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글 없는 편지

Piano Sonata No. 1, Op. 11 - R. Schumann

by 레브리 에튀드

안녕하세요, Reverie Etude에 오신 여러분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다섯 번째 작품, <글 없는 편지>을 찾아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1830년대 초, 젊은 작곡가 로베르트 슈만은 그의 인생에 가장 뜨거운 감정을 안겨준 한 사람, 클라라 비크를 만나 사랑에 빠졌습니다. 클라라는 이미 이름 높은 피아니스트였고, 슈만은 음악과 사랑 모두를 함께 나누고자 했지요. 하지만 그들의 사랑은 결코 쉽지 않았습니다. 클라라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는 두 사람의 관계를 강하게 반대했고, 이로 인해 두 사람은 당장 곁에 있을 수 없었고, 편지와 음악으로만 마음을 전해야 했습니다.


이 시기, 슈만은 자신의 내면을 채우고 있던 사랑, 고통, 그리고 예술적 정체성을 모두 음악 속에 녹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클라라와의 단절 속에서 더욱 깊은 감정의 바닥까지 내려갔고, 그 밑바닥에서 끌어올린 결정체가 바로 이 Piano Sonata No.1 in F sharp minor, Op. 11입니다. 사실 이 곡은 슈만의 두 번째 소나타였으나, 그는 더욱 완성도 있고 진심이 담겼다고 생각한 이 곡을 ‘1번’이라 이름 붙이며 먼저 세상에 내놓았습니다. 감정의 무게가 더 컸기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이 곡이 그에게 있어 더욱 ‘진짜’ 첫 고백 같았기 때문이었을까요.


이 소나타는 그의 감정의 심연을 파헤친, 가장 깊고도 고귀한 보석 같은 작품이었습니다. 실제로 슈만은 이 곡의 서문에 프리드리히 실러의 시구를 인용합니다.


“가장 깊은 갱도에서 가장 고귀한 보석을 캐낸다.”
(Im tiefsten Schacht muss man graben nach dem höchsten Edelstein)


이는 단순한 시적 장식이 아니라, 클라라에 대한 사랑을 온전히 쏟아붓기 위해 자신의 가장 어두운 감정까지 마주한 젊은 슈만의 결의를 상징합니다.


처음 1악장을 들으면 마치 누군가 조심스레 말을 꺼내는 듯한 분위기로 시작합니다. 불확실하고 조심스러우며, 한 발 물러서기도 하죠. 그러나 곧 감정은 터져 나오고, 격정적인 흐름이 몰아칩니다. 마치 사랑의 시작과도 같은 두근거림과 혼란, 한마디에 일희일비하는 마음의 첫 파도와 같습니다.


그러다 2악장 Aria에서는 잠시 숨을 고르며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를 기다리는 듯한 부드러운 선율이 흐릅니다. 슈만은 클라라를 그리워하며, 그녀의 음성과 연주 스타일을 떠올렸습니다. 직접 들을 수 없기에 스스로 그 목소리를 만들어낸 거죠. 이 악장은 결핍에서 비롯된 환상이며, 그 환상이 만든 아름다움입니다. 마치 사랑하는 이를 직접 볼 수 없을 때, 그 사람의 목소리와 표정을 머릿속에 재생하는 우리처럼요.


그러나 사랑이란 언제나 변덕스럽고 다채롭습니다. 3악장 Scherzo e Intermezzo에서는 가볍고 장난스러운 순간과 깊고 무거운 감정이 교차하며 사랑의 밝음과 그림자가 함께 공존함을 들려줍니다.


마지막 4악장 Finale는 거대한 파도가 다시 몰아치는 순간 같습니다. 마음이 흔들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가려 애쓰는 모습, 닫힌 문을 끊임없이 두드리는 간절한 손길을 떠올리게 합니다. 사랑을 이루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럼에도 사랑을 믿고 간절히 바라며 나아가는 마음. 이 곡은 그런 결코 쉽지 않은 사랑의 여정을 음악으로 그려내고 있습니다.


사실, 저는 늘 이 블로그에서 음악을 듣고 제 안에서 떠오르는 이야기를 직접 만들어 전해왔습니다. 때로는 상상 속 주인공이 생겨나고, 그들의 감정에 저도 함께 빠져들었죠. 하지만 이번만큼은 조금 다르게 해보려 합니다. 이번 글에서는 제가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19세기 독일 시인 하인리히 하이네가 남긴 한 편의 시를 빌려, 슈만이 느꼈을 사랑과 기다림을 들여다보려고 해요.


하인리히 하이네의 「Declaration」(고백)이라는 시는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을 모래 위에 새겼다가 파도에 씻겨 지워지는 순간을 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름을 영원히 잊지 않으려 하늘에 불꽃으로 새기겠다는 다짐이, 시 전체를 관통하는 진심 어린 고백입니다. 멀리 떨어져 편지와 음악으로만 마음을 전할 수밖에 없었던 슈만의 마음과 닮아, 이 시를 먼저 떠올리면 이번 소나타가 더 깊이 와닿을 거라 믿습니다.


이제, 이 시를 마음에 품고 슈만의 음악 속 이야기를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고백

- 하인리히 하이네 (1797~1856)


어둠이 내려앉은 저녁,

바다는 더욱 거세게 물결쳤다.
나는 해변에 앉아
하얗게 부서지는 파도를 바라본다.
내 마음도 바다처럼 부풀어 오른다.


그때, 그대를 향한 깊은 그리움이 밀려와
아름다운 그대의 모습이
내 곁을 맴돌며 어디서든 나를 부른다.
거센 바람 속에서도,
거친 파도 속에서도,
내 한숨 속에서도,
어디서든…
어디서든…


나는 가느다란 갈대를 꺾어
모래 위에 적었다.
“아그네스여, 나 그대를 사랑하노라”
하지만 장난꾸러기 파도가
그 달콤한 고백을 덮어버려
흔적도 없이 지워버렸다.


약한 갈대여, 흩날리는 모래여,
사라지는 파도여, 이제는 너희를 믿지 않으리!


하늘이 점점 어두워지고
내 마음은 더욱 불타오른다.
이제 나는 저 노르웨이 숲에서
가장 크고 푸른 전나무를 뽑아
불타는 에트나 화산 분화구에 던져 넣는다.


그리고 그 불붙은 붓으로
어두운 하늘을 캔버스 삼아
쓸 것이다.
“아그네스여, 나 그대를 사랑하노라”


매일 저녁 하늘에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이 피어올라
뒤를 잇는 이들이 기쁨으로 외치리라.
하늘에 새겨진 그 말을 읽으며,
“아그네스여, 나 그대를 사랑하노라”




이 작품은 슈만이 클라라에게 시간과 공간의 경계를 넘어 가슴 깊숙이 스며드는 마음을 전한 고백 혹은 편지였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은, 마치 거대한 바다가 내면에서 끊임없이 요동치는 것과 같습니다. 때로는 잔잔하고 부드럽다가도, 어느 순간에는 격렬하게 파도가 부서지듯 마음이 흔들립니다. 그 감정은 완성되지 않았기에 더욱더 아름답고 소중한 것이며, 한 사람으로 인해 세상이 흔들린다는 사실 자체가 얼마나 대단하고도 어려운 일인지 들려줍니다.


말하지 않아도, 그가 눈앞에 없어도 우리는 이 곡을 통해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음표 하나하나에는 설렘과 두려움, 간절함과 혼란이 깃들어 우리 내면의 파도처럼 조용히 출렁입니다. 이 음악을 들을 때면, 사랑에 흔들리는 저를 마주하게 됩니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다가도 어느새 격렬하게 흔드는 감정의 파도는 시간과 세대를 뛰어넘어 지금 여기 우리의 마음에 말을 걸어옵니다.


과거의 슈만도, 지금의 우리도 사랑 앞에서는 언제나 흔들리는 존재입니다.
완전하지 않고, 불확실하며, 가끔은 스스로도 알 수 없는 마음의 파도 위에서 조심스레 균형을 찾아가려 애쓰는 그런 존재이지요.


그래서 이 곡은 단순한 음악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빚어낸 진솔한 고백이자

시간을 넘어 우리 모두가 함께 느끼는 마음의 초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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