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일에 반드시 끝은 있다
- 보통의 연애소설 -
“급해서요. 기사님 부탁드립니다.”
손에 잡힌 청바지에 눈에 띈 운동화를 걷어 신고는 힘껏 내달려 택시 뒷좌석에 올랐다. 정은의 목소리가 많이 다급했었나 보다. 미터기에 새겨진 요금을 가리키며 지긋한 중년의 남성도 그제야 참았던 숨을 몰아쉬었다. 도착한 센텀 정형외과 405호 앞,, 미색의 커다란 미닫이 문이 장승처럼 버티고 있었다. 확인하고 싶은 것이 전화기 너머의 낯선 그녀인지, 인범의 현재 상태인지, 아니면 이 모두인 건지.. 만약 그 둘이 함께라면? 그로 인한 화와 분을 춤과 노래로 승화시키지는 못할 테지. 처용처럼은 말이다. 그만한 깜냥이라면 애당초 이 사단을 만들지도 않았으리라. 몸의 기운을 최대한 흉부에 실어 짤막한 숨을 쉬고는 미닫이문의 은색 손잡이를 잡아 밀었다.
병실 안 가지런히 놓인 5개의 침대는 주인과 한몸이었다. 머리가 희끗한 중년의 남성이 첫 번째 침대의 주인이요. 바로 옆 두 번째 침대의 주인은 젊었으나 월남에서 갓 돌아온 듯 잔뜩 그을려 있었다. 마주한 창쪽 구석 침대에 생경스런 옷을 입은 익숙한 인범이 자리하고 있었다. 두 다리를 덮고 있는 것이 환자복뿐이자, 휴- 마음의 소리가 흘러나왔다. 필터링 하나 없이 말이다. 만화책에 얼굴을 파묻고 아니 얼굴에 만화책을 덮어쓴 채로 그는 독서 삼매경 중이었다. 곁으로 바짝 다가갔지만 한 치의 미동도 없었다. 해보자는 건가!! 그렇다면야..
“깜짝이야.”
만화책을 들어올리자 뚜렷한 이목구비가 세상 밖으로 나왔다. 우려와 달리 머릿속에 새겨 넣은 모습 그대로임에 안도의 숨이 새어 올라오자 억지 기침으로 꾹- 눌렀다.
“건너 들어서 좋은 얘기도 있지. 근데 이건 아닌 듯. 뭐예요. 이 상황?”
“사고가 있었어. 심각한 건 아니고. 손목에 금이 조금 아주 조금 가서.. 부득불 입원해야 한다고 우기는 바람에. 근데 어떻게?"
“오늘 병실 못 지키니 대신 부탁한다고. 어디 갔나 봐요?"
침대와 환자들 뿐인 거 진즉에 알았음에도 부러 좌우로 고개를 돌려가며 과한 동작을 취한 후, 인범과 눈을 맞추고 선언하듯 정은은 말했다.
“보기에도 경미한 것 같으니 굳이 보호자 필요 없을 것도 같고.”
“가지 마.”
멀쩡한 왼손으로 인범은 정은의 손목을 단단히 감싸 쥐었다.
“그럴 생각이에요. 목적이 아직이라.”
잡힌 손목 대신 반대쪽 손을 침대 아래로 뻗어 등받이가 없는 자그마한 의자를 꺼내 엉덩이를 걸쳤다. 깁스로 고정한 오른손을 지지대 삼아 인범이 몸을 일으키려 애를 쓰자, 보다 못한 정은이 그 움직임을 도왔다.
“보호자가 필요해.”
자신 없는 듯 말을 마친 인범은 맞잡은 두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오랜만이라 그런 건지, 그의 체온이 그리웠던 건지 정은 역시 그의 손아귀에 자신을 맡긴 채 얼굴 표정만 가까스로 싫은 척을 하고 있었다.
“말도 안 돼.”
“믿기지 않겠지만 다 사실입니다.”
재차 고개를 흔들어 대는 정은만큼이나 마주한 젊은 여성 또한 난감해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이유인 즉슨, 아이가 갖고 놀던 공이 횡단보도로 흘러갔고 뒤를 따른 아이를 향한 어머님의 다급한 외침에 저 남자가 뛰어들어 아이를 구하려다, 침대에 누워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는.. 맞나요?"
“'정은아!!', 다급한 외침에 뛰어들었고 돌진하던 차가 급히 브레이크를 밟아 다행히 두 사람과 안전거리를 유지하고 멈췄다는, 해서 큰 부상은 막을 수 있었어요. 덧붙이자면요."
아이 엄마의 상세 설명이 끝남과 동시에 옆에 선 아이 아빠는 연신 머리를 조아렸다. 방아깨비처럼 말이다.
“꿈나무 유치원 개나리반 5살 박정은입니다.”
개나리처럼 소담스러운 꼬마 아이가 병아리처럼 귀엽게도 본인 소개를 했다. 정은의 두 눈은 아이에서 부부까지 차례로 훑었고 아이 엄마는 지갑에서 명함을 꺼내 정은에게 건네었다.
“커피숍 많이 이용해 달라고.”
경로를 이탈한 정은의 눈동자는 인범에게 향했고 환자복 하의를 만지작거리며 그는 애먼 각을 잡고 있었다.
“사고 당일 입고 있던 셔츠가 찢어졌는데 정작 다친 팔은 안중에도 없고 한참을 글썽이길래. 정은 씨한테 처음 받은 의미 있는 선물이라고, 그게 계속 남아서, 전화기 들고 많이 망설였는데 잘한 거 같아요. 대답은 직접 들어요."
아이 엄마와 마주친 인범의 두 눈은 한껏 채근했지만 슬며시 미소 짓기만 할 뿐 그녀는 말을 아꼈다.
“부러진 거 아닌 살짝 금이 간 경미한 부상이래요. 따듯한 곳에서 주는 밥 먹고 보살핌 받으며 졸리면 자고 만화책 보며 쉬는 거예요. 얼굴 좋아진 것 봐. 이미 잡은 손 아닌 아직 고민 중이니 그만 미안해하세요. 아버님."
대역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아이 아버지를 향한 정은의 말투는 한없이 인자했다. 그제야 고개를 든 아이 아버지를 마주했고 눈, 코, 입의 위치뿐 아니라 대충 봐도 부녀는 판박이였다. ‘아빠 닮으면 잘 산다던데.’ 슬며시 입꼬리를 올린 정은과는 달리 인범의 미간엔 실주름이 가득 자리하여 실로 먹구름이 낀 형국이었다.
“여자 친구 이름이랑 같아 무작정 뛰어들었다는데 웬만하면 손 잡아주지. 아니 왜 넓은 휴게실 놔두고 좁다란 병실에서 이러는 건지, 여자 친구 없는 사람 서러워서 살겠나."
시끄러웠던 건지 아니면 부러웠던 건지 옆 침대 새까만 김 상사님의 볼멘소리가 줄줄이 이어졌다. 이내 턱밑까지 이불을 끌어올리고는 일부러 사부작거리며 모로 누웠다. 그 바람에 침대가 한차례 휘청거렸다.
“우리 마누라는 두 해 전에 하늘나라 갔다우. 그러게 있을 때 잘할걸.”
출입문 쪽 노신사의 하소연 같은 넋두리가 이어지자 소음의 진원지인 그들이 일제히 고개를 숙여 미안함을 전했다.
“이제 조금 살 거 같다. 전화가 모닝콜이었거든. 공복에는 원래 내 정신이 아니라.”
병원 1층 매점 외부에 놓인 플라스틱 의자에 앉은 정은은 통조림 안, 조각난 황도를 뚝딱 먹어 치운 것도 모자라 단물마저 들이켜고는 만족한 듯 쓱쓱 배를 문질러댔다.
“더 먹어요.”
“뺏어 먹으면 빈손으로 병문안 온 셈이니 그건, 싫은데요. 명불허전이로세. 전에 술집에서는 제 맛이 아니더라. 맛있을 때 먹어요."
인범의 호의를 정중히 사양하고는 어지간하게 부드러워진 음색으로 말했다.
“셈은 제대로 했네.”
“무슨?”
깁스에 적힌 낙서를 손가락으로 짚어 말하는 정은의 태도는 다분 짓궂었다.
“'정은이 거야. 건드리지 마시오.'.. 어우. 간지러워. 국어사전도 아니고 미취학 아동이,, 건드리지? 건들이지? 두고 엄청 고민했는데."
피식- 그때에야 비로소 그가 웃었다.
“여자 간호사 선생님들 많다고 정은이가 물리치료사 선생님한테 부탁해서.”
“.. 아.”
호기롭게 말을 뱉었다만 재빠르게 입을 닫고는 한 번 더 눈으로 따라 읽었다. ‘건드리지 마시오.' 전후 사정을 듣고 나니 시기적절한 경고문이었다는 생각에 핏- 웃음이 새어 나오려 하자 들키기 싫었던지 급하게 화제를 돌렸다.
“해서, 퇴원은 언제 해요?”
“모레.”
다급하긴 했나 보다. 이미 들은 얘기를 재차 물었으니 말이다. 인범은 모른 척하며 처음 하는 말처럼 또렷이 답변했다.
“이름 듣는 순간 내 정신이 아니었나 봐.”
“천만다행이지. 두 팔 모두였다면 둘 중 하나는 죽었을 테지.”
인범은 말없이 정은의 손을 감싸 쥐었다.
“병원 이름 물어보고는 냅다 달렸어요. 큰일 난 줄 알고 오는 동안 얼마나 졸였는지. 만화책 보는 모습에 휴- 했다가 그럼에도 미웠는데 사정 듣고는 내가 더 미웠네요. 결국 나 때문이잖아."
정은의 고개가 살짝 내려가자 인범은 잡은 손을 꼭 쥐었다.
“어제 일 끝내고 당신 집 앞에 찾아갔는데 불 꺼진 창문만 멍하니 보다 왔어요.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한참을 망설였어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는데 정작 1분 1초가 엉망진창이었어. 억지 핑계를 대며 다음으로 넘기고,, 실상 비겁했던 건 나였어. 이 말 못할까 봐."
다음 말은 ‘보고 싶었어요.’였지만 정은은 이 말을 끝내 하지 못했다. 차오른 눈물이 참지 못하고 툭- 터져 나왔다. 잡은 손을 놓지 않은 채 일어난 인범이 정은마저 일으켜 세우고는 꼭 쥔 손을 힘껏 당겨 너른 가슴에 품었다.
“팔만 아니었어도.”
억울한 모양인지 졸지에 방해꾼이 된 깁스한 팔을 노려보며 인범의 분풀이가 이어지자 정은은 잡은 손을 놓고 두 팔로 그의 허리를 단단히 옥죄고서 필사적으로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보고 싶었어.”
더 이상 전할 수 없는 말은 아니었다. 정은의 어깨에 얼굴을 묻으며 인범은 대답을 대신했다.
"정은 씨.. 구나. 듣던 대로.."
"보기 드물게 잘 생겼죠."
"예쁘다고 하도 자랑을 하길래. 목숨을 거는 그 사람은 대체 누굴까? 궁금했어요. 대필료랑 퉁쳤거든요."
"당 떨어질 때 드세요. 병원이 맛집인지라."
위아래 남색 유니폼을 입은 듬직한 체형의 물리치료사에게 정중히 인사를 건네고는 이내 황도 통조림을 건넸다.
"잘 먹겠습니다. 경미해 보여도 절대 안정이 필요한 환자이니 옆에서 알뜰살뜰 보살펴 주셔야 합니다. 저녁 식사 아직이니 밥도 떠먹여 주고. 하하."
덩치만큼이나 화통하게 웃은 그가 빠른 걸음으로 멀어지다가 급히 몸을 돌려 황도 캔을 힘차게 흔들어 댔다.
"유명 인사 나셨구먼."
"정은이가 여기저기 다니면서 미주알고주알 하는 바람에."
"선생님 말씀 따라야 하는데,, 옆 침대 환자분이 식판 던지면, 먼저 가신 할머니 생각에 어르신 한술도 못 뜨실까 봐, 저녁은 나가서 먹어요."
"모퉁이에 생선구이집 잘한다던데. 삼시 세끼 병원밥 지겹기도 하고, 가시 발라내려면 시간 많이 잡아먹을 테니. 핑계 좋고, 분위기는 더 좋고."
정은이 인범의 왼쪽 팔에 자신의 팔을 꼭 끼었다. 약속이라도 한 듯 오른발 왼발 사이좋게 걸음을 떼었다. 턱시도와 웨딩드레스는 없었다만 간간이 마주치는 환자들과 간호사들을 하객 삼아 복도의 끝을 향해 힘찬 행진을 이어갔다.
"집들이도 아직이고, 인범 오빠 깁스도 풀었고, 이렇게라도 얼굴 보니 좀 좋아. 적당한 운동은 필요해."
아직 티도 안 나는 아랫배에 부러 손을 얹으며 연희는 방긋 웃었다. 널찍한 거실 한가운데 놓인 커다란 교자상 위에 빼곡히 차려진 음식들, 연희와 지훈 그리고 튼튼이의 사랑방은 소문난 잔치가 한창이었다. 거실도 상도 널따란데 다닥다닥 붙어 앉아서는 뭐가 좋은지, 그들은 연신 싱글벙글 해댔다.
"잔을 듭시다."
정은의 구령에 맞춰 일제히 잔을 높이 들었다.
"두 사람.. 뭐야? 좀 전에 산이 씨 술 마시던데. 헷갈린 건가? 근데 멀쩡히 본인 잔 드는 거 보면,, 흑기사인가?"
물음표를 가득 담은 정은의 눈은 인해를 향했다.
"실은 나도. 아까 마트에서 짐은 열 개였지. 사람은 다섯이니 두 개씩 나누면, 한데 산이 자식이 무려 세 개를 들더라고. 혹 선배님처럼? 해서 인해한테 물었더니 자기 팔은 멀쩡하다고. 말 나온 김에 짚고 넘어가자."
지훈의 궁금증이 추가되었다.
"며칠 전에 산이한테 전화했더니 대뜸 '인해야~'하는 거야. 오죽하면 그럴까 싶어 마음 짠했는데. 친구 만나러 가면서 최소 2시간이라며 혹 남자 생긴 거 아닌지 물어보시길래, 산이 걸려서 철렁했는데,, 그러고 보니 수상하다. 너네."
인범까지 가세하여 분위기는 갑작스레 진실 규명의 장으로 튀었다. 단번에 일어난 인해는 tv가 올려져 있는 장식장 위, 진열된 웨딩 사진 중 하나를 들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한국행을 앞당긴 나머지 절반의 이유, 사진 받고는 어질했지. 첫 키스의 주인공 아닌 동창이라 할 뿐, 근데 봐봐. 산이 오빠랑 구도가 제법인 거야. 해서.."
사진 속에서 정은은 산과 인범 사이에 있었다. 인해의 손이 인범을 가리자 산과 정은의 모습만 보였다.
"어!! 정말."
"바람 넣지 마."
지훈의 추임새 위로 호된 인범의 목소리가 덧입혀졌다. 사진에서 눈을 뗀 산과 정은은 서로를 보며 웃었다.
"결국 언니가 다 한 거예요."
산은 감사주를 정중히 바치었고 인해는 정은의 어깨에 슬며시 머리를 기대었다. 인범은 정은의 머리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언제부터였는지 물어도 될까?"
"설악산 신흥사에서 첫 키스했으니 그날이 1일인 셈."
서양 문물은 실로 위대했다. 일일 드라마 리뷰하듯 인해의 말투는 흘러가는 물처럼 잔잔했다. 연희, 지훈, 인범, 정은이 한목소리로 크게 외쳤다.
"뭐!!"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듯 산의 두 눈은 방향을 잃고 우왕좌왕했다. 혹여 인범과 눈이라도 마주칠까 몸의 각도까지 틀며 그의 시야에서 조금이라도 멀어지려 부단히도 애를 썼다.
"산이 울리면 내 손에 죽는다."
예상치 못한 엉뚱한 예문을 곧잘 읊어대는 것으로 보아 인범은 AB형이 확실했다. 이에 동조하듯 둘러앉은 그들이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에 반드시 끝은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삶은 거짓일 테니.. 지구 반 바퀴를 돌아서든, 다시 태어나든, 운명이라면 반드시 만난다는,, 상투적인 사랑의 환상은 실제로 존재하고 있었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