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좋은 곳에 쓰이겠죠?"
"딱 그 마음만큼 세상이 아름다웠으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수거한 동전들은 문화재 복원과 보수에 쓰인다고 책은 말하던데."
"알면서 묻는 건 무슨 심뽀인지."
"그래야 문맥상 흐름이 맞으니까. 동전 안 던진 이유.. 말입니다."
"다시 로마에 왔잖아요."
"그럼 두 번째는."
"들려줘요. 나중에. 아니 왜 내 패만 까는 건지."
"그럼 제대로 까던가."
튕겨버린 아라와 잠잠한 진호의 시선이 순간 엉켰다. 쓰임새 아닌 동전을 던지지 않은 까닭을 묻는 진호의 의도를 눈치챘지만 애써 모른 척하며 아라는 태연스레 말을 이었다.
"한 해 로마를 방문하는 관광객은 대략 3600명 정도, 분수에서 수거된 약 19억원 가량의 동전은 가톨릭 자선재단에서 노숙자들을 돕는데 사용되었어요. 로마 의회가 이를 가로채기 전까지 말입니다. 2017년도였던가? 아무튼 이에 가톨릭 주교에서 발행하는 일간지는 <빈곤층의 돈을 강탈한 로마 시의회>라는 제목의 기사를 1면에 실어 맹렬히 비난했다는. 요는,, 노숙자를 돕든, 문화재 복원과 보수 사업에 쓰이든, 오늘 당신의 기부는 선한 영향력일 거라는."
자신의 물음에 대해 이보다 더 완벽한 답은 없을 텐데.. 바라다본 그의 표정은 뭔가 석연치 않아 보였고, 끝내 털어버리지 못한 듯했다.
"이해해요. 입도 뻥긋하기 불쾌한 공기질이라는 거. 좀 쉬러 갑시다."
가뿐한 몸사위의 아라와는 달리 온도와 습도가 한데 엉켜버렸는지 그는 얼른얼른 발을 떼지 못했다.
"Siesta는 라틴어의 hora sexta에서 유래된 거라는. 두 단어 모두 발음에 주의해야 한다는 공통점이."
말을 하다 말고 아라는 슬쩍 진호를 살폈다.
"이탈리아, 그리스, 지중해 연안 국가와 중남미의 낮잠 자는 풍습으로 나라마다 차이가 있는데, 그리스는 오후 2-4시, 이탈리아는 오후 1-3시 30분, 이 시간에는 상점뿐 아니라 관공서도 문을 닫고 낮잠을 즐기는.. 잠깐 지금 정확히 1시 45분인데."
손목시계 한 번, 핸드폰 시계를 또 한 번, 그것으로 모자랐는지 주위를 휘돌아보며 아라는 시간을 끌었다. 효과를 극대화시키듯.
"로마에 왔으면 로마 법을 따라야지."
날씨를 탓하며 휴식만이 답이라는 핑계를 앞세워 자리한 꼰또티 거리 한복판의 맥도널드 안이었다. 바닥까지 떨어진 컨디션을 끌어올리려는 애초의 계획이었으나 깨작거리고 있을 뿐 좀처럼 줄어들지 않는 그의 밀크셰이크를 보며 아라의 속마음은 말한다. 시에스타 카드는 불통이로구나!!
"<영원한 것은 없다>란 책 알아요? 너 자신을 알라~, 이후 가장 가슴팍에 박힌 말.. 삶, 건강, 사랑 역시도 영원하진 않으니까. 형체, 냄새는 물론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추상명사인 사랑, 그놈 이기에,, 로마는 이번이 마지막이라. 이만하면 충분한 답이 되려나?"
내내 시큰둥하던 진호의 눈동자가 또렷해진 건 그때였다. 그런 그를 아라는 외면하지 않았다.
"문장과 문장 사이에 pause 정도는 넘어갈게요. 잠깐의 정적에도 낯설어서요. 내내 그럴 거 같아서. 다시 말하지만, M사는 딸기셰이크가 찐인데, 일부러 밀크셰이크 주문한 겁니다. 뻥긋하기 싫으면 눈이라도 깜박하라고. 안 그러던데. 해서."
"그냥 궁금해만 할걸. 괜히 돌은 던져 들쑤신 거 같아. 그게 걸려서."
때린 놈은 편히 못 자도 맞은 놈은 대자로 잔다는,, 고국의 속담을 이역만리에서 곱씹을 줄이야. 생각이 여기에 닿자 아라는 괜스레 웃음이 났다. 그가 그린 만큼의 상처와 아픔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럼에도 보란 듯이 연기를 했다.
"번지수 없는 문패 없듯 사연 없는 사람 없다고."
"응?"
"이 나이 먹었으면 그런 사연 하나쯤은, 상처의 훈장 하나는 있어야지. 안 그래요?"
되레 아무렇지도 않게 툭툭- 뱉어내자 그제야 진호는 평온해진 듯 보였다.
"돌 던지는 것도, 들쑤시는 것도 오늘로 그만할게요. 신경 쓰여서 안 되겠어."
"그렇다면 갖고 있는 패 까 봐요."
곧추 세운 검지를 앞세워 그의 가슴팍을 정확히 조준하자 진호는 서둘러 방어 자세를 취했다.
"아직은 아니야. 때가 되면 하지 말래도."
밀크셰이크 컵에 맺힌 물기를 쓸어내리며 그는 시선을 돌렸다. 그런 그의 모습을 아라는 우두커니 바라보았다.
로마의 일몰을 한눈에 담을 수 있다는 핀초 언덕이었다. 채 내려앉지 못한 붉은 노을을 차츰 압박하는 검푸른 빛이 층층이 깔려있는, 위로 갈수록 점점 짙어지는 강렬한 색감이 끝도 없이 눈앞에 펼쳐졌다. 아래로 향한 시선과 마주한 광장, 중앙에 우뚝 솟은 오벨리스크는 꼭짓점인 듯도 했고, 해전 내 돌다 지쳐 멈춰버린 팽이의 모습 같기도 했다.
"아이스링크가 생각나는 건."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은 건 아니고? 그에 의한 연상학습 뭐 그런.."
"겨울에 오고 싶은데 스케이트 타러."
"뭐 어려운 일이라고."
"안 온다 그랬잖아."
한껏 부릅뜬 아라의 눈에 진호의 옆얼굴만 가득 들어찼다.
"무릎 보호대에 장갑까지 단단히 챙겨 입은 채로 오벨리스크를 축으로 힘겹게 기어가는 당신 모습 보여요?"
광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후훗- 웃더니,
"수준급은 아니다만 엉금엉금 기는 당신을 보다 못해 정중히 에스코트하는 내 모습도??"
말을 잇는 그의 목소리에는 아쉬움이 가득했다.
"다음은 없을 테니. 상상해 보는 겁니다."
그를 따라 아라 역시 시선을 돌려 광장에 초점을 맞췄다. 눈앞의 광장은 어느새 얼음투성이었고 오벨리스크를 축으로 얼음을 지치는 자신과 진호의 모습이 펼쳐지자,, 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녀는 고개를 세게 저었다.
1589년 교황 식스토 5세의 계획에 의해 만들어지기 시작해 1820년 주세페 발라디에 의해 조성된 포폴로 광장은 예로부터 북쪽에서 로마로 들어오는 길목이었고, 광장에서부터 남쪽으로 난 세 개의 큰길은 시내를 향해 뻗어 있다. 가장 왼쪽 바뷔노 거리(Via del Babuino)는 스페인광장을 거쳐 퀴리날레 궁으로 이어져 있고, 가운데 꼬르소 거리(VIa del Corso)는 로마 중심부를 관통하여 콜론나 광장을 거쳐 베네치아 광장으로 뻗어 있으며, 오른쪽의 리뻬다 거리(Via di Ripetta)는 나보나 광장과 판테온 쪽으로 나 있다. 광장 가운데 있는 오벨리스크를 등지고 서면 이 세 갈래의 길이 보인다.
광장 중앙 우뚝 선 36m의 오벨리스크는 기원전 13세기에 아우구스투스 황제가 이집트에서 가져와 세운 것이며, 코르소 거리를 사이에 두고 바로크식 성당이 자리하고 있다. 오른쪽은 산타 마리아 미라콜리 성당(Santa Maira dei Miracoli), 왼쪽은 산타 마리아 몬테산토 성당(Santa Maria in Montesanto)으로 오른쪽 성당의 본당 쿠폴라는 둥근 원, 왼쪽 성당은 타원으로 미묘하게 차이가 나지만, 육안으로는 거의 똑같아 보여 흔히들 쌍둥이 성당으로 부르곤 한다.
로마 시내에서 가장 유명한 중심 광장인 이곳은 18-19세기에는 공개 처형의 장소로 쓰였으며, '민중의 광장'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많은 집회가 열리기도 했다. 광장 동쪽 언덕의 핀치오의 테라스에서는 로마 시내의 멋진 경관을 한눈에 감상할 수 있는데, 특히 멀리 성 베드로 대성당 위로 해가 지는 로마의 황혼이 일품이다.
"거짓말쟁이."
"무슨?"
"올려다보는 거지 오르는 거 아니라며. 산에 대한 철학이라 했잖아. 여긴 어디?"
한때 포도밭이었던 곳을 보르게세 가문은 분수, 새장, 동물원, 야외 연회장 등을 갖춘 공원으로 조성하였다. 1603년의 일이다. 그로부터 10년 후, 베르니니의 최대 후원자였던 시피오네 보르게세 추기경(재위 기간 1577-1633)은 수집한 회화와 조각상을 보관하기 위해 보르게세 미술관을 만들었다. 회화만 놓고 보면 바티칸 박물관 못지않으며 베르니니, 카라바조, 티치아노, 레오나르도 다빈치 등, 당대 유명 화가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이후 보르게세 가문의 파산으로 로마 정부에서 이를 사들여 1903년 일반인에게도 공개되었다.
"일정표 아직인가 본데 오늘 오후는 임금님 놀이. 해서 그 높은 곳에 올라온 거고. 올라오면서 보았겠지만 경치가~.. 높은 곳에 궁전을 짓고, 공원을 만드는 이유 납득이 간다. 참고로 독일 포츠담에 가면 상스시 궁전이라고, 계단식 논과 흡사한 정원의 돌계단을 사뿐히 지르밟고 오른 정상에서 바라보는 전경이 가히 압도적이라는. '왕 할만하네'.. 그런 생각이, 그런 말이 입 밖으로 나올 만큼."
"퍽이나. 로마의 일곱 언덕 도장 깨기는 시간문제일 듯."
툴툴대는 목소리로는 모자랐는지 발에 걸린 자갈을 튕기는 그의 몸사위는 단단히 뿔이 난 듯 보였다.
"오토리노 레스피기의 로마의 소나무 1악장에 등장하는 보르게세 공원.. 보고 싶었던 거 아니었나? 우산 소나무가 저리도 빼곡한데."
공원을 휘돌아보며 아라는 그의 기분을 돌려보려 했다.
"공익 광고에 설렐 나이는 애진작에 지났고요."
"우리 강산 푸르게 푸르게."
아라와 진호의 입이 동시에 벌어진 건 그때였다. 그러고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한바탕 크게 웃었다.
"로마의 일몰이 가히 절정이라고. 오늘 일기예보가 그러던데. 해서 시간을 좀 때워야 한다고."
"핑계를 대도. 참."
"대충 본 게 내내 걸려서, 오늘은 제대로 감상할 거야."
내내 밟고 있던 흙바닥에 부러 발자국을 새기고 이내 박박 지워버리는 아라의 그 모습이 눈에 가득 들어오자 그는 못 이기는 척했다.
"그래요. 그럼. 미술관 가자고 안 한다면야."
"그 돈이면 맥주가 한 병인걸, 말했을 텐데. 색칠 공부 젬병이었다고."
핀초 언덕의 석양, 연인들의 데이트코스, 여행객들의 쉼터로만 발도장 찍기 바쁘지만, 보르게세 공원, 그중에서도 보르게세 미술관은 숨은 보석과도 같은 곳이다. 고작 맥주 한 병과 퉁칠 만큼의 그 선상이 아니라.. 방대한 회화와 조각 가운데 티치아노의 <신성한 사랑과 세속적인 사랑(1514)>이 유독 눈길을 사로잡는데, 이는 베네치아 귀족이 신부에게 줄 결혼 선물로 주문한 것으로, 티치아노에게 당대 최고의 화가라는 명성을 안겨준 작품이다. 고대 로마 시대부터 나체는 오랫동안 순수와 신성함의 상징이었다. 즉 그림 속 나체의 여인은 신성한 사랑을 표현한 것이고, 드레스를 입은 여인은 결혼 다산을 상징하는 육체적인 사랑을 의미한다. 두 여인은 얼굴뿐 아닌 머리색까지 흡사 쌍둥이처럼 닮았는데, 이는 사랑의 여신 비너스를 양분시켜 놓은 것으로 사랑에는 세속성과 신성함이 함께 존재함을 은유적으로 표현하고자 한 작가의 의도였다 전해진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바탕으로 한 <병든 바쿠스>와 <아폴론과 다프네> 또한 놓칠 수 없다.
카라바조의 <병든 바쿠스>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와인의 신인 '바쿠스'를 그린 그림으로, 이는 그리스 신화의 디오니소스에 해당하며 손수 거울을 사용하여 그린 화가의 자화상이다. 포도잎으로 만든 관을 머리에 쓰고 비스듬히 고개를 돌려 앉은 화가의 얼굴에는 병색이 완연하며, 손에 청포도를 움켜쥐고 있다. 카라바조가 그린 '바쿠스'는 풍요와 쾌락을 상징한다기보다 가난하고 고통스러운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데, 이는 무명 시절 불행했던 자신의 모습을 '와인의 신 바쿠스'에 패러디하여 묘사한 화가의 자학적인 유머감각이 돋보이는 작품이라 정평이 나 있다.
여기,, 아폴론의 교만이 불러온 슬픈 사랑 얘기가 있다. 소년 에로스가 화살을 갖고 노는 모습을 고깝게 여긴 아폴론이 한소리를 하자 에로스는 이에 심술이 나, 사랑하는 마음을 일게 하는 황금 화살과, 거절하게 하는 납으로 된 화살을 만들어 황금 화살은 아폴론을 향해, 강의 신 페네이오스의 딸 다프네라는 요정을 향해 납의 화살을 쏘아 올린다. 이에 두 사람은 각자 뜨겁게 달아올랐다. 아폴론의 마음이 깊어질수록 다프네는 그만큼 멀어져만 갔다. 자신의 절절한 구애에도 속눈썹하나 까딱이지 않는 다프네로 인해 타는 가슴을 안고 쫓고 또 쫓던 어느 날,, 여느 날처럼 아폴론은 사랑의 날개를 편 채로 내달렸고 다프네는 공포의 날개를 펄럭이며 도망쳤다. 그러나 지칠 대로 지친 다프네는 결국 강의 신, 아버지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도와주세요. 아버지. 땅을 열고 저를 숨겨 주세요. 아니면 제 모습을 바꾸어 주세요.'
말이 끝나자마자 다프네의 사지는 뻣뻣해지기 시작했다. 머리카락은 나뭇잎이 되었고 두 팔은 가지로 변했다. 발은 지면에 달라붙어 뿌리로 변하기 시작했다.
마치 눈앞에서 보기라도 한 듯,, 다프네가 이제 막 월계수로 변하는 그 순간을 베르니니는 조각으로 표현하였다. 사랑하는 여인을 숨이 가쁘게 뒤쫓다가 가까스로 그녀의 몸에 손이 닿은 남자, 어떻게 해서든 빠져나가려 몸부림을 치는 여자의 얼굴은 혐오감과 두려움으로 인해 한껏 이지러져 있었고, 아름다운 몸은 어느새 나무로 변해가고 있다. 나무껍질로 둘러싸인 하반신, 가지와 잎사귀들이 뻗어져 나온 손과 머리,, 생동감 있는 표정과 역동적인 동작은 과연 돌일까 싶은 의구심마저 불러온다. 찰나의 순간을 포착한 작품은 보는 이로 하여금 영원이란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