다.

“혹 빗물 들어갈까 봐 노트북에 뭐 했게요. 짜잔.”

앞으로 멘 배낭을 열어 비닐에 쌓인 노트북을 빼꼼히 꺼내고는 자랑하듯 말했다.

“기계는 물과 상극이니까. 잘 썼어요.”

배낭에서 노트북을 꺼낸 인범은 우산도 없이 빗속을 걸어가 자동차 뒷좌석 문을 열어 툭- 던졌다. 그러고는 재빠르게 정은의 우산 속으로 들어와서는 표정 하나 읽을 수 없는 얼굴로 빤히 쳐다보았다.

"화났어요?"

정은의 목소리가 낮게 깔렸다. 말이 없는 인범의 태도에 서러움이 울컥 솟구쳤다.

“후배님처럼 나도,, 내 의지가 아니었다고. 그렇다고 이렇게까지 화낼 일인가!! 기다렸잖아요, 나도. 다음에 얘기해요."

정은이 걸음을 떼자 인범은 그녀의 손목을 잡아챘다. 그의 손을 뿌리치며 정은은 차갑게 말했다.

“피곤해요. 후배님도 그래 보이고. 다음에요.”

“다음으로 넘기면, 본인 마음 애써 외면하면.. 당신은 좀 편한가!!”

가시 돋친 인범의 말이 정은의 가슴에 시리게 박혔다. 그를 향한 정은의 두 눈엔 원망이 서리어 있었다. 인범의 얼굴은 굳어 있었고 말투는 냉랭했다.

“당신 못된 점이 뭔지 알아? 사람 마음 다 알면서 선 긋는 거. 그을 수도 있지. 그럴 거면 확실하게 긋던가. 여지를 준 만큼 다가가면 딱 그만큼 멀어지고."

“당겨 안으면 되잖아. 그럼.. 아 그러긴 싫구나.”

한껏 화난 듯한 인범을 향한 정은의 목소리는 서늘했고 떨림이 있었다.

“서둘러 시작하고 싶지는 않으니까. 실패하고 싶지 않아. 당신 하고는. 비겁하다 말할 테지만.."

후우- 분명 짧은 숨을 내쉬었는데도 인범의 발아래 고인 물웅덩이에 커다란 파장이 일었다.

“더 할 얘기 없으면 그만 갈래요.”

인범을 외면한 채 체념한 듯 정은은 말했다. 등을 돌려 걸어가는 그녀를 인범은 잡지 않았다. 물먹은 운동화, 멀어져 가는 젖은 어깨만이 그의 눈에 가득했다.

“가지 마. 최정은.”

그가 빠르게 걸어가 정은의 어깨를 잡아챘다. 우산 아래 정은의 눈에도 살짝 물이 고였다.

“이렇게는.. 가지 마.”

인범의 목소리가 아프게 떨렸다.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하다고 난 말했는데.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단 그 말이 그렇게 어려워요?"

튕기듯 묻는 것이 정은 역시 많이 속상했었나 보다.

“비 때문에 물먹은 운동화, 젖은 어깨, 그게 미안할 뿐. 기다리게 한 건 안 미안해. 욕을 하든 짜증을 내든 기다리는 내내 나만 생각했을 테니. 나는 그게 일상인데 당신은 아니라고 부러 고개 저으니까. 전혀."

정은이 발뒤꿈치를 들어 살짝 몸을 숙이자 떨리는 그녀의 입술이 인범의 입술에 살포시 닿았다. 떨림이 잦아들 만큼의 따스함이 있었지만 짧은 입맞춤이었다. 바라본 인범의 눈에서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아프겠구나. 이사랑은.' 핑- 눈물이 고일 것만 같아 애써 마음을 다잡고 목소리를 내었다.

“성큼성큼 걸어오길래 키스하려는.. 걸까? 얼굴을 감싸 쥐면 그때 눈을 감아야지.. 했는데 비 맞기 싫었던 거야. 본심은. 어쨌거나 키스는 했으니 그럼 된 거지."

고개를 떨군 채 정은은 물웅덩이에 걸친 오른발을 느릿하게 질질- 끌었다.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인범의 시선은 따뜻해졌다.

“우산 잘 들고 있어야 해요. 난 오랫동안 키스할 거니까.”

인범의 두 손이 정은의 얼굴을 감싸 쥐었고 그의 입술이 그녀에게로 포개어졌다. 종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그의 마음은 들려왔다. '도망갈 생각 하지 마.' 세상 뻔한 방식이 아닌 그의 마음이 좋았다. 얼굴에 닿은 조심스러운 그의 손길은 따듯했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할 수 있어 감사했다. 함께할 많은 날들이 있음에 심장이 쿵쿵- 설레게 뛰었다. 두 사람은 약속을 지켰다. 세차게 내리는 빗속에서 우산을 든 정은에게 인범은 긴, 긴,, 입맞춤을 했다.


"이 동네에 이사 온 이유.”

주황색 천막 안은 둥근 양철 테이블과 등받이가 없는 파란색 플라스틱 의자 몇 개가 전부였다. 커다란 들통의 뚜껑이 열리자 하얀 김이 모락모락 올라왔다. 부슬비로 바뀌었지만 밖은 여전히 차가웠기에 천막 안의 공기는 한층 훈훈하게 느껴졌다. 도심 속에 이런 곳이 있다니.. 순간, 정은은 토끼를 따라 굴속으로 뛰어들어 이상한 나라에 간 엘리스처럼 눈을 크게 뜨고 포장마차 안을 둘러보았다. 인범은 이곳을 낭만이라 했다. 차림표 위 서툴지만 정감 있는 글씨체에 두 눈이 멈췄다. 낭만집.. 정은은 맑게 웃었다.

“우동 괜찮아요?”

“네.”

“여기 잔치국수가 기가 막힌데 안 좋아하니까. 분단된 조국인데 메뉴라도 통일해야지.”

인범은 장난스럽게 말했다.

“잔치국수 싫어하는 거 어떻게? 아.. 지훈 씨 결혼식. 후배님이 내 몫까지 먹었잖아요.”

“맞는데. 내 기억은 그전.”

인범은 부드럽게 웃었고 정은의 눈은 답을 기다렸다.

“멸치 육수 냄새에 데크 쪽으로 난 출입문 재빨리 닫던데."

“.. 아. 건물 복도 사이에 두고 마주한 국수가게. 멸치 육수가 베이스니까. 그 집 환풍구가 데크랑 맞붙어 있어 문 열어 두면 종종 냄새가 들어와요. 해서 굽는구나. 튀기는구나. 끓이는구나. 냄새만으로도 알아요. 생선 비린내는 참을 만한데 멸치 비린내는 좀 역하더라고. 해서 건의해 보려고 했지. 근데 그 사장님 애가 셋이야. 어머님도 알고, 첫째 아이한테 과자도 건넸는데, 무엇보다도 사장님이 fm, 사람이 선해. 때가 안 묻었어. 해서 '전기세 조금 더 내마' 하며 벙어리 냉가슴 앓고 있다는. 이래서 내가 큰돈을 못 버는 거지. 아. 슬프다."

“이쁘네.”

못 들었다는 듯 귀를 쫑긋 세운 채 인범을 채근했지만 그는 배시시 웃기만 할 뿐,, 이내 포기한 정은은 거짓 없이 웃었다.

“기억은.. 좋은 거구나.”

“또 있는데. 기억.”

검지를 세우고는 경고하듯 정은은 말했다.

“그건 다음에. 만날 때마다 하나씩.”

“그럴 만큼.. 많지는 않아서.”

정은은 이맛살을 찌푸렸고 인범은 키득거렸다.

김이 올라오는 하얀 점들이 듬성듬성 박힌 초록색 플라스틱 그릇이 두 사람 앞에 놓였다. 두 손으로 오목한 그릇을 들어 인범은 후루룩- 국물을 들이켰고,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 정은은 표정으로 괜한 투정을 부렸다. 테이블 위에 그릇을 내려놓고 인범은 의문문으로 물어왔다.

“왜 먹지 않고?”

“떡볶이, 자장면, 쫄면, 어묵 국물과 인사하느라. 낭만 맞네.”

두 사람이 동시에 웃었다. 한결 밝아진 표정으로 포장마차 안을 휙 둘러본 후 정은은 조심스레 운을 떼었다.

“소주랑 순대볶음 중간 매운맛 하나 시킬까요? 이따가 키스 안 할 거면.”

호탕한 웃음으로 인해 인범의 목울대가 요동을 쳤고 두 손을 모아 입을 살짝 가린 채 정은은 아이처럼 웃었다. 낭만을 사랑하는 인범, 정은은 그런 그를 사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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