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금파리 & 한 조각

- 보통의 연애소설 -

by 슈크림빵

"지훈이는 연희랑 차에."

인범의 말에 정은이 끄덕이자 산은 자신만의 스타일로 편곡해서는 짧게 한 자락 뽑았다.

"눈빛만 봐도 알 수 있잖아."

"싱겁기는. 자식."

딴에는 친근함의 표현이나, 결국 손아랫사람 대하듯 낮추어 말한 셈이었다. 그러나 익숙한 상황이라는 듯, 그 흔한 코웃음 하나 없이 산은 넘겼다.

"내가 뭐 갖고 왔게. 딱 걸렸어. 너 이 자식."

지훈의 등장은 요란했고 그런 그를 연희는 서둘러 말렸다.

"반창고 찾는데 딸려 오길래. 네 이놈, 이실직고 답하여라. 천안에 숨겨둔 묘령의 여인은 대관절 누구더냐?"

테이블 위 술병을 가장자리로 밀고 정확히 정중앙에 팸플릿을 놓고 죄인 다루듯 인범을 추궁하자 정은의 입은 소리 없이 '아뿔싸' 했다. 굳이 가쁜 숨소리가 아니더라도 인범의 복잡한 심경을 감지할 수 있었다. 의기양양하게 팸플릿을 펼치던 지훈의 두 눈은 이내 가늘어졌고 말투는 가시처럼 뾰족했다.

"혜진이 전시회였어? 천안까지. 미친놈."

"기어이 했구나. 오랜 약속이었잖아."

팸플릿에 시선을 빼앗긴 채 말하는 산의 목소리 또한 탐탁지는 않은 듯했고 조심스레 정은의 눈치를 살폈다.

"사람들 일인 거지. 그림이 뭔 죄라고."

"그래도요. 이건 좀 크다."

"연희 말에 동감!!"

서둘러 입장을 정리하면 일단락될 줄 알았건만 연희마저 합세해 좀처럼 좁혀지지가 않았다. 어수선한 상황을 잠재울 확실한 한 방이 필요했다.

"양다리 걸친 것도, 아내가 결혼한 것도 아닌, 거듭 말하지만 오랜 약속이라잖아."

"남녀 사이 친구는 없을뿐더러 끝난 사이인데 굳이 약속을 지켜야 해? 사람도 상황도 다르다만 난 100% 공감 안돼."

시종일관 날이 선 연희의 말투가 세차게 날아와 정은의 가슴을 쓱 베고서는 그 자리에 박혔다. 커다란 돌덩이에 눌린 듯 뱉지 못한 말들이 목구멍 저 아래에서 원을 이루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바라다본 인범은 이리저리 흩날리며 내려앉을 곳을 찾는 부유하는 먼지 같았다. 갈지자로 여러 번 휘청거리더니 이내 머물 곳을 찾은 듯 보였지만 산이 내쉰 큰 숨에 허공으로 어지럽게 떠올랐다.


지훈과 연희를 실은 차가 출발하자 산을 태운 택시도 제 속도를 내며 시야에서 사라졌다. 형형색색의 빛을 내뿜으며 몸소 화려함을 뽐내는 대도시의 밤과는 어울리지 않는 무채색 톤의 정은과 인범이 거리를 둔 채 마주하고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면.”

“지훈 씨만 아니었으면.. 아님 들키지를 말던가.”

‘미안해’란 말을 기대했었나 보다. 듣고 싶었던 답 대신, 하고 싶은 말을 던지는 인범이 미웠던지 속에 말을 숨기고 정은은 삐딱하게 받아쳤다.

“산이 말처럼 첫 전시회에 가겠다는 오래전 약속이었어.”

“직접 말해 주면 좋았잖아."

"축하해, 한마디만 건네고 되돌아온 거야. 꽃다발은 물론 아무 일도 없었어.”

“그런 얘기 듣자고 이래요. 지금!! 말하지 못해 미안하단 그 말이 먼저 아닌가? 그게 최소한의 배려 아닌가? 글로브 박스 안에 있던 팸플릿 봤어요. 사정이 있었겠지. 차차 말해 주겠지, 적어도 지훈 씨보다는 먼저였어야 하는 거잖아."

“이럴까 봐서..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았다고. 다 지난 일이야.”

“당신 생각과는 달리 다 지난 그 사랑이, 아무 일도 없었다는 그날이,, 신경 쓰여. 당신의 하루를, 가슴속을, 머릿속을, 상세 보기 하겠다는 게 아니잖아. 적어도 비밀은 만들지 말았어야지. 사랑하는 사이라면 그래야 하는 거 아닌가? 당신한테 난 대체 뭔데, 우리 사이는 또 뭔데? 빼고 깎고 해서 반듯하고 다듬어진 걸 원하는 게 아니야. 아까 선수 친 거는 당신 아닌 날 위한 방패였어. 망신당하기 싫어서. 왜 나를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요!!"

속상했던지, 하나하나 뱉고 나니 마지막 말에는 원망이 가득 담겨 있었다.

“다시 시작해 볼까 하는 마음에 찾아간 거라는 혹 그런 대답을 기대한 건가?"

상상해 봤던 예문에 없는 생경스러운 문장을 툭- 던지는 인범을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하고픈 말은 분명 있었으나 목소리도 놀랐는지 모기 날갯짓하는 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아는지 모르는지 인범은 말을 이어갔다. 갈매기 날갯짓처럼 눈썹을 한껏 추켜올렸다. 들쑥날쑥한 돌들이 멋대로 널린 시골길을 달리는 경운기처럼 목소리는 낮고 또 높게 어지럽게 흩어졌다.

"다시 만나니까 솔깃하더라. 좋더라. 그림 핑계 대고 얼굴 보러 간 거였어. 이 대답이면 된 거야!!"

두 사람의 시선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팽팽하게 엉켰다. 이내 잡고 있던 줄의 한쪽 끝을 놓아 버린 듯 인범의 목소리에서 바람이 새어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에 대한 믿음이 없구나. 당신은.”

입 안에 머금은 숨은 분명 따듯했으나 입 밖으로 뱉은 숨은 차가웠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웠지만 두 사람의 거리는 끝내 좁혀지지 않았다. 헤어짐이 아쉬운 모양인지 손을 놓지 못하는 어린 연인들, 여자의 등을 너른 가슴으로 품어 안은 젊은 연인들, 서로의 팔에 의지한 채 다정하게 걷는 어른 연인들의 체온으로 도시의 밤은 달아올랐고 공기는 달큰했다. 오직 두 사람만이 그런 밤의 형국에 어울리지 않는 행색이었다. 마치 틀린 그림처럼 말이다.


"쉬는 날? 마시고 갈 테고, 앉아요."

다른 상황이었다면 배는 반가웠을 텐데. 산의 느닷없는 방문의 연유를 알기에 들을 말도, 해야 할 말도 정리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해서 한 박자를 부러 쉬며 커피를 만드는 정은이었다.

"그림 그렸어요. 첫 전시회엔 꼭 가겠다는 오랜 약속이었고. 혜진이는 작품을 걸었고 인범이는 약속을 지킨 것뿐, 그것 외엔 아무것도 없어요.."

자신이 없는 듯 산의 말끝은 두루뭉술했다. 평소와는 달리 말이다.

"전에 지훈 씨 결혼 스토리 들으며 그런 생각했어요. 두 사람이 알게 모르게 오작교 역할을 했구나. 혹여 나중에 나한테도 그래 준다면,, 근데 별로다."

일부러 입을 닫으며 정은은 말을 아꼈다. 지금 마주한 사람이 인범이었다면.. 생각을 멈추고 머리를 저었다.

"그 녀석 입장에서가 아닌 사소한 오해가 눈덩이 될까 봐 그게 안타까워서."

그들의 말처럼 사소한 오해인 걸까? 돋보기 쓰고 억지로 들여다보고 있는 건가? 여러 번 생각해 본 문제였지만 정은의 입장은 확고했다. 설령 오해였다 해도 사소한 건 절대 아니라는..

"우리 문제니 알아서 해결할게요. 발걸음 해준 거는 고마운데 생각 따로 표정 따로 잘 못해서.. 미안해요."

할 말이 더 있는 듯했지만 상황상 정황상 산은 입을 꾹 닫았다. 말없이 테이블 위 커피잔을 만지던 서로의 모습이 어색했던지 눈이 마주친 두 사람은 힘없이 웃었다.

“이유도 모른 채 갑자기 이별을 통보받았어. 매달려도 봤지 기다려도 보고 미워도 했고 잊어가던 중 그러다 당신을 만난 거고 이전 경험들로 인해 많이 조심스러웠어. 우연히 전시회 얘기를 들었고 제대로 이별하고 싶었어. 나를 위해 그리고 당신을 위해.. 다시 만나면 어떨까? 안 해본 상상은 아니야. 넘기려 했던 것도 아니고 이 또한 핑계처럼 들리겠지만,, 더 늦기 전에 말하고 싶었어."

잠시 말을 멈추고 목소리를 가다듬은 후, 인범의 담담한 목소리는 이어졌다.

“곰곰이 생각해 봤어. 당신 입장에서, 우리 입장에서,, 부러 일 만들고 싶지 않았어. 그게 당신을 위한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섣부른 내 조바심이 우리 사이에 벽을 만들었어. 오늘 점심은 백반을 먹었고 식당 자판기에서 믹스커피를 먹었는데 맛이 아주 좋았다는.. 일상을 공유하고 있는 그대로의 내 모습을 원한 거였는데 그걸 간과하다니, 든든한 울타리가 기댈 수 있는 커다란 나무가 되고 싶었나 봐.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라고 생각했어. 말 못해서, 신경 쓰게 해서, 불편한 상황 만들어서 미안해. 저번에 홧김에 했던 말,, 내내 걸렸고 말하는 지금도 그래. 비겁했던 거 사과할게. 끝까지 들어줘서 고맙고, 이만 끊을게."

끊지 말고 들어만 달라던 인범의 부탁에 철석같이 응한 정은은 툭 끊긴 핸드폰을 바라보며 그제야 큰 숨을 내쉬었다.


“괜찮은 거야?”

정은의 이마에 오른손을 얹은 채 묻는 인범의 목소리에 걱정이 가득했다. 억지 뒷걸음질하며 정은은 인범의 사정권 안에서 성큼 달아났다.

“감기가 다 그렇지 뭐.”

“셔츠랑 넥타이 핑계 삼아, 감춘 속마음은 보고파서고, 상차림은 산이 솜씨, 잘.. 지냈어요?"

“잘 어울리네. 감기만 빼면. 환자 기록 빼돌리는 의사,, 면허 취소감 아닌가?"

꺼내지 못한 속마음은 ‘엉망진창이야’였지만 애먼 산이까지 들먹이며 보통날처럼 꾸역꾸역 말을 늘어놓았다.

“커피 한잔 줘요. 손님으로 온 거니 내박치진 않겠지.”

애써 웃는 인범의 모습에 격한 감정이 일어나자 이내 정은은 크게 눈을 깜빡여 솟구치는 눈물을 억지로 눌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가 담긴 테이크아웃 컵을 건네며 짐짓 부드럽게 말했다.

“장승처럼 서서 그러지 말고 편히 앉아서 마셔요.”

“이렇게 마주하고 있는 게 좋아. 얼마만인데.”

목이 탔는지 야무지게 빨아대고서 인범은 힘없이 웃었다.

“그리웠어. 커피도, 당신도."

순간, 꾹꾹 눌렀던 감정이, 눈물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자꾸만 위로 솟구쳤다. 바라다본 인범의 눈동자 역시 어찌할 바를 모른 채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있었다. 조심스레 뻗은 인범의 손이 정은의 눈가로 향했지만 그녀가 몸을 움직여 다시금 거리를 유지했다. 이에 경로를 이탈한 인범의 눈과 손은 붕 뜬 채 방황하였다.

“당신이 아니라 나에 대한 믿음이 없는 거 같아. 생각할 시간이 좀 필요해요."

허공에 뜬 인범의 두 눈과 손은 할 말이 있는 듯 잠시 움직임이 있었지만 새로이 경로를 탐색이라도 한 듯 원래 위치로 돌아갔고 두 눈은 다시금 물끄러미 정은을 향했다.

“너무 오래 생각하지는 말고. 뭐든 고인 건 안 좋아. 그게 눈물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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