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5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by 슈크림빵

기다란 직사각형 실내에는 술병과 집기들로 가득한 바와 마주 앉을 수 있는 자그마한 테이블이 꼬리를 물고 놓인 탓에 일방통행만이 가능했지만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들은 비좁은 공간 어두컴컴한 조명 아래에서 술을 들이켜고는 두런두런 속삭여댔다. 마치 사랑의 묘약을 마시고 외우는 주문처럼 말이다.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는 그런 착각을 불러일으키게끔 했다. 밤은 술을 부르고 한데 모인 그들은 낭만과 사랑을 나누고도 못내 아쉬운지 각자의 방식으로 새기고 있었다.

"고마웠어요. 그동안."

"그동안? 취한 건가? 아니면 쿠폴라 후유증인가?"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마라'는 경고 무시하고 뻥- 찼으니, 것도 타고 남아 하얀 재투성이인.. 그런 연유로 삼진 아웃,, 아닌가요?"

아라의 맑은 웃음소리에 진호는 그저 어리둥절해했다.

"빙 두르지 말고 하고픈 말 하던가 아님 묻고 싶은 걸 묻던가."

"고아라 씨 우리 구면인가요?"

"그렇던데요."

"열아홉 개의 질문과 답을 기다릴 만큼의 깜냥은 아니라서."

"알아요. 이름도, 나이도, 심지어 뭐 하는 사람인지도."

끈덕지게 캐묻는 진호를 더는 감당할 수 없었는지 아라는 에코백을 뒤적거려 꺼낸 손바닥만 한 노트를 테이블 정중앙에 놓았다. 한참을 노트에 박았던 시선을 들어 올린 진호는 곧장 아라를 찾았다.

"<love will never end>의 엔딩 요정이 김진호 씨여서, 기차표 돌려주던 날 알았어요."

"근데 왜 내내,, 모른 척했어요?"

"그러니까요. 처음엔 호기심? 다음은 궁금함? 연예인은 처음이라."

"연예인은 무슨. 확인하려던 건 결국 나였다는?"

바라보는 시선은 약속이라도 한 듯 팽팽하게 서로를 끌어당기고 있었다. 잠깐의 정적마저 싫었던 걸까. 눈을 끔벅거려 아라는 진호를 밀어냈다.

"동선이 겹치길래 나침반이 되었으면 했는데. 엔딩 요정은 맞지만 원픽은 아니라서."

"여태 건네지 않고, 왜?"

"궁금하지 않아요? 내 원픽?"

"두 번 죽기는 싫은데."

아라의 맑은 웃음소리가 퍼져 그들 주위를 맴돌았지만 진호를 물들이기엔 역부족이었다.

"현재는 여행객이지만 돌아가면 백수 될 테고, 나이는 같아요."

"당신 차례네요. 내가 원한 답 아직이라."

테이블 위 맥주병을 만지작거릴 뿐, 정작 입을 꾹 닫은 아라를 보는 것이 답답했는지 진호는 맥주병을 들어 연거푸 들이켰다. 꿀꺽 넘기는 소리와 함께 진호의 목울대는 경쾌하게 움직였지만 아라의 입은 요지부동이었다. 작정이라도 한 듯 말이다.


"대동강은 아니지만.."

손에 든 캔맥주를 한 모금 넘긴 아라는 베키오 다리 아래로 유유히 흐르는 아르노강에 시선을 떨구었다. 그러고는 'sono solo nella strada, insieme a te, inseime a te',, 나지막이 읊조렸다. 빤히 바라보는 진호의 까만 눈동자가 일렁였다.

"<senza luce>, '빛도 없이',, 어두운 밤 혼자인 줄 알았는데 당신이 있었어요. 제목이 딱 내 심정이었는데 노래 듣고 위로받았어요. 그렇게 알게 되었어요. 클래식도, 성악가 김진호 씨도. 잠 설칠까 봐 자진 납세하는 겁니다."

"취중 진담은 아니고?"

"듣고픈 답일 텐데. 분명."

으르렁대는 아라를 진호는 피하지 않았다.

"뭐,, 그럭저럭은. 연습하는, 무대에 선 내내 편치 않았어서. 깡맥주 해로우니 안주하던가."

캔맥주를 한 모금 삼킨 진호의 미간이 꿈틀 했다.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드러나는 그 모습을 아라는 놓치지 않았다.

"tv속 세상은 'another world'라더니 많이 힘들었나 봐요. 찡그리는 거 봤어요."

"그게 아니라 재주는 네 명이 부려도 꽃다발은 늘 막내 차지라. 그 생각이었는데."

순간, 아라는 진호의 오디션 무대를 복기했다. '크로스 오버 남성 4중창 결성 프로젝트'를 목표로 한 국내 방송사의 서바이벌 경연 프로그램이었다. 예선, 본선을 통과한 결승 진출자 총 열두 명이 다시 세 팀으로 나뉘어 최종 순위를 가리는 방식이었다. 결승 무대에 선 진호가 속한 팀은 프로듀서 점수에서 줄곧 1등이었으나, 현장 투표에서 뒤짚혀 최종 2위의 성적을 거뒀었다. 막내라면? 준수한 외모덕에 배우 해도 먹히겠구나 했던??.. 이왕이면 다홍치마라지만..

"예체능의 1순위의 뭐니 해도 재능이라고. 그렇다고 그의 실력을 폄하하는 건 절대 아니에요. 어설픈 지식도 그렇지만,, 바리톤은 취향 아니라서.."

"본인은 깜냥 편든다 해도, 엎드려 절 받는 기분이니, 그만해요."

아라를 놀라게끔 하는 진호의 재주는 비상했다. 진호는 입꼬리를, 아라는 눈꼬리를 한껏 올려,, 따로 보면 어지러운 모양새였으나 한데 뭉쳐 놓으니 제법 균형이 맞았다. 신기하게도 말이다.

"문과는 선택이지만 예체능은 필수 아닌가요? 유학,, 말입니다."

꾸짖듯 말하는 아라를 진호는 빤히 바라보았다.

"그렇잖아요. 막내도 유학파던데. 당연시되는 커리어인 동시에 간판이잖아. 우리가 어떤 민족입니까? 자격증, 간판에 혹하는 족속 아니냐고. 좀 다른 얘기지만 우리 때랑은 달리, 개근상과 부모의 무능력함을 동일 선상에 놓던걸. 웃픈 얘기지만 추세가 그렇더라는."

다소 민감한 주제였다. 호기롭게 말은 뱉었지만, 아라의 눈동자는 조금 떨리고 있었다. 그러나 진호는 빤히 바라볼 뿐, 이렇다 할 추임새 하나가 없었다.

"아까데미아 미술관 가는 길에 잠시 발 풀었던 미색 페인트의 아치형 나무문 기억해요? 이탈리아 국기랑 유로연합 깃발 사이좋게 걸려있던,, 실은 거기 피렌체 국립음악원이거든. 귀띔해 준 선배는 분명 그 학교 출신일 테고, 겸사겸사 다비드 보러 가자한 거예요. 남의 남자 뭐 좋다고 두 번씩이나 봐요. 돈까지 내면서. 안 그래요?"

"나무 말고 숲이라? 확인하고 싶었구나."

"베네치아도 로마도 아닌 피렌체가 출발점이라길래 직업적 특성을 고려한 결과, 방점은 피렌체 국립음악원이구나 싶었는데, 동요도 감흥도 없길래, 여행이 맞구나 그랬지."

"그걸 왜 신경 쓰지? 혹 각인될까 싶어?"

"빈정거리기는. 위로받았다 했잖아요. 애써 적은 노트 대신 가이드한 보람도 없게."

"학교 선배 아닌 그냥 아는 형이에요."

아차 하는 아라의 속마음이 툭- 비어져 나왔다. 숨을 틈도 없이 말이다.

"가이드하랴, 딴생각하랴, 조그만 머리가 열일했네요."

이제 막 뚜껑을 연 사이다처럼 흩어지는 진호의 웃음소리는 청량했다. 그러나 벌어진 손가락 틈으로 머리카락을 한 움큼 잡아채어 어지럽게 흐트러트리는 아라를 못 본 척할 수 없는지 황급히 웃음을 지웠다.

"결국, 고맙다는 말인데.."

자신이 없는지 진호는 말끝을 흐렸다.

"그 정도에 흔들릴 짬은 아니라 자신했는데. 내 자만심이 결국,, 마음을 바꾸게 했네요."

"무슨?"

보일 듯 말 듯 애써 감정을 감추는 아라와는 달리 보란 듯이 표출하는 진호였다. 그 모습이 어두운 밤, 그곳에 박힌 빛나는 별처럼,, 사뭇 대조적이었다.


"양심은 있네. 다행히도. 고해성사 맛집은 성당이지. 암."

"꽁하기는. 참."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할 소리는 아니지. 그러게 뜸은 왜 들여. 밥도 아니면서..로, 마, 동, 행."

"어?? 어!!"

손에 쥔 떡이라서? 본디 제 것인 양 마지막 네 글자를 끊어 읽으며 투덜대는 진호의 면전에 대고 걸음을 좁히며 아라도 물러서지 않았다. 마치 날이라도 잡은 듯 말이다.

"쓸데없는 오지랖이 발목을 잡았네. 이제 와서 발 빼기는 치사해 보이고. 참."

이미 뱉은 말이었고 엎질러진 물이었다. 여행지에서 동행이란 흔히 있는 일, 길어야 열흘 정도가 아닌가. 혹이라 여기면 혹, 득이라 생각하면 득일 것이니 결국, 마음먹기에 달려 있었다. 복잡한 속사정이 아라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났나 보다. 급히 입을 연 진호에게선 좀 전의 기세등등함은 조금 사라진 듯했다.

"성당을 지척에 두고 이게 웬 말입니까! '온 땅 위에 평화가' 몰라요? 리액션이 과했다면 사과할게요."

물이 포도주로 변하는 성령의 역사가 임재라도 한 것처럼 성난 진호를 온순한 양으로 변하게 하는 단테 성당 앞이었다.


네모난 회색 석판에 붉은색으로 새겨진 CHIESA DI S MARCHERITA - DETTA, 그 아래로 강조하려는 의도가 다분한, 해서 한층 더 선명하게 파여있는 CHIES A DI DANTE, 연이어 적혀 있는 영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번역해 보니 결국, 하나였다. 단테와 그의 어머니가 기도하던 성당이며 베아트리체를 만난 곳이기도 했다. 아홉 살의 단테는 여덟 살의 베아트리체에게 첫눈에 반하지만 그저 먼발치에서 바라만 볼 뿐, 성당 내부에 이들의 만남을 고스란히 설명하는 그림이 걸려 있는데, 그림 속 장소는 성당의 입구로 보이며 후대에 화가의 상상력에 의한 결과물로, 그로 인한 장성한 인물의 묘사는 몰입도에 다소 방해가 되나, 한 발 앞선 채 어깨너머로 훔쳐보는 빨간 상의를 입은 남자는 틀림없는 단테였다. 성당 내부, 베아트리체의 결혼식을 묘사한 또 다른 그림 속에서도 빨간 옷차림의 단테는 등을 돌린 채 서 있었다. 현실뿐 아닌 화가의 상상 역시 단테의 그림자 사랑을 그리기에 바빴고, 후대는 그를 추앙하고 더불어 마음속의 연인을 흠모했다. 간절한 사랑이 이루어진다는 속설 때문일까? 베아트리체의 무덤 곁, 얼기설기 엮인 바구니 안의 수북한 편지 뭉텅이,, 그렇게라도 붙잡고 싶은 나약한 마음의 민낯만 같아 감탄사 대신, 입구가 열린 채 공중을 떠도는 풍선 몸사위 같은 힘없는 소리가 아라의 입에서 새어 나왔다.

"들이마셔야지."

바구니 안의 편지를 가리키며 장난을 거는 진호를 향한 아라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신곡까지는 기대 안 해요.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러브스토리는 알 테고, 로미오와 줄리엣, 로댕과 까미유끌로델, 윤심덕과 김우진의 그 러브 라인과 같은 선상이라. 굳이."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한 사람은 노래로, 다른 사람은 책으로,, 소득 큰 아픔이었으니 결국."

고개를 돌려 주위를 살피던 진호가 아라에게 몸을 기울였다.

"외국 사람뿐이라 다행."

양팔을 감싸 쥐며 억지 놀란 척하는 진호의 연기가 그럴싸했다.


<단테와 베아트리체는 이곳 마가렛 성당에서 1302년 만났다.

비록, 베아트리체는 다른 사람과 결혼했지만 단테에게 영감을 불어넣어 준 사람이었고, 이곳에 잠들었다.

마가렛 성당 대신 단테 성당이라 이름 지어진 것은 이곳이 그의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생활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성당을 둘러봐서일까? 단테를 조금 엿봐서일까? 성당 입구 나무 액자 안의 알 수 없던 글자들이 드문드문 눈에 들어왔다.


성당을 뒤로하고 지척에 있는 단테 생가로 향하는 길, 그의 얼굴 윤곽이 새겨진 돌바닥에 한차례 물을 끼얹자 그 형체는 더욱 또렷해졌다. 이제 막 인화를 마친 사진처럼 말이다. 이정표 삼듯 그렇게 그에게로 이끌려갔다. 건물 외벽에 걸린 붉은 현수막과 청동 흉상이 버선발로 맞이하는 곳,, 'MUSEO CASA DI DANTE' 앞에 늘어선 사람들의 시선이 쏠린 곳에 붉은색 차림의 행위 예술가가 있었다. 해석은 불가능했지만 장소가, 손에 들린 책을 설명하고 있었다. <신곡>이라고,, 운수 좋은 날이었다. 베아트리체라도 되는 양, 아라는 그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확실한 거예요?"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 추정이 아닐까요? 근거에 의한 추정.. 베키오 다리와 산타트리나타 다리를 두고 여전히 팽팽하지만 만난 게 중요한 거지. 다리 따위가 뭐라고. 그럼에도 베키오 다리는 아닐 거라는."

"왜?"

"지금이야 금은보석들로 번쩍번쩍하지만 한때는 가축들의 피 비린내가 낭자했으니. 생각해 봐요. 그 옛날 귀족 가문의 여성이, 것도 시집도 안 간 처녀가 그 험한 거리를 걸었을까요?"

"말 되네요."

"단테 생가 역시 그런 추정이라는."

"건물 벽에 흉상 하며 현수막은? 배우가 암송한 건 <신곡> 맞다면서?"

"안타깝게도 그걸 입증할 사람은 없지만, 그 배우는 팩트, 따순 밥 먹고 흰소리 지껄일 모질이처럼은 안 보여서."

"뭔가 단단히 엮인 느낌인데."

"열여덟 살의 단테는 열일곱 살의 베아트리체와 다시 만나요. 이 다리에서. 정확히 구 년 만입니다. 단단히 엮이지 않고서야 어디 그럴까."

"어~."

"어찌 됐든 오늘은 행운이 가득한 날. 배우 만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라던데."

산타트리나타 다리에 등을 기댄 채 베키오 다리에 시선을 걸친 아라를, 몸을 틀어 어깨너머로 바라보는 진호는 긴가민가한 눈치였다. 그런 그들의 모습이 성당 안,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첫 만남을 묘사한 그림 속의 구도와 묘하게 닮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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