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9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by 슈크림빵

콜로세움 외부, 듬성듬성 놓인 야트막한 돌난간은 빈자리 하나 없이 여간 고생이 아니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말이다. 한데 모인 사람들 틈을 비집고 아라와 진호 역시 지친 몸을 슬며시 내려놓았다. 지척의 호객꾼은 그 옛날 로마 병정의 모습을 완벽히 재연한 채 손에 쥔 칼을 힘차게 흔들어대며 투구 아래 반쯤 드러난 눈으로는 연신 먹잇감을 찾아대고 있었다. 그가 성큼성큼 걸어오자 아수라장까지는 아니었지만 일대 혼란을 야기시켰고, 예상을 뒤엎지 않고 여행이 처음인 미국인으로 보이는 앳된 청년 무리가 타깃이 되었다. 화투판에 그런 말이 있다지. '이 판에서 누가 호구인 줄 모르면 바로 당신이 호구다'.. 눈 뜨고 코 베이는 것도 모른 채 그들은 호기심과 설렘을 적당히 담아 로마인과의 사진 촬영에 기꺼이 응한다. '콜로세움을 배경 삼아 로마 병정과 사진이라니' 하며 amazing!!이라 외칠 테니,, 아니나 다를까 몸짓과 표정은 그런 감정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었으나 함께한 로마인만이 이 상황을 즐기지 않을 뿐이다. 이어질 시시비비에 관심 두지 않으려 재빨리 눈을 돌리다 청년들을 주시하고 있는 진호의 옆얼굴이 아라의 눈에 들어왔다. 조금 전의 찜찜함을 날릴 수 있는 기회다 싶었는지 아라의 입술이 성급히 벌어졌다.

"지갑, 뚜껑 열리는 건 한순간이니 낚이지 않는 게 상책입니다."

"세상 제일 재미난 게 불구경, 싸움 구경."

케케- 까지는 아니었지만 묵은 감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괜한 말이 불씨 될까 싶어 아라는 입을 닫았다.

".. 이라지만, 그거 아니라 어느 나라 사람일까? 하는.. 외국 사람 보면 그게 제일 궁금해. 감탄사 연발하는 거 보면 미국인이겠죠?"

괜한 걱정 했다 싶어 아라는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막후의 그 마음을 조금 알아챈 것도 같아 조그만 숨을 내쉬다 급히 멈췄다. 거대한 콜로세움을 배경 삼아 몸을 반으로 접은 탓에 남들 눈엔 자그맣게 보일지 몰라도 아라의 눈엔 그리 보이지 않았고, 새삼스런 그 사실은 그녀로 하여금 진호에게서 재빨리 눈길을 걷어 익숙한 콜로세움으로 던지게끔 했다.


"로마의 일곱 언덕 중에."

"로마의 일곱 언덕 도장 깨기는 아닐 테니, 난 마음 놓습니다."

"갑자기 그러고 싶어지네."

깔깔- 소리 내어 웃는 아라의 모습이 싫지 않은지 진호는 말없이 바라보았다.

"올려다보는 거지 오르는 게 아니다~. 산에 대한 내 철학이니 그건 걱정 말고."

"오늘 들은 얘기 중 제일 반가운 소리."

모처럼 만에야 두 사람이 거짓 없이 웃었다.

"로마의 일곱 언덕은 잠시 두고, 경치나 감상합시다. 높은 곳에 올라오니 바람도 공기도 그저 좋구려."

풍류 시인이라도 된 양 진호는 한껏 감정을 담아, 속마음마저 숨기지 않았건만 그 수에 말려들 아라가 아니었다.

"콜로세움 - 포로로마노 - 필라티노 언덕 통합권, 오늘 안에 돌아보려면 일곱 언덕 브리핑이 시급한데. 나만 급한가?"

"몰아 본다 한들 콜로세움만 각인될 거 뻔한 사실, 그니까 쉬엄쉬엄 합시다. 급발진은 사고로 가는 지름길."

커다란 손을 움직여 진호는 연신 부채질을 해댔다. 5월 초순이었으나 콧잔등에 땀방울이 송글 맺혀 있었다. 경사가 완만한 언덕길을 조금 올라왔을 뿐인데 말이다. 반쯤 아래로 티투스 개선문이 내려다 보이고 고개를 돌리니 콜로세움이 맞닿아 있었으며 어깨너머로 던진 시선에는 포로로마노가 틈 없이 걸려있었다. 해서 덮어놓고 편들 수 없을 만큼의 어정쩡한 높이였다. 지구 온난화가 고온 다습한 로마의 날씨에 부채질을 해댄 것이리라. 하긴 지금까지도 몰랐던 일곱 언덕을 이제 와 안다고 해서 그의 삶에 어떤 방향성을 일으키겠는가? 이런저런 연유들이 생각을 붙들어 오자, 진호의 부채질 삼매경을 그냥 놔두기로 했다.

"신화나 설화는 팩트인가!! 곰이 마늘을 먹고 여자가 되고, 사람이 알에서 태어나고. 여전히 미스터리하지만 여기 동네는 사정이 좀 달라. 문화적 차이인가?"

한숨 돌린 탓에 한결 맑아진 표정으로 진호는 뜬금없는 얘기를 뱉었다.

"들어 봐요.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후에 로마 건국 시초가 되었다는, 또 다른 신화에 의하면 헤라클레스와 괴물 간의 전투가 벌어졌고 헤라클레스가 괴물을 몽둥이로 세게 내리침에 언덕의 한 귀퉁이가 무너지며 경사로가 생겼다는,, 후에 필라티노 언덕에 계단이 생겼을 때, 그 괴물의 이름을 붙여 <카쿠스의 계단>이라 불렀다고, 아까 우리가 올라온 그 경사로,, 구전되는 신화지만 그냥저냥 납득이 가잖아."

타고난 이야기꾼인 양, 목소리와 표정이라는 장치를 극대화시켜, 진호는 아라를 끌어당기려 했다.

"견훤을 치러 나주로 향하던 왕건은 우물가에서 한 처녀를 만나요. 물을 원한 왕건의 청에 여인은 버들잎을 띄운 두레박을 건네며 천천히 마시라는 말을 덧붙이죠. 이에 감동한 왕건은 여인을 탐하여 종내 범하였고, 복잡한 상황을 피하기 위해 돗자리에 사정을 하였으나, 여인은 기어코 그것을 삼켜 임신을 해요. <고려사>에는 분명 '여인이 정액을 입으로 삼켰다'라고 기록되어 있어요. 후에 여인은 왕건의 두 번째 부인 장화황후가 되고, 2대 왕 혜종은 이렇게 세상 밖으로 나옵니다. 얼굴에 돗자리 무늬 같은 흉터가 있어 주름살 임금님이라 불리었다죠."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아라가 당긴 불씨는 타닥타닥 소리를 내며 경쾌하게 타올랐다. 데인 듯 벌겋게 달아오른 채로 진호는 잠시 멈췄던 손부채질을 다시 시작했다. 전보다 조금 빠른 속도로 말이다.

"교양 수업으로 들었어요. 납득이 안 될 뿐만 아니라 쉬이 입에 담을 수 없는 저속한 표현들도 허다했지만은,, 능청스러운 것도 모자라 눈알을 뒤룩뒤룩 굴려대고, 눈썹을 치뜨고,, 학부형이었으면 또 몰라. 곧 죽어도 총각이라 우기는 음흉스러운 늙다리 강사님의 이야기에 흠뻑 취한 나머지, 한 번은 눈이 마주쳤는데 히죽- 웃잖아. 해서 후다닥 시선을 돌렸지만 어찌나 부끄럽던지,, 타고난 성정이 우물가의 처녀만큼 대담하지 않아서일까.. 지금 당신 표정이 그때의 나와 같을 테지."

문장과 문장 사이 부러 간격을 벌리며 마침표까지 완벽하게 찍어대는 아라와는 달리 진호는 혼자만 가시방석인 듯했다. 손부채질은 느려졌으나 벌건 얼굴은 여전했다. 보는 시각에 따라서는 한 잔 제대로 걸쳐 쉴 곳을 찾은 취객처럼 보이기 십상이었다.

"그러게 왜 우리 것을 함부로 해. 말도 안 되는 사건, 사고들은 비단 과거뿐 아닌 우리가 사는 세상에도 비일비재한 것을."

팔뚝 위에 가부좌 튼 모기처럼 아라의 목소리는 따끔했다. 허둥대는 진호의 손과 달뜬 낯빛의 모양새를, 고소하다는 듯 아라는 빤히 보았다.


한낮이 지나 조금 기울어진 해는 우뚝 솟은 돌기둥 언저리에 걸려있었고, 쏟아지는 빛을 이고 진 돌무더기에서는 아지랑이가 끓어대고 있었다. 한창은 아니었지만 포로로마노 역시 더위와 씨름 중이었다. 막힌 곳 하나 없이 뻥 뚫린 공간이었지만 한증막을 연상시키는, 달궈진 돌 위에 날계란을 올리면 칙- 소리와 함께 달걀 프라이쯤은 너끈할 듯한,, 말도 안 되는 상상이었지만 웃을 힘조차 나지 않았다. 갑작스러운 더위는 그만큼 그들을 무기력하게 만들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포로로마노부터 볼 걸, 나름 굴린 머리가 발목을 잡을 줄이야."

"인간사 계획대로만 된다면 그건 재미없잖아요."

가톨릭의 고장에서 이 무슨 목탁 두드리는 소리란 말인가!! 어이없음에 헛웃음도 나오지 않는 아라였다. 더위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기에 빠른 퇴근만이 상책이다 싶어 아라는 꼼수를 꺼내 들기로 했다. '하긴 액설런트 인 플라이트도,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100곳도,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곳도 아닌, 로마 고대 유적지 중 하나일 뿐'.. 꼬인 마음이 활짝 고개를 들어 유혹을 해대자, 이에 눈을 질끈 감으며 못 이기는 척하기로 했다.

"여기서 퀴즈,, 폐허인 듯 유물인 듯한 저 돌기둥은 총 몇 개일까요? 상품 있어요."

이만하면 구미가 당기겠다 싶었고, 호기롭게 던진 그물에 진호는 빤하게 걸려들었다.

"정답!! 열여섯 개."

자신감은 통,, 정작 답은 불통이었다.

"내리꽂는 직광으로 인해 정신줄 똑바로 붙잡지 못한 거 감안해 한번 더."

"열다섯 개?"

의기소침한 목소리였지만 돌기둥에 고정한 채 수를 셈하는 그 시선만은 끈덕졌다.

"열네 개."

"어떻게?"

튕기듯 아라는 물었다.

"하나, 저기 둘, 돔건물 세 개."

"잠깐.. 분명히 돌기둥이라고."

딱 자르며 아라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렇다면 엄청 높은 네 개. 그리고 붉은 아치 세 개, 그에 붙은 거 여섯 개. 끄트머리에 한 개."

"저건.."

진호의 손가락 끝에 시선을 고정한 아라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저건 아닌데."

"돌기둥 맞는데."

잡고 있는 줄을 놓아 버릴 마음이 없는 듯 그들은 팽팽하게 맞섰다. 점점 가해지는 힘에 의해 혹 끊어질까 싶어 아라는 선수를 쳤다.

"보는 시각에 따라 그럴지도. 그치만 저건 열외라서."

들고 있던 노트를 슬쩍 밀고는 이내 아라는 먼 산 보듯 했다. 둘러봐도 산 그림자 하나 없는데 말이다. 자신 없다는 무언의 몸짓이려니..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어지간한 그 진호가 눈알을 크게 굴려댔다. 그러고는 흥- 하고 콧바람을 세게 내어 보내자 아라 역시 지지 않았다. 날이라도 잡은 듯 말이다.

"진짜 이런 얘기 안 하려고 했는데, 이번 로마 일정은 책 없이, 본능과 감성의 오롯한 콜라보였는데 객식구와의 동행으로 본의 아니게 공부를 했네요. 포로로마노의 어원과 공동체 생활 가능한 로마 공회장이었다는 한 문장으로 요약이 가능한 이 설명을 굳이 꾸며주는 말, 덧붙이는 말, 이어주는 말, 쉼표, 따옴표, 느낌표까지 무분별하게 집어넣어 글자수를 늘리기는 했어도, 정작 저 돌기둥에 대한 디테일한 설명은 쉬이 찾을 수가 없기에, 부러 돈과 시간 들여 가면서 조사를 했다는,, 것도 돌기둥 사진과 설명을 매치시키느라 스크롤바를 올렸다 내렸다 그러면서.."

마치 만화 스크립트처럼, 그림과 그 아래 나열된 글자들,, 세어보니 그 합은 열세 개였다. 노트 한 번, 돌기둥을 또 한 번 보았지만, 진호의 눈에는 하얀 건 그저 종이요, 까만 건 글씨였다. 결국 온전치 않은 열세 개의 돌덩이일 뿐, 아무런 감흥도 없었다. 고개를 들어 바라본 아라는 성난 망아지 같았다. 거짓 없이 말하자니 발길에 마구 차이는 건 기정사실, 시간을 벌 겸 노트에 고개를 떨구고는 머릿속의 회로들을 재촉했다.

"저기 가운데 여덟 개 돌기둥의 주축이 되는 크고 높은 거, 저게 사투르누스의 신전, 기원전 497년 건축되었고 주피터와 그의 아버지인 땅과 농업의 신, 사투르누스에게 바쳐진 신전으로 국가의 중요한 보물들을 보관했다는.."

진호의 시선은 사투르누스의 신전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즈음을 바라보며 아라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다는 게 맞겠지. 자고로 싸움이란 당겨진 불씨에 기름을 부어야만 커지는 법,, 기름을 끼얹는 대신 납작 엎드린 진호의 궁여지책은 그런대로 통했다. 피부에 와닿는 공기는 수그러들지 않고 여전히 지글대고 있었지만 아라의 분별력까지 앗아가지는 못했다. 꼭꼭 감춘 진호의 마음 한 자락을 엿본 아라는 발을 비비적거려 곧바로 불씨를 잠재웠다.


포로로마노에 걸린 해를 피해 콜로세움의 지척, 소나무를 그늘막 삼아 덩그러니 놓인 돌난간에 아라와 진호는 털썩 주저앉았다. 눈서리를 이겨내는 사시사철 푸른빛의 강인한 노목은 곧은 절개와 굳은 의지의 상징뿐 아닌 장수의 상징,, 그치만 눈에 익은 그 소나무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기다란 기둥 위에 솜사탕 뭉치를 얹은 것도 같고 가늘고 긴 다리에 몽실거리는 둥근 엉덩이를 가진 타조 같기도 했다. 가지치기를 해주어서일까? 20-25미터의 나무 기둥에 다복솔이 퍼진 모양새로 그 모습이 우산 같다 하여 우산 소나무(pinus pinea)라 불리기도 하는데, 이는 고온 다습한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의 영향 때문이라 했다. 콜로세움, 캄피돌리오 광장, 바티칸 시국의 주요 유적지뿐 아닌 거리 곳곳에서 쉬이 만날 수 있는데, 우산 그늘 아래 잠시 쉬었다 가라는 마음에서는 아닐는지,, 혼자만의 상념에 빠진 아라를 그대로 두기 싫었나 보다.

"로마의 소나무는 이 사람에 의해 더욱 유명해졌는데, 누구일까요?"

퀴즈와는 담쌓은 듯 앞뒤 없이 몸통만 툭- 던지는 진호의 태도는 매우 서툴렀지만, 아라의 입을 통해 오답이 나오리라 확신했다. 해죽- 웃는 모양새는 그리 말하고 있었다.

"래시가드, 레스토랑? 네 글자인데.. 분수, 소나무, 축제 3부작 중 두 번째 곡이며 총 4악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보르게세, 카타콤베, 아피아가도, 나머지는 남부 어디던데.. 아무튼 이 네 곳의 소나무를 묘사한 거잖아."

"어디, 학원 다녀요? 말 되게 잘하네."

성난 콧김을 뿜어내고는 이내 등을 돌려 버렸다. 널찍한 진호의 등이 말했다. '적당히 해'라고.. 장난기가 발동한 아라의 손가락은 진호의 등을 파고들었으나 이에 아랑곳 않고 그는 몸서리를 치며 등을 틀어 최후통첩을 날렸다. '건드리지 말라고'.. 점만 한 것이 어느새 동그라미가 되고, 성난 파도는 깨어져 물거품이 되는,, 남녀 사이 역시 이렇듯 종잡을 수 없는 거라지. 해서 아라는 더 이상 문제 삼지 않기로 하고 눈을 들어 소나무를 바라보았다.


두 사람 사이에 애매한 기운을 드리운 장본인은 이탈리아의 작곡가 오토리노 레스피노,, <로마의 분수>, <로마의 축제>와 함께 로마 제국에 대한 향수를 묘사한 교향시로, 1924년 작곡한 <로마의 소나무>는 3부작 중 두 번째 곡으로 가장 유명하다. 총 4악장으로 구성되었으며 1악장은 밝은 낮에 로마의 보르게세 공원의 소나무 숲에서 노는 아이들의 모습을, 2악장은 소나무의 그림자가 입구를 뒤덮은 산 칼리스토의 카타콤베를, 3악장은 보름달의 빛을 받아 빛나는 소나무가 있는 로마 남서부의 자니콜로 언덕을, 4악장은 소나무가 길게 늘어선 '모든 길은 로마롤 통한다'의 그 아피아 가도를 행군하는 고대 로마 군대를 묘사한 것으로, 이들 네 곳의 소나무라는 자연을 통해 로마 제국의 향수를 담으려는 것이 작곡가의 숨은 의도였다.

"상품이 꼴랑 셰이크라니."

"아사 직전에 구해줬더니 보따리 타령이 웬 말이래? 운도 떼지 못한 열두 개의 돌기둥 조우하러 갈래요? 퇴근 무렵의 해님이라 화력과 농염미가 가히 절정일 텐데."

터가 문제인가? 오랜 침묵 끝에 진호는 활시위를 잡아당겼지만 화살은 멀리 가지 못하고 바닥으로 고꾸라졌지만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없이 셰이크만 빨아대는 진호의 모양새는 싫다 싫어를 여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아무리 로마의 시작점이라 한들 콜로세움 앞에선 한없이 작아지는 존재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는. 하긴 이런 형태였겠지~, 그런 목적이었을 테지~, 덩그러니 놓인 돌덩이를 보며 가정을 왜? 구태여 상상을 또 왜?? 감히 콜로세움을 제쳐두고!!!"

"기원전 8세기, 정착한 사람들로 주거지가 형성되었고 이후 부유한 로마인들의 고급 주택지가 되었으며, 아우구스 황제가 지은 황궁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필라티노라는 이름에서 궁전(place)이 유래된 것이라는,, 굵은 글씨로 강조한다 한들 로마의 몰락과 함께 점점 폐허가 되어, 황제의 저택과 고급 주택지 등의 발굴 작업이 진행 중이라는 게 현주소인 것을. 묶어서 파는 이유가 있었네."

메마른 아라의 목소리 위로 거친 진호의 목소리가 덧입혀졌다. 쭉- 들이킨 셰이크는 갈증 해소는 고사하고 심심찮은 보상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게 했나 보다. 심드렁한 표정뿐 아니라 슬며시 자리 잡은 실주름은 그런 속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 모습에 휘둘리지 않고 아라는 말을 이었다.

"터뿐인 건 진즉에 알고 있었지. 막상 눈으로 봤지만 그럼에도 짐작도 안되더라는, '과연 여기에 성이? 존재했을 리는 없다.'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빙 돌아 한참을 올라온 보람은 고사하고 목덜미의 땀마저 시위하더라는. 결국 니스 성터에서 꼬따쥐르(cote d'azur) 해변을 배경 삼아 사진 한 장 건졌다는. 포인트는 니스 성터보다는 평탄했으니 불평 말라는."

필라티노 언덕을 짚어 가리키며 차분함을 잔뜩 입힌 아라의 말주변이었지만 불통이었다.

"석탑 두 개만 덩그러니 남은 감은사나, 화재로 터만 남은 황룡사나, 자연재해, 화재, 도난, 외세의 침입 등의 갖가지 이유로 소실되는.. 콜로세움 역시 1/3만 남아 있듯이, 즉 후대의 누군가는 필라티노 언덕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으로 콜로세움을 대할 테지."

"그럴 리가요. 로마 방문 이유는 콜로세움,, 정신이 똑바로 박히고서야 무너지는 꼴을 어찌 보나. 한 해 객단가가 얼마인데. 로마에 성당이 몇 개인 줄 알아요? 자그마치 500개가 넘어요. 로마에 성당이 많은 이유는.."

"그야 가톨릭의 뿌리니."

제동을 걸 듯 아라는 크게 콧방귀를 뀌었다.

"혹여 문화유산 어찌 될까 낮을 밤 삼아 밤을 낮 삼아 무릎 꿇은 신부님의 기도에 하나님이 응답하실 테니. 요는, 당신 살아생전에 그런 일은 일어나지도 않을 테니. 죽고 나서야 세상이 불타던 그로 인해 망하던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더위 앞에 장사 없다더니,, 이들이 그것을 증명할 줄이야. 진호가 시작한 허튼소리는 멀리 가지 못하고 아라에게 착 붙었다. 그들은 서로 말이 없었다. 일부러 입을 닫은 게 아닌 대꾸할 기력조차 몽땅 사라진 모양이었다. 시원한 바람 한 점이면 아니 서풍의 신 제피로스의 조그마한 입김 한 번이면 쓸데없는 이 열기도 한 김 식으련만, 허투루 하는 얘기가 내심 못마땅했는지 바람마저 머물기를 거부한 채 그들 곁을 빠르게 지나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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