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11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by 슈크림빵

"교황님만큼이나 알현하기 힘든, 아이스 아메리카노.. 제가 또 준비했습니다."

"우와!!"

건네받은 페트병을 야무지게 흔들어 들이켜고는 모자랐는지 다시금 벌컥거리는 그 모습을, 밥상머리에 앉은 자식 보듯 아라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커피는 언제? 얼음은 또 언제?"

"원두는 타짜도르, 물은 이탈리아산. 원산지 표기는 장사의 원칙, 테스트도 무사히 통과했으니."

진호는 연신 쿨럭- 거렸다. 웃음을 참는 건지 아님 사레라도 들린 것인지 도통 알 수 없게 말이다.

"이 한 병의 커피를 만들기 위해 바리스타는 밤새 부산했다는. 얼음 얼리느라, 손 탈까 보초 서느라, 눈 비비고 일어나 커피 추출하고 또 제조하고, 모카포트는 왜 있어가지고, 남 먹는 거 왜 쳐다봐서는, 그게 또 눈에 들어와서는."

"사실이었네."

"무슨?"

"뭘 잘 못 잊는다는 말. 부러 곱씹을 줄이야. 앞으로는 조심해야겠어."

알 듯 모를 듯한 진호의 말이 귓가에 맴돌자 딱히 할 말이 없는지 아라는 입을 꾹 닫아버렸다.

"이봐. 또 또. 불쑥 심각해지고 문득 곱씹지 말라고. 그런 사람이 여행지에서의 깜냥 일탈?"

어림도 없다는 듯 진호는 고개를 저어가며 흐응- 하고 콧김을 내보냈다. 농담 반 진담 반 툭 던져진 진호의 교묘한 말에 아라의 마음속에서는 파문이 일었다. 잘게 일던 물결은 점차 커다랗게 원을 이루어 걷잡을 수 없이 번져갔다. 더는 안 되겠던지 급히 가슴께를 누르자 손바닥에 와닿는 진동은 작았으나 분명 쿵- 심장이 뛰어대고 있었다. 아는지 모르는지 진호는 페트병을 움켜쥐고 한 입, 또 한 입 들이켜고 있었다.


"취향이라면 내 알 바 아니지만 수려한 외모 뒤로 고약함이 다분해. 탱크 몰고 온 이쁜이라고."

물음표였던 진호의 눈은 이내 마침표를 찍으며 시원스레 웃어 젖혔다. 마치 목울대의 기능을 시험하기라도 하듯.. 요는, 아라의 라운지 행을 부탁했던 금발의 미녀를 지칭하는 것일 테지. 공동 주방 옆 자그마한 공간, 제 기능을 조금 상실한 움푹 들어간 소파, 박힌 못이 틀어졌는지 좌우 대칭이 맞지 않아 삐그덕거리는 나무 의자, 해서 거들떠도 안 볼 것 같은 가구였지만 실상은 반대였다. 푹 꺼진 소파는 고사하고 낡은 나무 의자를 사수하느라 여간 비지땀을 흘린 게 아니다. 진호의 한쪽 어깨가 지나치게 올라간 것은 전리품을 향한 정복자의 품위처럼 보일지 모르나 실상은 감싸 안은 의자를 사수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

"쎄쎄쎄 하자는 건 아닐 테고. 야심한 밤에 불러낸 이유는 뭔지."

대답 대신 진호는 주머니에 손을 넣어 부스럭대며 꺼낸 것을 아라의 무릎 위에 슬며시 올려놓았다. 다름 아닌 박카스와 우루사,, 코카콜라를 처음 본 부시맨처럼 아라 역시 바라만 볼 뿐, 그 모습을 놓치지 않고 다시금 부스럭대더니 이번엔 꺼내 놓은 것은 박카스맛 젤리였다.

"뭘 좋아할지 몰라서. 아이스 아메리카노에 엄청 감동한지라, 고맙다는 말만으로는 안 되겠어서."

"고마운 마음만 받을게요."

그러고는 그 모두를 진호 쪽으로 밀었다. 이에 진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오른쪽 팔 주무르던 거 여러 번 봤어요. 아프니까 청춘이니."

"꼬마 때 부러졌어요. 피곤하거나 날이 궂거나 하면 으레 그런다는. 아마도 내일은 비가 올 듯."

싱거운 아라의 말투와는 달리, 진호는 몸을 내밀며 틈을 좁혀왔다.

"쥤다 뺏는 그런 모질이는 아니라. 내 손 떠난 거니 알아서 해요."

그러고는 내내 마주했던 의자를 뒤로 빼며 아라의 사정권 안에서 벗어났다. 손을 뻗어도 닿을 수 없게 말이다. 고국의 맛을 눈으로 먹기라도 하듯 아라는 무릎 위로 시선을 떨구었고, 그 모습을 진호는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할머니들의 일기 예보가 적중하듯 아라의 관측력 또한 남달랐다. 후드득 자신의 존재를 알리던 새벽녘의 빗방울은 오전이 되니 그 세력이 거세졌다. 요동치는 장기의 아우성을 더는 두고 못 보겠던지 꼼지락대던 발가락은 태도를 바꿔 단번에 이불을 걷어찼다. 도착한 공동 주방 안, 낯선 토스터기 앞 낯익은 모습의 아라를 향해 한걸음에 다가가 어깨를 툭- 건드리며 진호는 자신의 등장을 알렸다.

"it's rainy day."

"지짐이가 먹고픈 게로군."

토스터기에 시선을 둔 채 아라는 대충 물었다.

"지짐이 받고 얼큰한 국물이 간절하다는."

바라다본 진호의 표정은 꽤나 진지했다.

"나쁘지 않네요."

"먹으러 가자는 건지 아님 생각만 같다는 건지."

부러 선택지를 두 개 던지며 아라의 의중을 떠보자는 계산이었으나, 토스터기가 뱉어낸 식빵을 오물거리며 보고도 못 본척하는 것은 거절의 몸짓이려니, 더해봤자 어리광일 뿐,, 하여 컵라면이라도 먹을 양 전기 포트에 손을 가져가는 찰나, 아라의 목소리가 급히 끼어들었다.

"우산 들고 십 분 후 로비에서 만나요."

우산, 십 분, 로비라는 단어에 이다지도 설렐 줄이야. 앞선 아라의 뒤를 쫓는 진호의 발걸음은 사뿐사뿐,, 제대로 신이 난 모양새였다.


양철지붕 위로 떨어지는 빗방울만큼은 아니었지만, 타닥타닥- 마치 콩을 볶듯, 호스텔 주방의 네모난 창문을 총총히 때리는 빗줄기도 나름 운치 있었다. 미색 플라스틱 식탁 위, 먹음직스럽게 익은 삼겹살이 가득한 프라이팬과 캔맥주를 사이에 놓고 아라와 진호는 마주하고 있었다.

"로마, 삼겹살, 시저 상추란? 한마디로 NO WAY OUT, 넘어진 김에 쉬어간다고, 오늘이구나."

잔뜩 신이 난 아라와는 달리 진호는 뾰로통했다. 밥상머리 예법도 모르는 듯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냥 넘어갈 리 없는 아라의 눈이 심술궂게 커진 건 그때였다.

"삼겹살 좋아한다길래 지갑 연 건데. 제사 지내요?"

"어디 가요? 집에서 끓인 곰국에 손도 안 댔어. 엄마 어디 갈까 봐."

급히 입을 막았기에 삼겹살 위로 침방울이 튀는 대참사를 가까스로 면할 수 있었다. 입 언저리에 묻은 잔여물을 쓰윽 닦아내며 해죽 웃는 아라를 따라 배시시 진호도 웃었다.

"우육면과 볶음밥이 과했던 게야. 어째 양껏 먹는다 했다."

"고반장이라 부를까 봐. 어디서든, 무엇이든, 척척 해결해 주니.. 쌈장과 소주는 없지만 대만족입니다."

커다란 쌈을 대충 씹어 넘긴 탓에, 새어 나온 진호의 말투는 어중간했다.

"이제 다섯 개 남았나? 일곱 언덕 중 두 개 찍었으니. 에스퀼리노 언덕."

다소 뻔뻔한 그 태도에 아라는 어이없는 표정을 지었다.

"무슨. 근처에 간 거지. 언덕을 간 건 아니잖아. "

"근처나 언덕이나. 차이나타운, 재래시장, 그만하면 도장 찍은 거나 다름없지."

"수박 겉핥기는 내 사전에 없어서."

"이역만리 타국에서 삼겹살이라니. 이러고 있으니 마치 우리.."

앞 아니면 뒤? 진호가 불쑥 꺼낸 말의 무게를 가늠하느라 바쁜 아라는 눈동자를 뱅글뱅글 돌렸다.

"좋다고. 맛있다고. 고추장 쟁여둔 거 신의 한 수였다고. 부러 선 긋지 말고 고기 씹으라고!! "

새총에 달린 노란 고무줄을 길게 늘였다가 놓듯, 총알같이 뱉어내고 맨 상추를 아삭아삭 씹어대는 그 모습에, 아라는 웃음이 나면서도 이상한 감정이 들기도 했다.

"처음이에요. 이런.."

남겨진 여운에 캔맥주를 만지작거리는 아라의 애먼 짓이 더해지자 이번에는 진호의 눈동자가 심히 흔들렸다.

"삼겹살 겸상한 공인은."

혀를 빼꼼 내밀고는 깔깔 웃었다. 웃을지 화를 낼지 짧은 고민을 뒤로한 채 진호는 다시금 상추를 입에 넣었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말이다. 마치 시소를 타듯 오르락내리락하는 미묘한 감정의 기류, 이리저리 떠다니는 고소한 공기, 나무젓가락이 스치는 소리,, 그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훼방꾼이 되기 싫은지 빗방울마저 창문 밖에 머물렀다.


굳게 닫힌 미색의 문 앞, 도어 잠금장치와 맞선 채로 아라는 서 있었다. 들어가려는 자와 막으려는 자의 숨막히는 싸움이 한창이었다. 문에 귀를 바짝 대자 작게나마 인기척 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에 아라가 입을 벌리려는 찰나, 등 뒤로 생경스러운 체온이 감지되어 반사적으로 몸을 돌렸더니 곧바로 진호와 마주했다. 발끝이 맞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다.

"카드키를 잃어버렸나?"

반가운 건 카드키고 어색한 건 진호겠지. 그 반대려나.

"어디 다녀와요?"

"보다시피."

목에 감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칼을 흐트러트리며 진호는 상황을 설명했다. 괜히 쭈뼛대는 아라를 빤히 보다가 이내 채근했다.

"용건이 있어 왔을 텐데."

"그랬는데.."

툭- 끊긴 말, 바닥에 발끝을 콩콩 박아대는 그 무언의 시위를 못 본 체할 수 없었나 보다.

"거리상으로나 각도상으로나 위험할 텐데. 분명."

그러고는 팔을 뻗어 몸소 거리를 재자, 한 걸음 옆으로 물러나며 아라는 때아닌 헛기침을 해댔다.

"비는 온데간데없고, 해는 졌다만 아직 초저녁이고 과식했으니 산책 겸 나가 보는 건 어떨는지.. 했는데.."

"참 어렵게도 말한다. 십 분 후 로비, 싫으면 그대로 있던가."

"씻었는데. 정말?"

"그럴 거면 명령문 아닌 의문문으로 왔어야지."

단단히 챙겨 입은 바람막이 점퍼를 짚어 가며 입술을 한껏 내민 것도 모자라 보란 듯이 젖은 머리칼을 털어대며 사라진 그 뒷모습을 좇던 눈을 거두고, 조금 전 진호와의 거리를 측정해 보다 아라는 크게 고개를 저었다.


종일 내리부었던 탓에 저녁 공기는 조금 쌀쌀했다. 이에 아라는 두 팔을 감싸 쥐었다 이내 풀고 주머니 속으로 손을 숨겼다. 점퍼의 지퍼를 만지작거리는 진호의 모습이 아라의 눈에 들어온 건, 그때였다. 혹 벗어주려는 걸까? 지퍼를 끝까지 올려 한껏 깃을 세운 후 야무지게 팔짱을 낀 채로 잔걸음을 걷는 진호를 보며, 그럼 그렇지~,, 쓸데없던 상상에 피식- 저도 모르게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나오니 좋은 게로군."

싱거운 말을 뱉는 진호를 향해 아라 역시 싱겁게 웃었다.

"소가 뒷걸음치다가 쥐 잡는다고, 기다리다 보면 누구 하나 걸리겠지 하던 참이었는데, 딱~."

"어째 이놈의 날씨는 중간이 없는지."

본디,, 바람은 기압의 변화에 의해 일어나는 공기의 움직임, 본인의 소임에 충실한 바람을 향해 괜스레 짜증을 내며 부러 시위하고 있었지만 밤의 콜로세움에 시선을 뺏긴 아라의 주의를 끌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마치 깊은 바다의 물빛과도 같은, 검은빛을 머금은 푸른색 하늘 위로 군더더기 하나 없는 늘씬한 초승달이 걸려있었다. 한바탕 이어진 대청소 때문일까? 시리도록 차갑고, 데일 듯이 따듯한 강렬한 색의 대비 아래 낮과는 또 다른 모습의 콜로세움이 버티고 있었다. 전구색과 주백색을 섞어 놓은 듯한, 그것은 마치 정오의 햇빛과도 같은 밝으면서도 따듯한 느낌으로, 팔십여 개의 아치는 같은 그림처럼 뿜어내고 있었다. 종일 머금었던 빛의 색을 토해내기라도 하듯.. 불속으로 몸을 던지는 불나방처럼 아라는 성큼성큼 걸어갔고, 행여나 놓칠세라 진호는 바짝 따라붙었다.

"두더지 게임이 생각나는 건, 나만 그런가?"

마치 제 손에 뿅망치를 쥐고 있기라도 하듯, 아라가 오른팔을 한껏 올리자 행여나 놓칠까 싶은 진호는 그 오른팔을 단단히 거머쥐고 잽싸게 핸드폰을 꺼내 콜로세움을 배경 삼아 사진을 찍어댔다.

"이런 게 어딨어? 말을 하던가. 아님 신호를 주던가.. 맘대로 멋대로, 자기만 준비하고."

"준비한다고, 매만진다고 달라지는 게 뭐라고."

심술궂게 커진 눈을 앞세워 아라가 시위해 오자 진호는 금세 꼬리를 내렸다.

"해서 내가 매너 있게 플래시 끄고 찍었지."

어이가 없는지 아라의 입은 절로 벌어졌고, 시선을 급히 하늘로 돌려 진호는 딴짓을 해댔다. 마치 밤하늘의 별을 세어보기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둘러봐도 작은 별 하나 박히지 않았는데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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