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20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by 슈크림빵

"제법 비슷해요? 사진으로만 접해서, 로마의 가로수길이라 부르니.."

1950년대 미국 영화 배급사들이 로마로 몰려들며 이름을 알린 베네토 거리(Via Veneto)는 실제 많은 영화 속에 등장하기도 했다. 현재는 호텔, 출판사, 은행, 보험회사, 여행사 등이 밀집해 있으며 그중에서도 단연은 노천카페 거리로의 명성이다.

"서울 사는 김진호 씨, 지방 사는 촌년이 묻잖아요!!"

풀네임을 들먹인 것이 먹힌 걸까? 방그레한 웃음을 머금고 그는 다가왔다.

"꿀벌이 머릿속에서 윙윙거려서."

순간, 아라의 입이 벌어졌지만 못 본 척을 했다.

"실력자인가? 아님 능력자인가? 여기가 꿈의 무대라면서?"

살짝 꼬아 묻는 그의 태도에 빈정이 상했는지 아라의 말투는 배배 꼬였다.

"안타깝게도 2002년도에 운발이 다한 여파로, 반타작이라도 하려면 꿈은 크게 가져야 하는 법이고. 커피숍에서 일하는 비정규직 노동자라고 한 수 아래로 깔보는 듯하는데, 돌아가면 설 무대 있는 그쪽처럼, 나도 일 할 직장 있다 뭐. 커피숍 확장 관계로 휴업한 틈을 타 여행 온 거라 했어요 안 했어요."

"들었죠. 들었고 말고요."

시큰둥한 그의 대꾸에 아라는 암팡지게 쏘아보았다.

"공부 못하는 애들은 꼭 그러더라. 페이지 넘어간 다음에 전에 것을 되뇐다지."

"가로수길은 아직인지라, 간판의 크기와 맛이 비례하는 것은 아니라는. 비싼 돈 주고 맛없으면 그것만큼 억울한 것도 없지."

별안간 아라의 팔뚝을 채며 그는 부추겨댔고,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아라는 쉬이 발을 떼지 못했다.


"파리 paul 알아요? 당연히 알 테지."

"갑자기 그건 왜?"

"'파리만 가면~'하고 노래를 불렀거든. 크로와상, 바게트, 뱅오쇼콜라, 마카롱, 에끌레어. 누구처럼."

빤히 보는 아라를 의식한 그는 피식 웃었다.

"정작 기억에 남는 건 버젓이 간판을 내건 Paul 아닌 우연히 들어간 허름한 동네 빵집이더라는. 요는,, 이름 모를 낡고 빛바랜 건물들이, 랜드마크만큼이나 시선을 사로잡는다는,, 드러나지 않았다 뿐이지 건축 이래로 수많은 사연들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을 테니."

베네토 거리를 등지고 스페인 계단으로 향하는 이름 모를 거리와 건물들은 진호의 눈과 발을 쉽사리 통과시키지 않았다.

"삼십 대 초반의 소프라노는 몇 명이나 될까?"

못마땅한 표정을 앞세워 그가 물어 오자 아라 역시 물러서지 않았다.

"공연차 파리 갔다던,, 오늘인가?"

힘을 준 아라의 손끝에 자신의 가슴팍이 닿을 듯 말 듯 하자 그는 발 하나를 뒤로 물렸다.

"그런 거 아니래도."

"아니긴, 때아닌 뒷걸음질은 뭘까? paul도 더군다나 파리도 아닌데 뜬금없는 연상학습은 대관절 뭘까? 읊어봐요. right now!!"

몸으로 막아서진 않았지만 목소리는 단단히 막고 있었다. '우물쭈물 넘어갈 생각하지 마.' 하듯.

"엉뚱한 사람이란 거 깜박했네."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라도 한 것처럼, 현실 세계를 향해 그는 성큼성큼 걸었다. 그런 그를 종종걸음으로 쫓느라 아라는 여간 분주한 게 아니었다.

"이렇게 엎는 게 어딨어?"

"살아보면 어떨까? 했다는.. 그게 다라고."

"누굴 바보로 알지."

"그런 집 없었냐고? 그랬던 적 없었냐고?"

"응.. 집을 지어준다는 이는 있었지. 건축사 되었다 들었거든. 그게 고백인 줄도 모르고,, 1학년 때인가? 매일 갖고 다니는 스케치북을 훔쳐봤는데 몇 장을 넘겨도 죄다 선뿐이잖아. 짧은, 중간, 긴 선들,, 해서 '설마 그 집이 관은 아니겠지?' 하며 놀렸더니 선과 선이 만나 비로소 면이 완성되는 거라고 울그락불그락하길래, 그걸 또 트집 잡았지. 이럴 줄 알았으면 좀 잘할걸.. 지인 할인도 물 건너갔고, 이 또한 나의 업보인가?"

추임새 하나 없이 진호는 빤히 바라만 보았고, 그런 그의 눈동자 속으로 아라는 빨려 들어갈 듯한 기세였다.

"그니까 나의 wanna be는 너무 아픈 사랑 대신 쨍한 사랑 하라고. 타고난 그 목소리처럼."

마치 자석의 N과 S극처럼 딱- 붙은 그들의 시선은 좀처럼 떨어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그린 북> 영화 봤어요?"

"토니와 셜리 박사의 아름다운 동행."

원하던 답은 다른 것이었나 보다. 진호는 묵묵부답이었다.

"저기요!!"

"꼭 우리 같아서."

"응?"

그가 던진 화두를 곱씹으며 아라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러기를 얼마, 잠시나마 감고 있던 두 눈을 커다랗게 만들어 그에게로 들이밀었다.

"오. 정말!! 당신은 셜리 박사, 나는 토니."

입꼬리를 올린 채로 손뼉을 치는 모양새는 들뜬 기분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가만히 보던 시선을 뒤로하고 진호는 입술을 떼었다.

"노선 이탈하지 말고 지금처럼 잘 부탁해요."

"에둘러 말하지 말고."

뜬금없는 그의 의도를 분명히 파악하고자 아라는 웃음기를 지운 채로 물러서지 않았다.

"적어도, 아쉬움의 포옹은 할 수 있을 테니."

결국, 선을 넘지 말자는 얘기 아닌가!! 하아~,, 아라는 작은 숨을 토해냈다. 뱉은 숨의 기운이 그에게 닿기 전, 간결하면서도 빠르게 입장을 표명했다.

"'남녀 사이 친구는 없다'.. 연애 철학인지라. 노선 이탈은 물론 안전 운전할 테니 걱정 말아요."

"기분 상한 건 아니죠?"

"무슨. 아리송한 것보다는 확실한 게 낫지. 썸보다는 쌈이지. 우린 그게 더 잘 어울려."

손을 뻗으면 닿을 만큼 가까운 거리였지만 그가 내리 그은 선은 뾰족한 창살이 되어 그들 사이를 가로막고 있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에 아라의 심장이 발밑까지 쿵- 내려앉았다.


"A형이죠?"

말없이 바라보는 진호의 시선에 아라는 제 눈을 얹었다.

"곱슬머리에 옥니는 아니고, 그럼 A형이란 얘기니.. 종잡을 수 없는 인간형."

분명 표정 하나 없던 그의 얼굴이었다. 어느 틈에 제 멋대로 실주름이 잡히더니 호탕하게 웃었다.

"예전 직장 상사가 그랬었거든. 시도 때도 놀려대길래 작정하고 맞섰더니 삼 일이었나 벙어리 삼룡이 하더라고. 21세기에 혈액형이 뭔 말이더냐? 했었는데, 부러 책 들춰가며 연구를 좀 했죠. 무튼 A형은 복잡해."

"곱슬머리에 옥니는 누구예요?"

"사촌 언니. 정확히 말하면 반곱슬머리. 고집도, 어디로 튈 줄은 더더군다나 모르겠는. 이모 표현으로 일명 웬수."

"나대지에 문제가 생겼구먼."

"그 언니는 친가, 여긴 외가. 왜 자잘하게 사고 치는 스타일 있잖아요. 딱."

후훗- 웃는 진호를 보며 확실히 못을 박듯.

"동료 얘기 재차 물은 탓에 선 긋는 거잖아."

"거 아닌데."

"그거 밖에 없거든."

물러설 줄 모르는 아라의 시선을 외면할 수가 없었나 보다.

"저울질은 자신이 없어서.. 말하지만, 지금이란 말은 아니니,, 오해 말고. 그런 통계가 있어요. 예쁜 여자 그리고 매일 버스에서 만나는 여자, 남자의 호감은 어디로 기울까요? 놀랍게도 후자래요."

"어쨌거나 나랑은 친구만 먹고 싶다는 거잖아. 그렇게 매력이 없나. 하긴 우리가 사는 세상은 다르니까."

입을 삐죽거리며 아라는 일부러 서운한 척을 했다. 그런 아라를 그는 한동안 바라만 보았다.

"나의 다짐 그즈음이라고 해두고."

"끝까지 이러시겠다."

팔짱까지 단단히 낀 채로 아라가 시위 아닌 시위를 해오자, 튕기듯 진호는 받아쳤다.

"직업상, 혈액형상 매력 있는 남자 아니잖아."

"어? 어!!"

"좋아하는 스타일 읊어봐요. 주변에 있나 찾아나 보게."

"진심인가 보네. 좋아하는 여자한테 친구 소개 안 한다며. 남자들은 그런다던데."

치-,, 진심인지 장난인지 아라의 입에서 때아닌 바람 빠지는 소리가 새어 나왔다.

"괜한 얘기는 해서 애매해졌네요."

멋쩍었는지 코끝을 쓰는 그를 보며 아라는 톤 하나를 높였다.

"덕분에 마지막 퍼즐을 완성했어요. 혈액형 빼고 다 알았거든. 혈액형 확인하느라 데이터 쓰기는 좀 아까워서. 찍은 건데 빙고!!"

"어디까지 알아요?"

"이름, 나이, 출생지, 학교, 생일, 정확한 날짜는 아니지만 가을이던데. 이만하면 프로필 꿰고 있는 거잖아."

내내 심각했던 분위기는 아라의 말로 전세가 역전되었고 진호는 웃음을 도돌이표 했다.

"솔직히 말해봐요. 닉네임 뭐예요?"

"원픽 아니래도."

열린 수문으로 쏟아져 내리는 힘찬 물줄기처럼 그는 다시금 웃음을 쏟아 냈고, 그의 말을, 표정을, 웃음을 다시금 곱씹는 아라의 얼굴은 한차례 비가 쏟아질 듯한 하늘의 색처럼 점차 어두워져만 갔다.


"로마 일정도 거의 막바지네요."

"아쉽다."

"둘러볼 곳들 아직이니 서운함은 접어 두고, 교통정리도 끝났으니 각자의 본업에 충실해야죠. 덕분에."

글자 그대로는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면의 뜻을 곱씹어 보면 비아냥거림이 다분했다. 쉬이 넘어갈 수가 없었던지 찌푸린 눈살은 까만 눈동자를 반쯤 내리덮었다. 이를 못 본체 할 아라가 아니었다.

"참고로 말하자면 난 뒤끝 있는 B형. 남은 일정에 참고 부탁드립니다."

끙- 진호는 앓는 소리를 냈고, 아라는 혀를 빼꼼히 내밀었다.

"해서 오늘은 어디로 가나요?"

"회개하러 가셔야죠. 형제님!!"

그에게 대꾸할 틈도 주지 않고 아라는 다리를 크게 벌려 성큼성큼 앞서나갔다. 작정이라도 한 듯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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