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 한 모금 들어갈 공간도 없다던 두 사람은 대형 프랜차이즈 커피숍 창가 테이블 바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24시간도 모자란 연애 초, 한창 깨를 볶는 중 아니던가, 고소한 냄새 풍겨가며 말이다.
“근교 전원 카페도 아니고 대도시 프랜차이즈 매장에서, 낭만일세 그려. 구름에 달 가듯이.."
음료 사이즈업 프로모션으로 얻은 네모난 엽서, 운치 있게 적힌 캘리그래피 글귀를 따라 정은의 눈과 입이 반응했다.
“누구나 가슴속에 시집 한 권씩 품고 사는 거지.”
시인이라도 된 듯 한껏 감정을 담아 인범은 읊조렸다.
“아 맞다. 카톡 프로필 정답 못 들었잖아. 말해줘요.”
“ㄴㅃㄴㅈㅇㄹ는 나쁜 놈 좋아라. 여기요, 저기요, 그쪽, 빙 두르다 처음 불러 준 호칭이었잖아. 품고 있는 뜻은 내키지 않았지만 당신 머리에 각인된 거니까.."
군말 없이 핸드폰을 정은 앞에 놓고는 끝내 말끝을 흐리며 인범은 웃었다.
“오늘의 출발점..?!"
미안했던지 정은은 짧게 웃었고 인범의 손은 다시 휴대폰으로 향했다.
“ㅅㄱㄷㅇㅇㄴㄴㄱㄴㄱㅁㅎㄷ. 이건,, 생긴데요 어느 날 그녀가 말했다.”
쑥스러운 듯 코끝을 쓰는 인범과는 달리 적잖이 놀랐는지 정은의 입은 절로 벌어졌다.
“이런.”
“왜?”
“전부 오답지였네. '서교동역 언니네 그냥 갈 만하다.' 맛은 별로인데 언니가 미인인가 했거든요."
푸하핫- 크게 입을 벌리고 인범은 웃어댔다.
“생각한 게 하나 더 있긴 한데 예문이 별로여서. 웃지 마요. '산과 들에 아낙네 가는 길만 한 달..'"
정은의 목소리에 후회가 담겨있었다. 웃지 말라던 정은의 당부를 잊은 채 인범은 눈에 고인 눈물을 쓱 닦아내며 쿨럭- 거렸다.
“가만. 그러고 보니 전부다!!”
정은은 눈빛으로 물었다.
“생각날 때마다 쓰는 내 마음의 일기라고 말했잖아. 저자 이인범, 독자 최정은이 전부인 하나뿐인 우리만의 이야기."
인범이 지그시 바라보자 정은은 소리 없이 말했다. ‘사랑해요.’
“나 감 잡았어. 마지막은 내가 맞춰볼게요.”
정은은 살며시 눈을 감고서 생각에 잠긴 듯 골똘하였고 이내 두 눈을 큼지막한 눈깔사탕처럼 만들고는 확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대로 입은 거칠고 손길은 의외로 부드럽던데..”
“내 짐작이 맞았었네. 사람 참."
'이런 젠장.' 정은의 소리 없는 외침은 '어디서 약을 팔아.' 추궁하는 인범의 눈빛에 막혀 되돌아왔다. 자진 납세는 애국이기에 한 수 물리면 그 역시 그러리라 생각했다. 그것이 사람된 도리요. 별도 달도 따준다는 그 연애 초가 아니던가!! 인범의 됨됨이에 하소연하듯 쟁여뒀던 마지막 예문을 툭- 던졌다.
“산골 도랑 잉어, 곰치가 살고요. 오~ 여름 바다로 더디..”
“문맥도 뜻도 엉망이고, 못 들은 척도 모자라 관심 없는 척까지, 것도 모르고 난,, 말을 말자."
애당초 정답이라 생각지도 않았다. 그러나 머리를 동여맨 시도는 기특하지 않은가? 이렇게까지 짓밟을 일인가? 이로써 분명히 알게 되었다. 그는 A형이 확실했다. 소심할뿐더러 뒤끝도 있었다.
“시란 본디 함축적인 거지. 흐른다 혹은 흘러간다가 아닐는지. 마지막에 부러 넣은 말줄임표는 그런 의미라 생각했지요. 드라마의 열린 결말처럼. 곰치는 바닷물고기니까 결국,, 곰치를 죽일 만큼 잔인한 사람 아니잖아요."
문예 비평지의 한 페이지처럼 또박또박 말하고선 덧붙여 한쪽 눈을 찡긋 했다. ‘이건 별책 부록이야.’ 하듯. 글 행간에 틈새가 없자 인범은 자신의 이마로 정은의 이마를 지그시 눌렀다.
“귀여워서 봐준다.”
“다음엔 우리 찜질방 가요. 팔다리 거진 내놓고 계란 까먹는 거, 나 되게 좋아해요.”
정은이 장난스레 웃었고 바라보는 인범의 온도는 따스했다. 인범의 어깨에 살며시 머리를 기대며 정은은 읊조리듯 말했다.
“커피숍에 커피만 먹으러 오는 게 아니었어. CCTV 교체해야 할까 봐. 방법용 아닌 도난 방지용으로."
“부자 되겠네.”
인범은 정은의 손을 가만히 잡았고 정은의 머리는 인범의 어깨를 좀 더 파고들었다. 마시지 않은 커피가 잔에 가득했고 머리 위 조명은 은은했다. 한껏 기댄 그의 어깨는 편안했다. 바라다본 유리창에 새겨진 정은 역시 더없이 행복해 보였다. 행복이 파도처럼 밀려온다는 상투적인 표현의 참뜻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더 이상의 암호 해독은 필요 없었다. 인범의 현재 프로필은 ‘사랑해’, 정은은 ‘내가 더’였다. '사랑해, 내가 더',, 두 사람은 달콤한 사랑싸움 중이었다.
“서른 넘어 혼자일 때는 다 이유가 있는 거야. 청소년들도 안 그런단다. 추. 세. 가.”
마지막 세 글자를 부러 끊어 말하며 정은은 심통을 부렸다.
“회색 도시 아스팔트 미세 먼지에 시달렸으니까."
1시간 내외의 대중교통으로도 접근이 가능한 나무도, 덩달아 사람도 많은 수통골이었다. 지명에 걸맞게 정은도 골이 나 있었다.
“잡은 물고기다 이거지!! 기름 한 방울 안 나는 게 어제오늘 일도 아니고, 'away'의 뜻을 모르지 않을 터, 저번에 노래방에서 'always'는 잘만 부르던데. 품은 뜻은 다르다만 모양새는 비슷하잖아. 치.. 밤 12시 안에는 못 들어간다고, 데이트한다고 큰소리쳤단 말이야."
쿡- 인범이 웃었다.
“어. 어!!”
입을 삐죽거리며 정은이 한 발 앞서 나간 그때였다. 인범이 정은의 오른쪽 귀에 이어폰을 꽂았다.
“빨래 널다가 올려다본 하늘이 마침 <비창> 듣기 딱 좋은 날이라서,, 헤드폰을 준비할까? 했는데 첫째, 소피 누님처럼 미인 아니고 둘째, 헤드폰 쓰기엔 절기상 더울뿐더러 셋째, 씌워줄 용기는 물론 사람들 시선도 부담스러워서, 결론은,, 우리의 첫 번째 추억 놀이.."
씽긋- 웃은 인범이 제 왼쪽 귀에 이어폰을 꽂는 그 잠깐의 틈을 노려 정은은 그의 오른손을 잡았다. 이로써 둘은 마주 선 형국이었고, 이에 인범의 목소리는 다급했다.
“손을 뻗어야지 잡으면 어떡해. 쨍- 하고 금이 가는지 확인해야 하잖아."
“손이 왜 두 개게요?"
배시시 웃기만 할 뿐 인범은 말이 없었다.
“맞추면 선물 있는데.”
“정답!! 한 손은 잡고, 한 손은 뻗으라고.”
“땡!! 한 손은 잡고 다른 한 손으로는 이렇게.”
한쪽 팔로 인범의 허리를 감싸고는 안은 듯 그의 품에 안겼다가 이내 팔을 풀고는 해죽- 웃었다.
“이왕 안은 거 조금 더 하지.”
“그건 안 되지. 에스컬레이터에서 내 손목, 아~ 정확히 손목을 덮은 옷을 잡았던 거에 대한 복수.."
아쉬워하는 그와는 달리 정은은 시원하게 웃어댔다.
“그래도 반은 맞춘 거니까 하산할 때까지 손은 잡아 준다. 내가.”
느릿하게 걷는 것도 모자라 한쪽 손을 연방 흔들어 대는 정은의 몸짓에 결국, 참지 못하고 인범은 한소리를 해댔다.
“흔들지 말고 뻗어야지.”
“어차피 <비창> 귀에 들어오지도 않아요. 맞잡은 손의 느낌에 집중하느라..”
두 사람이 마주 보며 웃었다. 걸음 또 걸음에 맞춰 꼭 쥔 손에도 조금씩 힘을 실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말이다.
"깜박이는 좀 켜지. 이인범.."
지훈의 목소리가 팔뚝 위에 가부좌를 튼 모기 같았다. 따끔했다.
"검지 손톱 아래를 스팀봉에 데었데. 불판 열기에 혹 덧날까 해서, 차라리 손바닥이었으면,, 안 데어 봤으면 말을 말아. 흉지는 거 다반사라고. 인마."
정은의 검지에 야무지게 밴드를 감고서는 이내 궁색한 변명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나는 괜찮다. 그만해라."
"내가 안 괜찮아."
대인배 이산을 향해 소인배 이지훈이 어깃장을 놓았다. 테이블 위 젓가락을 집어 들고 정은은 입을 열였다.
"주목 주목.. 여기 좀 봐줘요. 조금 전의 기억은 사라집니다. 번쩍번쩍~."
정은은 제 손가락에 감긴 반창고를 떼어 인범의 입에 붙이고, 포장지 안 벗긴 반창고 하나를 산에게 내밀었다.
"할리우드 액션에 대한 벌이니 봉인 해제하기 전에 뻥긋하기만 해!! 진료는 의사에게.."
산은 빙그레 웃으며 정은의 손가락에 반창고를 단단히 감았다. 그리고 타임아웃 중인 인범의 입을 가리켰다.
"왕진비랑 퉁쳐요."
"데이트란 명목하에 데려간 곳이 수통골이라니. 이렇게 빨리 주가가 하락할 줄은."
"맙소사."
지훈의 목소리에 거짓이 없었다.
"노른자가 빠졌잖아. 청아한 하늘 아래서 <비창> 들으러 간 거였어."
지훈과 산의 눈에 물음표가 새겨졌고, '됐다.' 인범의 눈은 마침표로 답했다.
"이인범이가 잘못했네. 시동 걸었으면 못 가도 동학사는 찍었어야지. 우물 안 개구리도 아니고 행정 구역을 벗어남과 동시에 마음의 빗장을 푸는 게 여자들의 감춘 심리이거늘.. 오만한 이놈을 대신해 사과드립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는 산의 모습이 카메라 앞에 선 정치인 같았다. 각도가 살아 있었다. 정은이 두 팔을 감싸 쥐었다. '소름 돋았어.' 하듯.. 그러고는 손을 들어 산과 하이파이브를 했다.
"인해 씨만 아니었으면.. 하아~."
"그건 안 돼."
세 남자가 동시에 외쳤다.
"인해 온단다."
산을 외면한 채 말하는 인범의 목소리엔 한숨이 반이나 실려 있었다. 산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약속이라도 한 듯 네 사람은 커다란 주물팬에서 매콤하게 익어가는 닭갈비만 바라볼 뿐 별다른 말은 없었다.
"인해 오면 다 같이 놀러 가자. 휴가도 아직이니까. 여러모로 겸사겸사.."
밝은 목소리로 포문을 연 지훈의 전략은 실패로 돌아갔다. 세 사람의 시선은 여전히 닭갈비에 꽂혀 있었다. 갑자기 집중을 받은 닭갈비만이 까닭을 몰라 어리둥절할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