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소설] moments_22

- 함께였던 그 모든 순간들 -

by 슈크림빵

"소소해 보이지만 자그마치 30년 이상을 이어온 곳, 올드브릿지를 끝으로 비로소 바티칸 투어는 끝이 난다는."

몇 평이나 될까? 대충 봐도 협소한 구멍가게 수준의 매장 안은 그야말로 북새통이었다. 그렇다고 가게 밖의 상황 역시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정돈된 채 늘어선 대열의 규모로 보아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닌 듯했고, 매장 한편에 붙어 있는 반가운 모국어는 설명했다.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을 맛보게 될 거야.'라고..

"방부제, 착색제 하나 없이, 이탈리아 우유와 엄선된 재료들로 제조한 일명 장인 젤라토. 덧붙이자면 신부님 수녀님의 당충전 맛집이라는."

말끝에 피식- 웃음을 흘리는 아라를, 그냥 두고 볼 진호가 아니었다.

"사연 있는 듯한 그 웃음은 뭘까? 설마 신부님과의 추억이라도?"

"부제 서품식, 독신 서약 전까지는 주의 종은 아직인 거니."

"어! 어?"

"천주교는 이혼을 금지한데요. 해서 늘 관심 밖에 두었다는."

아라의 농에 진호는 단단히 반응을 해온다. 아이스크림을 먹기 전인데도 입꼬리는 눈밑 언저리까지 올라가 있었다. 그런 그의 모습에 아라는 웃음을 감추지 않았다.

"첫 여행 때 민박집에서 만났던 두 살 터울 언니가 아이스크림보다 종업원이라 하길래, 잔뜩 기대했는데 글쎄올시다~였다는, 가족 여행 때는 감기에 옴팡 걸려서 입에도 못 대었는데, 그런 날 두고 어찌나 맛나게들 드시던지. 가족만 아니었으면 싸움 각인데, 그런 기억들이 생각이 나서."

"두 개 먹으면 되겠네 그럼."

"무슨. 세 번째 방문이니 세 개 먹어야지. 피스타치오, 레몬, 초코."

헛웃음만으로는 모자랐는지 진호는 도리질을 곁들였다.

"저 안은 전쟁터, 신속한 주문만이 살길이라는. 메뉴 미리 생각해 놔요."

굳은 의지를 앞세워서일까? 아라는 연신 입을 움직이며 메뉴를 읊어댔고 전염이 되었는지 진호 역시 입술을 달싹였다. 어느 틈엔가 말이다.


"근데 좀 의외였다는."

"바닐라를 안 먹어서?"

수저 가득 담긴 아이스크림을 입 안으로 사라지게 하는 마술 같은 신공을 펼치는 진호를, 아라는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두 교황> 말이에요."

"난 또. 로마가 배경인 영화들을 찾아보다.."

툭- 뱉은 말끝에 그는 수저질을 반복했다. '지금 중요한 것은 바로 이거야'하듯. 컵의 바닥까지 박박 긁어먹고도 모자랐는지 자신의 아이스크림을 슬쩍 곁눈질을 하자, 철통 같은 수비를 하는 아라의 몸사위는 사뭇 비장했다.

"하필 골라도."

"이 집 민트 잘하네. 삼 분 양치한 느낌. 개인의 취향은 존중하는 거지 건드리는 거 아니라는."

"그건 그렇고. 영화 얘기는 갑자기?"

말없이 아라는 고갯짓을 했다. 그녀의 시선을 쫓으니 이내 산탄젤로 성에 맞닿았고, 이에 알겠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더니 피식- 웃음을 흘렸다.

"총, 칼, 대포뿐이었으니 가능한 얘기, 최첨단 무기 앞에선 어림도 없는."

조금씩 고개를 돌려가며 시시각각 변하는 그의 움직임을 따라가 보니 산탄젤로 성으로부터 바티칸까지 이어졌다. 진호의 몸짓이 말하는 의미를 깨닫자 아라의 고개도 덩달아 끄덕여졌다.


passetto di borgo,, 성 베드로 대성당과 산탄젤로 성을 연결하는 800m, '작은 통로'라는 뜻의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비밀 통행로에 담긴 사연은 이러하다.

에스파냐를 점령하고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으로 진격에 오던 이슬람군을 무찌른 프랑스의 샤를 마뉴 대제의 서로마제국 황제 대관식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800년의 일이다. 대관식 후 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지킬 수 있는 새로운 성벽 건설 사업을 명했고, 이에 당시 교황이던 레오 3세(재위 기간 795-816)는 성 베드로 성당과 산탄젤로 성을 연결하는 성벽 건설 사업에 박차를 가한다. 그러나 16년 후 교황의 선종과 함께 성벽 또한 사라져 버렸는데, 새 성벽의 건설로 인한 교황청 권위의 상승효과가 불러올, 로마 자치권의 하락을 염려한 로마인들에 의해서였다.

성벽의 철거는 곧 이교도인 사라센족에게 침략의 발판을 만든 격, 성 베드로 대성전을 약탈한 그들은 사흘 만에 돌아갔는데, 그나마 다행인 것은 베드로 사도의 묘는 파손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에 바티칸 역사에서 846년은 치욕의 해로 기록되고 있다. 반면 아우렐리아누스 성벽으로 둘러싸인 로마 시내는 아무런 피해도 없자 로타리우스 1세는 교황 레오 4세(재위 기간 847-855)에게 다시금 성벽 건설을 명한다. 이로써 테베레 강변의 산탄젤로 성에서 시작해 바티칸 언덕 주위를 빙 돌아 다시 테베레 강변에서 끝이 나는, 총길이 3km, 44개의 감시탑이 세워진 성벽이 완성된다. 이는 바티칸 지역의 지형도 역할뿐 아닌 시작점이기도 했다. 아직 passetto가 만들어지기 전인 850년 경의 일이다.


9세기 중반, 바티칸 지역은 도시 밖에 있었고, 당시 교황청은 라테라노 대성전에 있었다. 성 베드로 광장 오른쪽 열주 회랑 뒤편으로 성문이 나 있는데, 이 성문의 안쪽은 바티칸시국의 땅이고 성문 밖은 이탈리아의 영토였다. 성문 위로는 긴 성벽이, 아래로는 좁은 도로가 나 있고, 고대 로마 시대에는 성곽 주변을 외곽지역이란 뜻의 'borgo'라 불렀다.


적의 침입, 한 발 더 나아가 대피 통로의 용도를 적극 앞세우며 passetto를 건설한 사람은 교황 니콜라오 3세(재위 기간 1277-1280)였다. 15세기에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재위 기간 1492-1503)에 의해 더욱 견고해진 성벽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고, 죄수들을 산탄젤로 성의 감옥으로 이송하는 일뿐 아닌, 교황들의 피난처로서의 역할도 병행했다.


passatto를 통해 교황이 산탄젤로 성으로 달아나는 사건은 역사상 두 차례 일어났는데, 이교도의 침략이 아닌 기독교인인 유럽 군대의 침입이라는 점에서 다소 아이러니했지만, 기독교인의 욕심이 화근으로 작용했다는 데에서 그 의문은 곧 풀렸다.

첫 번째 당사자는 알렉산데르 6세였다. 교황 자리에 오른 그는 성직자의 모습보다는 제 가족 챙기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들에게 온갖 특혜를 제공함은, 로마인들뿐만 아니라 많은 성직자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였다. 무분별적인 그의 권력 남용에 결국 나폴리 왕국의 국왕 페르디난도 1세(재위 기간 1458-1494)가 피렌체, 밀라노, 베니스를 끌어들여 알렉산데르 6세에게 반기를 들자, 교황은 나폴리 왕국을 넘기겠다는 조건으로 프랑스의 샤를 8세에게 도움을 요청한다. 이에 응한 샤를 8세가 보낸 프랑스 군의 규모가 자신이 예상했던 숫자보다 훨씬 많자,,


'혹 나폴리뿐 아닌 이탈리아 전역을 노리는 샤를의 음모는 아닐까?'


지레짐작 끝에, 나폴리 왕국에게 프랑스 군에 맞서라는 얼토당토않은 지시를 내린다. 교황이 반기를 들었다는 소식은 곧 샤를 8세에게 전해졌고 이에 격분한 그는 피렌체를 점령한 프랑스 군에게 곧바로 로마 진격을 명한다. 다급해진 교황은 여러 도시뿐 아닌 오스만튀르크에게도 도움의 손길을 요청했다 하니 급박했던 당시의 상황을 어림잡아 짐작해 볼 수 있다.


교황의 사정은 관심밖의 일이라는 듯, 샤를 8세의 군대는 로마로 입성하게 되고, 시내 곳곳에 불길과 검은 연기도 모자라 성 베드로 대성당까지 진격 소식이 전해지자 신변의 안위가 걱정이 된 교황은 황급히 파세토를 통해 산탄젤로 성으로 피신하게 된다. 결국 왕관의 무게를 버티지 못한 결과였다.


1527년 교황 클레멘스 7세(재위 기간 1523-1534) 때의 일이다. 당시 유럽에서는 프랑수아 1세와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가 가장 큰 세력을 과시하고 있었다. 백년전쟁 이후 프랑스는 왕권 강화와 더불어 국정이 안정되었고, 인구 증가로 인해 점차 유럽의 강대국이자 중심국가로 자리 잡게 되었다. 프랑수아 1세는 즉위와 동시에 군대를 이끌고 밀라노로 진격해 스위스에 대승을 거두고 밀라노를 차지한다. 이를 바탕으로 프랑수아 1세는 북부 이탈리아 롬바르디아지역에 대한 영향력뿐 아닌, 교황 레오 10세와의 볼로냐 협약(1516)을 맺어 프랑스 성직자들에 대한 왕권의 통제력까지 더욱 강화해 나간다. 이로써 그는 즉위와 동시에 커다란 명성을 확보하지만 카를 5세의 등장으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아버지 필립 1세의 사망 후 어머니와 함께 에스파냐 공동 왕위에 즉위한 카를 5세는 뇌물로 포섭한 선제후들에 의해 1519년 신성로마제국 황제로 선출된다. 그는 양쪽 조부모로부터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와 부르고뉴공국의 영토, 남부 이탈리아의 나폴리 왕국, 남아메리카 식민지까지 물려받게 된다. 프랑스 입장에서 보면 북쪽의 잉글랜드를 제외하고는 프랑스와 국경을 맞대고 있는 유럽 전역이 카를 5세의 손아귀에 있다는 것을 의미했으니, 이런 상황은 당연히 프랑수아 1세를 초조하게 만들었고, 나아가 카를 5세와의 전쟁이 불가피함을 알리는 사실이기도 했다.


당시 유럽 각국들은 호시탐탐 이탈리아 반도를 차지하려 했고 이탈리아와 로마 내에서 자국의 영향력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이런 이유로 유럽 각국의 패권 다툼의 각축장이 되었지만, 정작 이탈리아 반도는 십여 개의 작은 도시 국가로 분열되어 있어 외세 침략에 대응하기는커녕 그들 스스로 혼란만 거듭하고 있었다. 이탈리아 반도의 주도권을 놓고 프랑수와 1세와 카를 5세의 패권 다툼이 한창일 당시,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중간에 끼어 아슬아슬한 줄타기가 한창이었다. 그러던 중, 1525년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가 제국군에게 대패한 것도 모자라 설상가상으로 국왕 프랑수와 1세마저 포로로 잡혔다는 소식을 접한 클레멘스 7세는 충격을 받는다.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를 넘어 북부 이탈리아에까지 영향력을 펼치게 되었으니 위협적인 세력이 되고 말 것임이 분명하다.'


해서,, 그는 카를 5세의 세력을 몰아내기 위해 군사 동맹을 결성하기 시작한다. 평소 황제에게 대적하며 親프랑스적인 정책을 펼친, 과거 카를 5세의 신성로마제국 황제 선출에 반기를 들었던 교황 클레멘스 7세, 1521년 밀라노 탈환과 그로 인한 스페인 군에 의한 통치권의 제한에 불만을 품은 프란체스코 2세, 파비아 전투에서 대패한 전적이 있는 프랑스가 합심하여 카를 5세를 향한 반기를 들고 나서게 된 것이다.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프랑스, 교황청이 참여한 일명 코냑동맹은 이렇게 탄생하게 된다.

코냑동맹군이 롬바르디아의 로디 등 북쪽의 이탈리아를 점차 점령해 나가자 가만있을 카를 5세가 아니었다. 특히 자신이 복위시킨 밀라노의 공작, 프란체스코 2세의 배신에 분노하였고 이에 제국군은 곧바로 반격을 가한다. 밀라노를 점령한 후 카를 5세가 스포르차 가문의 통치권을 회수해 버리자 코냑동맹은 흔들리기 시작한다. 파비아 전투의 참상을 떠올린 프랑스는 소극적인 태도로 돌아섰고, 베네치아는 자국의 사정을 핑계 삼아 군대를 파견하지 않았으며, 돌아가는 주변 사정에 반응하여 나머지 도시 국가들도 제국군과의 정면충돌 대신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된다.


이런 사정은 제국군에게 날개를 달아준 격이 되었고, 파비아 전투에서 프랑스의 군대를 무너뜨린 스페인 주둔군과 독일 용병으로 구성된 브루봉 공작이 이끄는 신성로마 제국군 34,000명은 로마 진격의 명령을 받는다. 한편, 북부 이탈리아에서 프랑스 군을 몰아내는데 성공했으나 급여를 제대로 받지 못한 군인들의 불만이 점차 고조되자,,


'로마 교황청을 약탈해 그로 인한 전리품으로 섭섭하지 않게 급여를 줄 테다."


평소 신임이 두터웠던 브루봉 공작의 약속은 한껏 고조된 군인들의 불만을 잠재웠고, 가까스로 반란은 막을 수 있었다. 그러나 독일에서 온 병사들은 스페인 주둔군과는 조금은 다른 생각을 품고 있었다. 루터파 교도인 그들은 종교적인 이유를 들어, 교황의 계략에 의한 전쟁이었음을 깨닫고 로마 점령에 강한 의지를 불태웠다.


가톨릭교도인 황제의 군대가, 감히 로마 그리고 교황령을 침공하지 못할 것이라는 클레멘스 7세의 안일한 생각은 산산이 부서졌다. 제국국은 잔니콜로와 바티칸 언덕 쪽에 있는 성벽들을 공격했고, 그들의 등장에 그제야 교황은 사태의 심각성을 깨닫고 심히 당황해한다. 당시 로마를 지키는 병력은 5000명의 군인과 스위스 근위대뿐, 제국군에 비해 그 수는 적었다. 도시를 감싼 성벽은 단단했지만, 제국군의 포병 부대는 용맹하기로 이름이 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성벽이 함락되던 와중에 브루봉 공작이 적의 총에 맞아 전사하자, 견고했던 질서는 무너지고 만다. 붕괴된 성벽 안으로 물밀듯이 쳐들어 가는 병사들을 통제할 방법은 없었다. 성난 제국군의 움직임에 교황청에서 고용한 용병들은 겁을 먹고 도망치기 바빴다. 전진하는, 후퇴하는 그들이 한데 엉켜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방불케 했다. 그러나 스위스 근위대는 달랐다. 베드로 대성전으로 향하는 길목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500명 중 189명만이, 교황이 베드로 대성당으로 피신하는 과정에서는 겨우 42명만이 살아남게 된다. 교황은 이들에게 조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유했으나 충성 서약을 깨트릴 수 없다는 이유로 끝까지 교황을 위해 싸우며 되레 교황에게 피신할 것을 당부한다. 스위스 근위대의 희생 덕분에 교황 클레멘스 7세는 성 베드로 성당으로 피신한 후 passetto를 통해 산탄젤로 성으로 안전하게 대피할 수 있게 된다.


도시가 불타고, 사람들이 죽어가는 상황 속에서도 산탄젤로 성 안에 갇힌 교황은 손끝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연이은 참담한 비보에 베네치아, 피렌체의 군대는 곧장 로마로 향했지만 카를 5세의 대군에 맞서기엔 역부족이었다.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던 카를 5세의 병사들은 분노와 욕심에 눈이 멀어 베드로 성당뿐 아닌 로마 전역을 약탈하고 불태웠고 추기경과 사제들, 귀족 여자를 가리지 않고 칼로 베고 죽였다. 그로 인해 5만 명을 육박하던 인구는 1만 명으로 줄어들었다. 카를 5세의 군대만큼 끔찍하게 로마를 약탈한 기록은 이전 이후에도 없었다 전해진다.


도시에 낭자한 시체가 썩어 전염병이 돌자, 구 개월 동안 무력을 일삼았던 카를 5세의 군대는 로마를 떠나게 되고 산탄젤로 성 안에 갇혀 있던 교황 역시 오르비에토로 달아난다. 1534년 56세의 나이로 클레멘스 7세는 생애를 마감한다. 이에 로마인들은 기뻐했으며, 그의 죽음을 눈으로 확인하는 이는 물론, 교황의 묘를 습격하는 사건들이 빈번했다.


클레멘스 7세의 사건 이후 파세토의 문은 굳게 닫혔는데, 2000년 새천년의 시작을 축하하는 차원에서의 보수와 수리를 통해 이전의 모습을 조금 되찾게 된다. 파세토는 평소에는 문을 닫지만, 여름 일정 기간에 소수의 그룹 투어를 위해 한시적으로 개방한다. 그리고 이 파세토의 열쇠는 스위스 근위대가 보관한다.


성 베드로 광장 베르니니의 열주 뒤, 사도 궁전과 맞붙어 있는 'Porta San Pellegrino' 게이트는 passetto의 시작점이다. 성벽에서 가장 오래된 문 중 하나로, 과거 순례자들은 이 문을 통해서 성 베드로 대성당으로 들어왔으나, 성 베드로 광장이 건설되며 1563년 폐쇄되었고, 현재는 스위스 근위대 경비병의 막사로 사용되고 있다. Largo del colonnato - Via dei Corridori - Borgo S. Angelo 거리까지 이어지며, 피아 광장 (Piazza Pia)을 건너 작은 숲을 거쳐 산탄젤로 성의 정면이 아닌 위쪽 마르코 요새의 왼쪽 뒷부분으로 이어진다.


일련의 사건들로 인해, 그들의 용맹스러움에 교황청 근위대는 스위스 용병 출신만 뽑는 전통이 생겼으며, 5월 6일이 되면 신참 용병들은 충성 서약을 하는데 이는 1527년 당시 용맹하게 싸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한 선배들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바티칸과 스위스 근위대의 열쇠는 교황 식스토 4세가 쥐고 있었다. 그는 스위스 연방과 동맹을 맺어 근위병 영입의 길을 텄고, 이후 1503년 교황 율리오 2세가 스위스 정부에 200명의 근위병 파견을 요청함에, 1506년 1월 22일 150명의 근위병이 로마에 도착하게 된다. 이날은 교황청 근위대 창설 기념일이며, 율리오 2세는 그들에게 '교회 자유의 수호자'라는 이름을 붙였다고 한다.

근위대의 제복은 미켈란젤로의 디자인이라 알려져 있으나, 실제로는 1910년 당시 지휘관이었던 쥘 르퐁(Jules Repond)의 디자인으로, 르네상스 분위기를 살리려는 취지에서였다고 전해진다.


*로타리우스 1세 - 프랑크왕국 카롤루스 왕조의 4대 국왕이자 카롤루스 제국의 3번째 황제. 중프랑크 왕국의 초대 국왕(신성로마제국의 명목상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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