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국적으로 흐리고 비.. 일기 예보와는 달리 하늘은 너무나도 맑음이었다. 고맙게도 말이다. 산이냐, 바다냐를 두고 분분했던 의견을 모은 결과 산과 바다로의 접근이 용이한 속초로 쌍쌍파티 멤버들이 첫 번째 야유회를 떠나게 된 날이었다. 쌍쌍파티라니.. 산과 인해가 반대 의견을 제시하지 않아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으니 민주주의 정신에 입각해 따라야 하지만 선뜻 입에 붙지 않는 것이, 영 탐탁지 않은 정은이었다. 주말을 활용한 장거리 여정이기에 금요일 저녁에 서둘러 출발하기로 했다. 어둑해진 하늘에는 간간이 별이 박혀 있었다. ‘주말 내내 비님 안 오게 해 주세요.’ 소풍 전날, 잠들기 전의 아이처럼 정은의 마음은 간절했다.
“이지훈 뒤 좀 그만 돌아봐. 연희를 앞에 앉히던가.”
산의 목소리는 심히 불안했다.
“임산부는 안 돼요.”
차 안 룸미러를 통해 산을 바라보며 지훈은 단칼에 잘랐다.
“노약자도 안 돼요.”
고개를 뒤로한 채 인범 역시 쐐기를 박았다.
“속초 전문 가이드랑 자리 바꾸자. 인범 오빠.”
“그건 안 돼.”
인해에게 시선을 두고 정은과 연희는 동시에 입을 열었다.
“운전할 때 옆에서 훈수 두는 거 지훈이 싫어해.”
인범은 빠르게 방어막을 쳤다.
“내 소꿉친구가 속초에 있어서 눈 감고도 가요. 언니만 모르는 것 같아서."
“지선이는 여전하고?”
“지선이 요즘 연애 중이라 인해랑 멀어지는 중이래."
지훈의 질문에 인범이 빠르게 답변하며 화제를 돌리려 했다.
“같이 움직이려고 어렵게 빌린 회사 차야. 운전은 내가, 그러니까 속초까지 그냥 좀 가자.”
지훈의 의지는 결연했고 한 음절 한 음절 내뱉는 목소리는 어느 때보다도 비장했다. 거리 두기를 하였지만 산과 인해를 뒷좌석에 나란히 앉히느라 여간 애를 쓴 게 아니었다. 차량 공급은 물론 역할 분담까지,, 뒷좌석 문을 지키는 연희와 정은이 제1 수문장이요. 조선 시대 사복시의 당상관임을 연상케 하는 지훈과 철릭과 더그레를 걸치지 않은 채 매복 중인 인범이 제2 수문장이었다. 작전명은 ‘생긴데요. 어느 날.’.. 최근 성공한 사례도 있었기에 지훈의 진두지휘 아래 세운 계획이 헛되지 않도록 연희, 정은, 인범은 한마음 한뜻으로 역할놀이에 최선을 다해 임하는 중이었다.
“주말 내내 비 소식 있던데. 오늘 하늘 보니 오보인 듯하고. 정확한 건 도착해 봐야 아는 거지만, 설악산 국립공원 매표소 입구-신흥사-내원암-흔들바위-울산바위 찍고 복귀하는 왕복 코스가 인기래. 편도 길이는 약 3.8 km, 예상 소요 시간은 약 2시간, 왕복이면 대략 4시간 걸린다는데, 신흥사랑 흔들바위 보고 사진도 찍고, 물도 마시다 보면 못해도 1시간 이상은 더 소요될 테지. 넉넉잡아 6시간 정도? 내일 하루에 산과 바다를 모두 다녀오는 건 분명 무리가 있고, 해서 흔들바위까지만 다녀오자니 설악산 최고의 뷰를 자랑하는 울산바위가 눈에 밟혀서,, 오전에 산행한 후 오후에 시내 관광하고 일요일에 바다 들러서 집으로 올까? 어떻게들 생각해?"
“창문 열면 운전에 방해될까? 숨이 턱턱 막힌다.”
창문을 열고 인범은 억지 숨을 내쉬었다.
"자고로 여행이라 함은 마음 가는 대로, 발길 닿는 대로인 거지. 계획표에 너무 의존적이야 자식이. 덧붙이자면 산은 올려다보는 거지 오르는 거 아니다."
지훈의 쓴소리에 의기소침해진 산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고, 산의 브리핑 초반부터 핸드폰에 고정되었던 연희의 시선은 여전했으며, 두 팔을 머리 위로 한껏 올린 인해는 제자리에서 소리 없이 스트레칭 중이었다. 봉고 안에 가득했던 정적을 깬 건 정은이었다.
“예!!”
“깜짝이야.”
두 팔을 높이 들고 우렁차게 소리 지르자 다섯 사람의 눈은 일제히 정은에게 쏠렸고 약속이라도 한 듯 한목소리였다.
“그거 알아요!! 우리 지금 막 행정 구역 벗어났어요. 난 자유로워질 테다.”
맘껏 몸을 움직여대는 정은으로 인해 봉고가 한차례 휘청거렸다. 차고도 넘치는 웃음소리 덕에 또 한차례 들썩였다. 가속도가 붙은 지훈의 봉고는 속초를 향해 빠르게 나아갔다.
가을을 천고마비라 칭하는 이유는 당연했다. 청명한 높은 하늘 아래, 찌를 듯한 자태의 웅장한 설악산은 쌍쌍파티 멤버들을 너른 가슴으로 환영했다.
“오매 단풍 들겠네.”
“들것네. 정확한 표현은.”
산자락 아래서 정은과 인범이 티격태격했다. 산들거리는 바람에 땅으로 날아든 단풍잎 하나를 주워 지훈이 연희에게 건넸고 마주 바라보는 두 사람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번졌다. 거방진 명산의 위세에 인해와 산은 매료된 듯 보였다.
"임산부랑 노약자는 그렇다 쳐, 두 사람은 왜?"
"우린 보호자."
그저 보고자 하는 이와 오르고자 하는 이의 팽팽한 기싸움이 한창이었다.
"가져와서 짐. 가져가니 짐. 대체 왜?”
인해는 한껏 차려입고 서 있는 인범을 마뜩잖은 듯이 노려보았다.
“본디, 등산은 장비빨, 방수 테스트가 목적이었다. 비가 왔어야 하는 건데.”
인해가 기대한 답과는 달리 인범은 엄한 말을 늘어놓았다. 더해봤자 말싸움이기에 인해는 이성으로 감정을 꾹 눌렀다.
“울산바위는 무리고. 신흥사 다녀오자. 거기 연꽃빵 맛있더라. 지선이랑도 여러 번이었거든. 체력 소모도 없고, shall we go!!"
인해의 두 눈이 산을 향하자 파워 버튼이 켜진 로봇처럼 그의 두 발이 움직였다.
“막국수가 어지럽데요.”
둥그런 놋그릇에 담긴 막국수 면을 젓가락으로 빙 돌리는 정은을 향해 지훈이 참견을 했다.
“인해 씨 표정이 걸려서, '애쓴다..' 딱 그거 같아서. 하긴 눈치 못 채면 그게 더 이상하지. 쌍쌍파티라니. 하아."
“차린 상 걷어차지나 않았음 한다. 산이 자식은 병원에서만 빛이 나니. 참.."
정은과 지훈이 동시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다 먹은 거면 그만 일어나자. 내려오는 중이래.”
“벌써? 죽일까. 이산.”
서둘러 자리를 정리하는 인범을 따라 지훈도 자리를 털어냈다. 과정이야 알 수 없었지만 빠른 하산이라는 게 명백한 결론이기에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지만 정은의 마음 한구석도 편치 않았다.
설악산 국립공원 매표소 앞, 야트막한 돌난간에 앉은 산과 인해는 엄마를 잃어버린 아이 행색이었다. 맘씨 좋은 등산객이 건넨 듯한 우유에 빨대를 꽂은 채 야무지게도 빨아대고 있었다.
“맛 좀 봐.”
네모난 상자에서 연꽃빵을 꺼내, 인해는 인사 대신 건넸다.
“연근과 마로 만든 피 안에 팥소를 가득 채운 일종의 만주. 사찰에서만 맛볼 수 있는 디저트, 엄마 아빠 생각나서, 야유회 기념으로 내가 쏘는 거야."
두 팔도 모자라 산이 손까지 보태서 운반한 연꽃빵 상자가 든 커다란 종이봉투를 가리키며 인해는 아이처럼 환하게 웃었다.
“것도 등산이라고 배고프다. 막국수는 맛있었어요?”
“그냥. 춘천이 아니라서 그런가? 근데 이거 별미다.”
팔짱을 낀 채 주고받는 정은과 인해의 대화가 다정스러웠다. 산 위도, 산 아래도 완연한 수채화 빛깔은 아니었다. 본격적인 단풍철은 아직이었지만 설악산 국립공원 매표소를 등지고 걸으며 그들이 한목소리로 기분 좋게 외쳤다. 오매 단풍 들것네..
“우리 인해 시집가도 되겠다. 떡볶이 좋아하는 남자한테.”
“3년 5개월 하고 21일, 생각나는 건 딱 하나, 인해표 떡볶이 꽤나 유명했지. 지금은 캐서린이 요리사. 이별 선물로 레시피 알려줬거든. 인범 오빠가 고생 많이 했지."
“한국 사람 사는데 한국 물건이 왜 없겠냐만, 맛이 다르다나 뭐라나. 고추장 참 많이도 보냈지. 근데 보람은 있네. 맛있다."
“산이 씨는 왜 먹지 않고.”
멀뚱히 떡볶이를 바라보고 있는 산의 거동에 관심이 쏠린 정은을 보며.
“인해 고등학교 앞에 떡볶이 집. 아지트였었지.”
산을 대신해 인범이 답을 달았다.
“그래도 다행이네. 떡볶이는 누구나의 워너비는 아니니까. 인범 씨가 안된 거지. 닭을 멀리해야 하니까."
한껏 심각한 표정으로 담담히 말을 늘어놓더니 호떡 뒤집 듯, 쿡- 웃음으로 마무리를 짓는 정은으로 인해,, 떡볶이에 얽힌 산의 슬픈 사연도 웃음 속에 묻혀버렸다.
바닷가를 지척에 둔 단층집,, 연한 미색 페인트를 칠한 외벽 위를 덮고 있는 까만 기와지붕 아래 나무 서까래, 얕은 벽돌담 위 쪽나무를 엮어 얹은 담장, 장정 열 명은 거뜬히 앉고도 남을 거실에 놓인 커다란 나무 테이블과 자그마한 정원을 조망할 수 있는 정사각형의 통유리창, 공간들 간의 경계를 나타내는 한지를 덧댄 나무살로 된 문짝, 침실과 침실 사이 아담한 공간을 채우는 옻칠이 잘 먹은 좌식 책상과 비단 자투리를 덧대어 만든 방석이 자리한 구석 한편, 나무 장식장 안에 가지런하게 놓인 다기 세트와 도자기, 메종 머묾,, 집 머물다.. 말 그대로였다. 까만 기와 아래 주황빛을 뿜어내는 램프 안의 전구가 해 질 녘의 노을과 더해져 따스함은 배가 되었다. 작다란 야외 정원의 테이블 위에 놓인 술병들이 상황을 대신 설명했다. 이 밤의 끝을 잡고..
“연말 앞두고였지. 일도 인간관계도 어그러진 데다가, 그날따라 차 배터리까지 방전된 거야. 오전 내 동동거리다 오후가 되어서야 간 곳이 가정의학과였는데 원장님 얼굴도 못 보고, 시간은 2시가 훌쩍 넘었는데 밥 생각도 없고 해서 커피숍에 갔는데 괜히 울컥하더라. 보험사랑 내 명함이랑 찢어서 버려달라고 했지. 그만둘 생각도 없지 않았다는.. 해 바뀌고 찾아갔더니 이렇게 돌려주더라고. 부모님이 지어 주신 소중한 이름인데 찢어 버리면 마음 아프실 거라고."
말을 끝낸 인범은 테이블 위 조각조각 이어 붙인 명함을 가리켰고 이내 정은을 향해 따듯하게 웃었다.
"잃어버렸다면서요?"
"돌아온 이유가 뭘까? 확인해 보고 싶었으니까."
“이 자식 안 오면 어떡하려고 했어요?”
“제약 회사 영업 사원들 이직 많다는 거 그간의 경험으로 나도 알아요. 그만하면 깜냥 했다 그랬거든. 솔직히 제약 회사 영업 사원 하기엔 아깝다 했었는데 조각조각 붙이고 나니 번호는 알겠다만 전화할 용기는 없고, 어떡하나? 지갑에 넣어뒀는데, 다시 올 줄은 몰랐지. 정말로."
“만날 운명은 어떻게든 만나. 지구 반 바퀴를 돌든 다시 태어나든.”
산의 진심 어린 발언에 그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여댔다.
“언니도 관심은 있었다는 거.. 맞죠?”
“말했잖아요. 제약 회사 직원 하기엔 심히 아까웠다고. 명함 그렇게 받은 것도 처음이었고. 해서..”
인해가 던진 직구를 정은은 정석대로 되받아쳤다.
“인범 오빠 답은 들었고 그럼 언니는요?”
테이블 위로 몸을 한껏 기울인 연희는 기대에 찬 모습이었다.
“.. 나는 여자랑 같이 왔을 때, 긴 생머리에 하늘거려 보호해 주고 싶은..”
“거짓말.”
머뭇거리다가 입을 연 정은의 말을 인범이 가로챘다.
“백설 공주에게 독사과를 건넨 마녀가 되었으니까. 인범 씨는 카페모카, 공주님은 고구마라테를 주문했었지. 고구마라테만 유통 기한 임박한 우유로 만들었어요. 우유는 유통 기한 하루 이틀쯤 지나도 이상 없어요. 내가 산증인이고 임박한 거였지 지난 건 아니었다는."
정은이 갑자기 존댓말을 했다. 자신이 없다는 뜻이며 감정에 호소한다는 속내가 역력했다.
“그건 개봉 전 얘기고 개봉과 동시에 세균 번식은 물론 부패가 시작될 수도 있다는.”
“누가 의사 아니랄까 봐. 산이 오빠 발언권 없어요.”
“잘한다 내 마누라.”
“근데 내내 후회했어요. 바람만 불어도 날아갈 듯하던데 혹 아프면 간호하느라 밤새 같이 있을 테지,, '좋은 것만 드려요.' 영업 철학 어긴 것도, 남자 손님한테 그런 마음먹은 것도 처음이었어요. 그때였던 거 같아."
쑥스러운 듯 정은은 고개를 살짝 내리깔았다.
"그때였다니, 진짜 상상도 못했다. 아무 일도 없었을뿐더러, 인해 소꿉친구라서.”
“'담배 피우고 올게', 엄청 나긋하길래. 그 말만 듣지 않았더라면 영업 철학은 물론 휴게 음식점의 발전에 이바지할 수 있었을 텐데."
“잠깐, 영업 철학은 들어 알겠는데 휴게 음식점의 발전은 뭔지?”
인해의 목소리는 궁금함 투성이었다.
“'커피는 팔되 웃음은 팔지 않는다.' 결국 웃음까지 판 꼴이라니. 아~.”
몽글몽글했던 분위기는 어느새 오락실이 되어 버렸다. 여기서 퐁, 저기서 팡,, 제멋대로 정신들이 없었다. 기분 좋게 웃고 난 인범은 진득한 눈길로 정은을 바라보았다.
“휴게 음식점 동지들의 이름으로 밀정 최정은을 처단한다. 빵!!”
인범이 겨눈 손가락 총에 저격당한 정은이 테이블 위로 쓰러지자, 쌍쌍파티 멤버들의 원성이 하늘을 향해 치솟았다.
"it's my turn.. 한국행을 앞당긴 반절의 이유.."
단호한 목소리로 말을 마친 인해가 휴대폰을 만지작거리고는 이내 테이블 중앙에 놓았다. 휴대폰 속 갤러리 작품명은 '첫 키스'였다. 낯익은 인범의 셔츠와 잊을 수가 없는 입술 자국에 정은의 두 눈은 방향을 잃은 채 흔들렸다.
"발신자가 이인범이라 바로 버튼 눌렀지. 나 호주 가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장시간 통화한 사건,, 엄청 궁금했어. 근데 사진 한 장을 안 보내는 거야. 해서 상상이란 걸 좀 해보았지. 적당한 키에 동그란 얼굴, 다정한 사람이면 좋겠다 했더니,, 기대와는 정반대의.."
"도시 사는 까칠한 여자 사람처럼 보여도 만날수록 진국이야."
지훈이 뿌린 MSG가 골고루 스며들어 감칠맛을 극대화시켰다.
"지훈 오빠 눈엔 그렇게 보였구나. 난 아닌데. 기대와는 달랐지만 실은 되게 인상적이었어. 결혼식 기념사진에 인범 오빠 옆에 있길래, 물었더니 동창이라 하길래 그런가 했지."
"사진 별로라고 투덜대길래, 이쁘기만 하더구먼. 뭐."
머쓱한 듯 인범은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런 그를 바라보는 정은의 눈은 벚꽃이 흐드러지게 핀 봄날 같았다.
"01031781495.."
"외우고 있었어?"
"응. 잘못 걸었어요!! 해볼 마음에,, 그러다 이름이 뭐예요? 하면 좋은 거고 반대여도 할 수 없는 거고. 명함 건네고는 외우길 잘했다 했지. 근데 번호 바뀐 거 성은 선생님 통해 알았을 때, 명함 잃어버렸다고 했을 때,, '아~ 스치는 인연이구나!!' 했어요. 당신이 나쁜 게 아니라 나의 맘을 너에게 주지 않겠다는 의미로,, 구실은 있어야 하니까. 그렇게 나쁜 놈이 된 거라는.."
테이블에 애먼 동그라미만 그려대는 정은의 손을 인범이 살며시 감싸고는 남는 손으로 그녀가 복원해 준 명함을 가리켰다.
"예전 전화번호."
네 사람의 눈은 명함으로 향했고 인범의 눈은 정은을 향했다. 행정 구역을 벗어나길 잘한 모양이었다. 굳건하던 정은의 마음의 빗장은 그새 활짝 열려 있었다. 고쳐 잠글 수 없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