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t bothers me

- 보통의 연애소설 -

by 슈크림빵

파도가 바위에 부딪치는 소리가 거문고 소리와 닮았다 해서 이름 붙여진 '영금정'.. 구름 하나 없는 파란 하늘 아래로 불어오는 가을바람과 철썩이는 파도 소리의 하모니가 절로 미소 짓게 했다.

“바다는 끝이 없네.”

정은의 시선은 수평선 너머에 닿아 있었다.

“들어와 잠시 머물렀다가 다시 멀어져 끝내 흘러가니까. 바다는 그렇잖아. 늘 그 자리를 지키는 산이 좋더라. 나는."

호기롭게 제방의 돌벽을 향해 돌진해서는 이내 물거품이 되어 사라지는 파도를 보며 말하는 인해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산이가 좋데.”

“애쓴다. 산이 오빠랑은 얘기 끝냈어.”

인해가 아이 꾸중하듯 했다.

“그만해야겠지. 구슬 꿰는 것도 아니고 억지로 엮는다고. 하아.”

바닷물에 웅덩이가 패일 듯 지훈이 내쉰 한숨은 깊기만 했다.

산의 사랑이 바닷물 같기를 바랐다. 흘러 흘러가다 멈춘 곳, 그곳에 인해가 있었으면.. 산은 계속 흘러만 갔고 인해는 멈춰 섰다. 하늘과 바다가 맞닿은, 아득한 그 너머를 향한 정은의 두 눈에 슬픔이 어리었다.


“피곤할 텐데 나보고 오라 하지.”

“그냥은 없는 거야. 시간 쪼개서 보러 온 거지. 그동안 그랬잖아요. 반사!!”

두 손바닥을 인범을 향해 펼치고는 사랑의 주문을 외듯 정은의 목소리는 다정했다. 정은의 손목을 감싸 쥐고 인범이 당겨 안으려 한 순간이었다.

“12시 안에 들어가야 해서. 오늘의 동기 부여.”

아쉬워하는 말끝에 정은은 손목에 걸친 쇼핑백을 힘차게도 흔들어댔다. 건네받은 쇼핑백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인범의 눈은 정은에게 향했고 이내 채근했다.

“이제나저제나 기다렸는데 세탁비 청구 안 하길래. 세탁할 마음 없다는 건 인해 씨 통해 알았고, 색상과 사이즈는 저장된 대로, 셔츠만은 밋밋해서 넥타이 하나 넣었어요. 내 취향은 노타이다만 전에 빨간 넥타이 손님 되게 인상적이었거든. 해서 좋아하는 사람 생기면 선물해야지 했는데,, 기회 만들어줘서 고마워요."

쑥스러운 듯 정은은 손톱을 만지작거렸고, 그렇게 보고도 성에 안 찼는지 인범은 다시금 정은의 손목을 잡았다. 그러고는 당겨 품에 안았다.

“12시 되려면 아직이라.”

“나 큰 병 걸린 거 같아. 추리닝에 슬리퍼가 이다지도 멋져 보이다니.”

하하.. 기분 좋은 인범의 웃음소리에 정은의 어깨가 덩달아 들썩였다. 정은의 두 손이 인범의 허리를 옥여 바싹 조이자 정은의 등을 감싼 두 팔에 그는 힘을 가했다. 종잇장 하나 비집고 들어갈 틈도 없이 말이다. 두 사람의 심장이 서로에게 맞댄 채 오른쪽 왼쪽 번갈아 쿵- 쿵-,, 설레게 뛰었다.


“왜 하필 그 학원이었어요. 집이 근처라서?”

“모르는 편이 나을 텐데.”

곤란한 듯 인범은 자신 없게 말했다.

“직장인들은 자영업을 꿈꾸고, 여자들만의 로망도 아닐뿐더러, 국가 공인은 아직이어도 어쨌든 기술이니까,

했었는데 이렇게 나오니 궁금해졌다는."

“원장님이 엄마랑 언니 동생 하는 사이..”

“맙소사.”

한숨을 쉬는 정은의 반응에 인범은 다급히 입술을 떼었다.

“혈육 아닌 그냥 인사만 하는 사이. 걱정 안 해도 된다는.”

“남보다 못한 혈육 사이가 요즘 팽배해요. 드라마뿐 아니라 현실에서도 그렇고. 원장님이랑 내 사이 뻔히 알면서. 해서 사람은 서울로 보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닌가 봐. 좁아. 너무.."

속상함을 가득 담은 정은의 목소리가 이어졌다.

“나 손으로 하는 거 좋아해. 커피도 좋아하고. 궁금하다면서요.”

“그렇다고 하고요.”

차근차근 설명을 하는 인범과는 달리 정은은 데면데면하게 받아쳤다. 그러나 곧 뭔가 생각난 듯한 표정으로 바뀌었다.

“정말!! 운전병 출신인 줄 알았잖아. 전에 가게 근처에서 클락션 부러 눌러가며 내 인내심 시험한 날,, 열린 뚜껑이 설피 닫힌 터라 예민한 상태였는데도 말이지. 익숙한 길이 아니었음에도 전혀, 흔들림이 없던데."

"그게 결정적인 계기였군."

"말했을 텐데. 얼굴에 반했다고."

잘난 그 얼굴을 잔뜩 구기고, 장난스레 웃는 정은을 외면한 채로.

“드라마는 픽션인데 현실을 반영하니까, 픽션인 듯 또 아닌 듯하고.”

알 듯 모를 듯하게 인범은 말을 이어갔다. 철학자처럼 말이다.

“무슨?”

“엄마가 눈치채셔서 원장님 도움으로 당신..”

“아니라고 말해줘요.”

인범의 말을 가로채며 정은은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알았다면 막았을 텐데. 그렇게 되었네요.”

죄인처럼 인범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떨군 고개는 제자리를 찾았다.

“비록 과정은 비루했지만 끝은 창대했지.”

“무슨?”

“품행 단정하고 목소리에 힘도 있고, 등등.. 좋으셨데요. 뒤에 넣은 문장 부호인 말줄임표는 '등등' 만으로는 부족해서 부러 넣은 거라는, 문맥상 주어인 '등등'을 위해 꾸며 주는 말을 앞에다 잔뜩 배열한 거고,, 하하. "

껄껄- 크게 웃던 인범의 얼굴 가득 금세 먹구름이 드리워졌다.

"근데 긴 팔을 힘차게 휘두르며, '원장님!!'.. 쩌렁한 목청으로 말이지."

“하아.”

‘망했구나.’ 정은의 한숨 소리가 발아래로부터 올라오는 듯했다.

“앞 건물 영어 학원 원장님, 노트북 빌려주마 했던, 난 언니가 없고 원장님은 남동생뿐이고. 오픈하면서부터 봤어요. 혹한기 훈련 함께한 전우애라 할까. 아빠 말씀이 옳았네. 친할머니 살아 계셨으면 매일 혼났을 거라고, 여자애 목소리가 장수 같아 어디에 써먹냐고. 좋은 걸 숨길 수도 없고, 그건 내가 아니니까 그러기는 싫고."

“커피숍 앞까지는 갔다만 정작 못 들어가셨다고."

"실망하실까 봐?"

"나잇살 먹고 면 깎이는 행동이라고, 해서 돌아서던 찰나 창문 닦던 당신을 보신 거고, 걸레 내팽개치고 인사하던 꾸밈없던 그 모습이 되레 마음에 드셨다고, 정식으로 초대하자는 엄마 의견에 어깃장을 놓고, 평소 모습이 궁금하셔서 불쑥 가신 건 맞지만.. 너무 고까워하지는 말고."

“아버지는 어떤 분이세요?”

“내 모습에 흰머리, 주름만 덧칠하면 딱.”

그림이 그려지는 듯 정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나도 그 모습이 좋았거든. 아버지처럼.”

두 팔을 들어 올린 인범은 비 오는 날 차량의 와이퍼처럼 부지런히 휘저어댔다.

“봤구나. 전우들의 인사법.”

“아니. 나는 영준이. 아담하고 얼굴 하얗고, 엄마 손 잡고 있던데.”

“아!! 화장실 같이 썼던 사이.. 였었지. 그 꼬마가 올해 초등학생이 되었다는. 상가 건물이라 임대료도 관리비도 만만치 않다고 여름 초입에 이사 나갔어요. 골목 상권도 어렵다던데. 하아.."

정은의 목소리에 아쉬움이 묻어 있었다.

“나쁜 놈도 모자라 내동 얼음장인데 꼬마한테는 환하게 웃으니까. 관찰이 좀 필요했지. 혹 소아성..?"

얼토당토않은 말을 참 그럴듯하게 뱉자 찰싹- 소리가 날 정도로 인범의 어깨를 맵게 때렸다.

“영준이는 등이 예쁜 아이였지요. 떡집은 명절밑이 대목인지라 퇴근하는 길에 보았네. 세 식구가 둘러앉아 송편 빚고 있는 그 모습을, 떡보는 아니다만 영준이가 만든 송편 사러 갔더니 상품 가치 없다고 가지런히 담긴 것을 건네시잖아. 원래 송편은 깨소가 생명인데 애는 손이 야무지지 못해 깨소를 가득 넣었을 거 같아 그거 사러 온 거라고,, 해서 아침부터 웃고 시작했다는."

정은은 배시시 웃었고 인범은 그녀의 머리를 가만히 쓸어내렸다. 그의 손길이 싫지 않았던지 정은은 살며시 눈을 감았다. 마치 집사에게 몸을 맡긴 고양이처럼.. 시계 초침은 얼마 남지 않은 하루의 끝을 향해 바삐 움직였고 빈틈이 없는 주차장과는 달리 불을 밝힌 집들은 듬성듬성했다. 자동차의 경적소리가 크게 울리더니 이내 고요한 어둠 속에 잠겨 버렸다. 새로운 날을 위해 각자의 자리에서 분주한 밤의 풍경과는 달리 아파트 놀이터 벤치에 나란히 앉은 정은과 인범은 여전히 오늘의 안에 있었다.


“반창고는 글로브 박스 안에.”

비상등을 켜 놓은 채 인범은 편의점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글로브 박스의 잠금장치를 열고는 매의 눈으로 반창고 위치를 탐색한 후 인형 뽑기의 은색 갈고리처럼 단번에 낚아채려 했으나 실패했다. 반창고와 함께 편지봉투 크기의 팸플릿이 정은의 발아래로 낙하했다. 한껏 허리를 굽혀 팸플릿을 주워 눈으로 따라 읽어 내려갔다. <동행, 함께 내딛는 발걸음>.. 책, 그림, 음악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인 듯했다. 접힌 팸플릿을 한 면 한 면 펼치다 보니 낯선 이들 속에서 얼굴도 이름도 낯익은 혜진이 이쁘게도 웃고 있었다. 부러 큰 숨을 내쉬어 널뛰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팸플릿을 고이 접어 원위치하려던 정은의 손길은 순간 정지되었다. 9월 17일.. 각인된 날짜였다. 머릿속 회로들을 빠르게 재배열한 결과, 인범의 천안행을 위해 이른 오후에 헤어진 날, 팸플릿에 선명히 새겨진 장소 역시 천안이었다. 힘들게 누른 마음이 제멋대로 튀어버렸다. 한껏 어깨를 올려가며 들숨 날숨을 뱉어보아도 진정이 되지 않았다. 앞좌석의 문이 열리자 본능적으로 팸플릿을 넣고는 글로브 박스를 급히 닫았다.

“반가워서. 게다가 덤으로 하나 더 준다기에.”

양손에 빠삐코를 들고서 인범은 아이처럼 해맑게 웃었다.

"산이한테 배웠는데."

손에 쥐고 있던 반창고를 보며 인범이 말을 건네자, 그때에야 비로소 정은은 포장지를 벗겨 양쪽에 부착된 비닐마저 제거하고 검지손가락에 대충 감았다. 기다렸다는 듯, 아이스크림을 건넨 인범은 비상등을 끈 채 빠르게 출발했다. 호기롭게 원을 그려대던 네 바퀴는 얼마 가지도 못해 빨간색 신호등에 멈춰 섰다. 차창을 통해 바라본 정지 화면인 듯한 도로 상황이 자신의 마음 같아 싫었던지 정은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할 말 있구나."

들을 말이, 할 말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생각했었나 보다. 아파트 앞 횡단보도 신호에 멈춰 선 차 안에서부터 이어진 굿바이 인사에도 불구하고 굳이 따라 내려 손을 잡는 인범의 행동에 정은은 속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내일 비 온다고."

다정한 목소리로 한 번, 부드러운 손길로 또 한 번, 인범은 정은의 오른쪽 팔을 조물조물 어루만졌다.

"엉덩이 밑에 팔 집어넣고서 밤새 뒤척거릴까 봐. 저릿함에 깨지 말고 푹 자라고."

아쉬운 게 헤어짐인 건지 아니면 맞닿은 서로의 체온인 건지, 어쩌면 둘 다인 건지,, 입은 이별의 인사를 도돌이표 하고 있었지만 몸은 '가지 마.'를 표현하고 있었다. 작은 별 하나 박히지 않은 컴컴한 하늘 때문이었을까? 바라다본 인범의 검은 눈동자는 어둡기만 할 뿐 아무것도 없었다. '더 이상 니 자리가 아닐지도 몰라.' 속에 말이 빈정거리며 얄밉게 놀려대는 듯했다. 순간, 정은은 덜컥- 겁이 났다.

"늦었다. 가요."

서둘러 말하며 슬며시 인범의 손을 놓았다. 저만치 걸어가던 인범이 돌아서더니 허공에다 두 손을 힘차게 흔들어대고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걸어 나갔다. 멀어지는 그의 발자국에 맞춰 아카시아 잎을 하나씩 떼어 냈다. '들어서 좋은 걸까?' 아니면 '안 듣는 게 좋은 걸까?' 인범은 점점 멀어지고 있었고 떨어진 무성한 아카시아 잎은 에두르기만 할 뿐 정작 답이 없었다.

이전 17화목하 열애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