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19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by 슈크림빵

"두 작품 모두 다윗을 모티브로 하고 있지만 전혀 다른 표현이죠?"

아라가 건넨 휴대폰을 바라보는 진호의 눈빛은 자못 진지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가 골리앗과 싸움을 하기 직전 팽팽한 긴장감의 순간을 나타냈다면, 베르니니의 다비드는 골리앗을 향해 돌을 던지려 하는 찰나를 표현하고 있어요. 보통의 조각 작품은 정지한 순간을 포착하는데 전자가 그런 예라면, 그에 반해 후자는 미간에 잡힌 실주름과 굳게 다문 입술 등,, 다분히 생동감 있고 역동적이라는.."

진호는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미켈란젤로의 작품을 접했던 터라, 방향성을 달리 잡았던 건 아닐까? 생각했는데, 대표적인 그의 작품들에서도 이 점은 하나같이 일맥상통하고 있어요. 툭 건드리면 마치 살아 움직일 듯한,,"

"색칠공부 젬병이라고 하더니만. 뭐지 이 불타는 학구열은?"

"아는 만큼 보이고 기억하는 거라. 건축, 미술, 음악 등등.. 다른 듯 결국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탓에."

"해서,, 오늘은 베르니니의 발자취.. 뭐 그런 건가?"

"로마를 대표하는 그를 만나지 않고서야 어찌."

"그의 마지막은 보았으니. 산타마리아 마조레 성당."

"오~"

아라가 손을 번쩍 들자 그 역시도 손을 들었다. 순간 아라가 손을 내리자 진호는 다른 한 손을 마저 올려 공중에서 짝짝꿍을 한 후, 웃음을 참지 못하는 아라를 부러 외면했다.

"하이파이브가 이다지도 어려운 친목 행위였다니. 어찌 됐든, 꽤나 지루하겠구나."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일 텐데."

하품을 하지 않았다 뿐이지 벌써부터 그는 지루해 보였지만, 이에 아랑곳 않고 아라는 자신에 찬 말투로 제 말만을 앞세웠다.


"유명한 건 맞나 봐. 산처럼 수북한 걸 보면."

켜켜이 쌓인 마리토조를 힘겹게 운반하고 있는 건장한 두 남자를 보며 진호는 입을 열었다. 주위를 휘돌아보던 아라의 손끝이 멈춘 곳에 그 역시 시선을 고정했다.

"성당은 왜?"

"아마도 결혼식이 있는 모양이지."

말이 끝남과 동시에 마리토조를 든 남자들이 성당 입구로 향하자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우르르 나와 이를 반겼다. 그들의 복장이 흔히 접했던 결혼식 풍경과 흡사하자, 추측이 현실이 된 상황에 참지 못하고 아라는 웃음을 흘렸다.

"뭐지?"

"뭐긴, 남편을 뜻하는 마리토(Marito)에서 파생된 단어로, 크림 안에 반지 또는 보석을 숨겨 프러포즈하는 빵으로 통해요. 그 마리토조가요."

"여자들이란.. 참."

아쉬운 건지 아님 못마땅한 건지,, 진호는 표가 나게 고개를 돌려댔다.

"감동의 포인트는 금은보화 아닌 유일무이한 마음이라는."

더해봤자 말싸움이겠지 싶어, 진호는 부루퉁한 기색을 급히 지웠다.

"구경하고 갈래요? 축하는 많을수록 좋은 거잖아."

"'라면 먹고 갈래요?'인 줄,, 마리토조가 먹고 싶은 건 아니고?"

아차 하는 그의 표정을 아라는 놓치지 않았다.

"결혼식 하객 알바, 거 되게 고욕이래요. 가요, 내가 살 테니."

마주한 그들은 거짓 없이 웃었다.


1625년 바르베리니 가문 출신의 교황 우르바노 8세(재위 기간 1623-1643)의 재위 시절, 바르베리니 궁전(Palazzo Barberini)의 이름을 붙여 바르베리니 광장은 만들어졌다. 로마의 숱한 광장들 중 유독 발도장이 끊이질 않는 이유는 바로, 광장 중앙에 있는 베르니니가 만든 트리토네 분수(Fontana del Tritone, 1643년) 때문이다. 네 마리의 돌고래 머리가 전체적인 구조를 지탱하며, 바르베리니 가문의 상징인 세 마리의 꿀벌 조각 위로 교황을 상징하는 삼중관과 열쇠가 조각되어 있고, 돌고래의 꼬리 상단 조가비 위로 바다의 신인 트리톤이 무릎을 꿇고 앉아 있다. 머리를 뒤로 젖힌 채로 입에 대고 있는 소라 고동에서 물이 뿜어져 나오는 이 분수는 베르니니의 최대 후원자였던 우르바노 8세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전해진다. 교황 식스토 5세에 의해 1586년 건설된 수로 아쿠아 펠리체(Acqua Felice)를 복원한 것으로, 로마 시민들에게 물을 제공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 한다. 이전의 공공 분수들이 단순히 물을 받는 수단으로 이루어진 반면, 이들의 합작품인 트리토네는 귀족의 별장과 빌라의 정원에 사용되던 조각 분수를 최초로 공공분수에 적용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남다르다.

바르베리니 광장의 한편, 흔히 벌의 분수로 알려진 아피 분수(Fontana delle Api, 1644)는 트리토네 분수를 완성한 이후 제작되었다. 우르바노 8세의 이름을 새긴 조개 모양의 석상 전면에 조각된 꿀벌 세 마리에서 물이 솟구쳐 나오는 작은 분수로, 트리토네 분수의 물을 재사용한 결과, 높지 않은 수압으로 인해 물줄기 또한 얇게 분출된다. 이런 이유로 분수는 전적으로 말에게 물을 먹이기 위한 용도였다.


"찾았다."

"대수라고."

"꿀벌 말고."

아라의 시선은 진호의 손끝에 머물렀다. 'BERNINI' 간판을 내건 건물, 대관절 그게 어떻다고 저러는 건지 그녀는 도통 감이 오지 않았다.

"<천사와 악마>에서 랭던 박사가 묵던 호텔."

'아마 이건 몰랐을 거다',, 하는 의기양양한 태도에, 아라는 팽팽히 맞섰다.

"영화보다는 책이라길래. 해서 걸렀다는."

손바닥도 마주쳐야 소리가 난다고, 미적지근한 아라의 반응에 곧추 세웠던 사기가 한풀 꺾일 법도 한데 웬걸, 그의 목소리에는 힘이 실려 있었다.

"프라하 까를교를 접한 후 '언젠가는' 했던 막연한 다짐이 현실이 된 것처럼, 나에겐 <천사와 악마>가 불쏘시개였다는."

"그럼 피렌체 아닌 로마였어야지."

"모태 신앙이라고 하나? 뼛속부터 천주교 신자인 고향 친구 놈이 로마보다는 피렌체라고 하길래. 이탈리아 하면 당연 로마라 여겼기에, 확인하고 싶었어요."

할 말이 있다는 듯, 아라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러나 이를 감지한 진호가 조금 빨랐다.

"피렌체, 미켈란젤로 언덕에 걸린 절대 마법,, 운운할 거면 그만둬요."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만날 수 있으니까."

"대성당 쿠폴라와 미켈란젤로 언덕을 그려보며, 넉넉잡아 이틀이면 되겠지 했는데."

"후회했겠죠. 것도 땅을 치면서. 모아도 시원찮은 판에 스스로 배짱이 한다며 곱지 않은 시선도 있었어요. 그럼에도 온 건, 지금 아니면 안 될 것 같아서였어요. 아등바등 사는 탓에 여행이란 어쩌면 달콤한 꿈일지도 몰라요. 나와 다른 거지 그들이 틀린 것은 아니니까."

"누구나 한 번쯤은 꿈꾸잖아요. 일과 일사이 마침 틈이 생겼고, 때를 놓치면 평생 꿈이겠구나 싶더라는. 여행에서의 1순위는 돈보다는 시간이니까."

"맞아. 일정은 달라도 취지는 같네요."

순간, 진호의 두 눈이 커졌다. 그리고 뭔가 생각났다는 듯 급히 입을 벌렸다.

"어쩌면, 당신을 만나기 위해 피렌체에 간 건 아닐까요?"

"늦었어요. 그랬다면 고향 친구 대신 나를 먼저 언급했어야지."

멋쩍은지 진호는 머리를 긁적였고, 아라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자, 꿀벌도 찾았으니 이제 나보나 광장 아님 스페인 계단? 나머지 분수도 보러 가야 할 테니. 발자취를 따라가면 2박 3일도 모자라겠네."

분수에 담갔던 손가락 끝에 맺힌 물방울을 자신을 향해 튕기는 그 몸사위는 의미 없는 장난 같아 보였지만, 분명 그의 소심한 복수이이려니. 이에 화가 난다기보다 아라는 되레 웃음이 났다.

"갈 데 있어요."

"위치상 스페인 계단일 테지. 뭐."


르네상스의 거장으로 미켈란젤로와 라파엘로를 꼽을 수 있다면 바로크 시대에는 베르니니와 보로미니가 대표적이라 하겠다. 두 사람의 시작은 닮아있었다. 조각가였던 아버지를 둔 베르니니, 석공일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어릴 때부터 돌과 친숙했던 보로미니,, 두 사람은 로마로 향한다. 조금 다른 방향성을 갖고 말이다. 나폴리의 화가 카발리에르 다르피노(Cavalier d'Arpino)가 보르게세 가문에 써 준 소개장을 손에 쥔 아버지를 따랐던 베르니니에 반해, 친카를로 마데르노(Carlo Maderno)를 찾아 보로미니는 홀연단신 떠나게 된다.


유년 시절부터 석공일을 시작한 후 밀라노에서 석공 기술을 공부한 남달랐던 보로미니의 재능을 알아본 바로크 건축의 거장 카를로 마데르노는 자신이 작업하던 바르베리니(Palazzo Barberini) 궁의 확장 작업에 그를 참여시킨다. 1621년의 일이다. 이후 1629년 베르니니가 궁전 건축에 참여하며 두 천재의 만남은 성사된다.


한편,, 베르니니의 로마 입성 후, 당시 피렌체 추기경이었던 마페오 바르베리니는 미켈란젤로의 미완성 피에타를 맡길 생각을 품었을 정도로 그의 능력을 높이 샀으며, 쉬피오네 보르게세(scipione borghese) 추기경은 보르게세 갤러리를 장식할 작품을 주문하며 그의 양 어깨에 날개를 달아 준다. 기다렸다는 듯 베르니니는 <페르세포네의 납치>, <아폴론과 다프네>, <다비드> 등을 연달아 선보이며 후원자들의 기대를 넘어 자신의 예술적 명성을 확고히 다지게 된다. 1623년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교황 우르바노 8세로 즉위하자 베르니니의 지위 또한 고공 상승하게 되어, 교황청의 예술 활동을 총괄하는 책임자의 역할까지 맡게 된다. 이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1629년 카를로 마데르노가 불의의 낙상 사고로 사망하자 많은 예술가들 중 베르니니가 교황청의 수석조각가 직위를 물려받게 된다. 이때 보로미니가 그의 밑으로 들어가 조수 역할을 하며 본격적인 가르침을 받게 되고, 이로써 두 사람은 많은 작업을 함께 하게 되는데, 일례로 베드로 대성당의 <발다키노>를 꼽아 보면,, 사실 이 작업의 적임자로 보로미니가 거론되었으나, 교황의 친구라는 이유로 베르니니가 맡았다고 한다. 그래서였을까? <발다키노>를 만들 때 보로미니의 도움이 절대적이었다 전해진다. 그러나 과정은 상관없다는 듯 모든 공과 보수 또한 베르니니의 독차지가 되었고, 보로미니는 그의 뒤에 가려지고 만다. 이는 두 사람 사이에 균열을 불러오게 된다.


우르바노 8세의 총애 덕에 꽃길만을 걷던 베르니니는 인노첸시오 10세(재위 기간 1644- 1655)가 즉위한 이후 큰 위기를 맞는데, 우르바노 8세와는 달리 인노첸시오 10세가 성 베드로 성당의 종탑 건설 후 성당 벽면에 금이 간 것을 문제 삼자, 이에 보로미니는 바티칸 지역 지반이 약한데도 불구하고 두꺼운 종탑을 세운 것은 성당 붕괴의 초래를 방관한 격이라는 의견을 내세워 베르니니를 향한 공개적 비판을 서슴지 않았다. 우르바노 8세의 지시와 베르니니의 끝없는 자신감이 불러온 참사에 대한 조사 위원회의 입장은 다음과 같았다.


'이 사태의 책임이 베르니니에게 있지는 않지만, 그에게 공사 철거를 명한다.'


애당초 설계를 한 마데르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당연한 것일 테지만, 베르니니는 조사 위원회의 결정에 순응하고 11개월에 걸쳐 철거 공사를 진행하였고, 이 일은 그의 명성에 씻을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았으며, 이로써 보로미니와도 완전히 등을 돌리게 된다.


그렇게 원수 아닌 원수가 된 채로, 평생 안 볼 것 것만 같던 두 사람은 나보나 광장에서 조우하게 되는데,, 교황에 오르기 전 인노첸시오 10세는 나보나 광장에 자신의 저택을 소유하고 있었다. 교황이 되자 이곳을 영광스러운 본거지로 삼기 위해 대대적인 정비에 나섰고, 그 기념비적인 첫 사업은 분수 건설이었다. '인류 발상지를 흐르는 4대 강의 분수를 세우자'고 제시한 보로미니의 의견을 받아들인 교황은 디자인 현상 공모를 지시한다. 보로미니의 디자인이 선정될 것이라 하나같이 입을 모았지만, 베르니니의 디자인이 채택되었다 한다. 제안과는 달리 그의 디자인이 인노첸시오 10세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 것을 베르니니의 후원자가 알아채고는, 교황의 동선에 베르니니의 디자인을 가져다 놓았고, 한눈에 반해버린 교황은 그의 디자인에 최종 낙인을 찍었다고 한다. 여기서 전해지는 놀라운 사실은,, 애당초 베르니니는 디자인 자체를 제출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어찌 됐든,, 인노첸시오 10세와의 냉전도, 그의 암흑기도 이렇게 끝이 나게 된다.


그렇다면 교황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 특별함은 무엇이었을까? 그의 여러 작품들에서도 여실히 드러나는 '역동성'이라 전해진다. 오벨리크스를 받치고 있는 '강의 신' 네 명의 웅장하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자세는 교황을 넘어 후대 사람들까지도 빠져들게 하는,, 베르니니와 함께 로마를 대표하는 작품임에 틀림이 없다.


한편,, 자신의 공이 다시금 베르니니의 것이 되자, 그를 향한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시달리던 중, 보로미니에게도 기회가 찾아오는데, 나보나 광장의 팜필리 궁전 옆 산타녜세 인 아고네 성당(Sant'Agnese in Agone)의 재건축 결과, 정면 파사드를 높게 설계해 돔의 지붕이 가려지게 된 것을 못마땅하게 여긴 인노첸시오 10세는 보로미니에게 작업을 맡겼고, 기다렸다는 듯 완벽한 파사드를 제작해 교황, 그리고 베르니니를 향해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게 된다. 여기에 전해지는 재미난 얘기가 있다. 보로미니의 성당과 베르니니의 분수는 마주하고 있는데, 그중 라플라타 강의 신은 성당 쪽에 위치해 있기 때문에 일부러 정면을 보지 않고 고개를 돌리고 있는 형상이라 말들 하지만, 그러나 성당보다 분수가 먼저 완성되었기 때문에 성립할 수 없는 얘기다. 이는 아마 입방아 찧기 좋아하는 사람들이 퍼트린 근거 없는 소문은 아닐는지.. 그런 이유 때문일까? 성당과 분수에 얽힌 갑론을박을 몸소 확인하기 위한 사람들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본인들의 의지에 따라, 사람들의 부추김에 따라, 그렇게 동료이자 라이벌이 된 두 천재의 발자취를 따라가다 보면 만나게 되는 그곳은 로마, 그리고 바로크 시대의 종착지가 아닐는지..


이후, 두 사람은 어떻게 되었을까? 뛰어난 수완과 든든한 후원자를 가진 베르니니와는 달리 돈과 사교술에 관심을 두지 않고 예술가로서의 명성에만 집착하던 보로미니는 평소 신경장애와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고 한다. 산 조반니 바티스타 데이 피오렌티니 대성당(Chiesa Parrocchiale di San Giovanni Battista dei Fiorentini)의 후진(Apse) 작업에 참여한 후에,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1667년의 일이다.

인노첸시오 11세(재위 기간 1676-1689)의 위임을 받아 팔라초 델라 칸셀레리아 궁전(Palazzo della Cancelleria)의 복원 작업을 완료한 직후, 베르니니 역시 지상의 순례를 마치게 된다. 사인은 뇌졸중이었으며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 부친의 곁에 묻혔다. 명성에 비해 초라한 그의 비석에 사람들이 전한 애도의 글귀는 이러하다.


'수많은 사람들의 머리를 조아리게 한 예술의 왕, 로렌초 베르니니 여기 살다가 묻히다.'


고전주의적이고 단정한 바로크 건축을 추구한 베르니니, 곡면을 활용하여 창의적인 바로크 건축을 선보인 보로미니.. 풍요로웠기에 더 화려했던, 당대에 명성을 얻었던 베르니니,, 짧았기에 더 애틋한, 후대에 가서야 그 진가를 인정받은 보로미니,, 동시대를 살았던 두 천재의 명확한 다른 대비였다. 그들이 살았던 시대의 공기는 분명 달랐겠지만, 이를 바라보는 후대의 시선은 하나였다. 바로크 시대를 대표하는 거장이었다고.. 그것이 위안이 되었기를..


*Borromini Francesco(1599-1667)

*Gian Lorenzo Bernini(1598-1680)


*후진(後陣, Apse)- 교회(성당) 건축에서 가장 깊숙이 위치해 있는 부분으로서, 내진 뒤에, 주보랑에 둘러싸인 반원형 공간이다. 예배자나 순례객, 관광객이 성당의 중앙 현관으로 들어와 신랑을 통해 바로 보는 정면이 후진이므로, 주로 이곳에 제단이나 유물이 놓인다.


-내진(內陣, Choir)- 교회(성당) 건축에서 중심부로서 교차랑과 후진, 주보랑으로 둘러싸인 공간이다. 주로 내진에 성가대석과 제단이 놓인다.


-주보랑(周步廊, Ambulatory)- 교회(성당) 건축에서 측랑이 내진부로 연장되어 생긴, 내진과 후진을 감싸는 회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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