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음 어디 갔어요
작년 여름, 독일에서 6개월을 보내게 되었다.
유럽에서 아이스아메리카노를 시키면 미각이 마비된 사람 취급을 받는다는 말을 자주 들었는데
7월이 넘어가니 너무 더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날은 더운데 습하지 않아서 그늘에만 들어가도 너무 쾌적했기에 일요일 아침에 광장에 있는 분수대 앞 카페 파라솔 아래에 자리를 잡았다.
울퉁불퉁한 돌바닥 위에 의자와 테이블이 있었던 탓에, 몸이 살짝 기울었으나
분수대에서 햇빛을 받은 물이 반짝이며 떨어지는 게 너무 예뻐서 그 정도 불편함은 낭만으로 포장할 수 있었다.
주변에는 브런치를 먹는 부부, 가족, 친구들이 많았다.
아무도 휴대폰을 들여다보지 않고 서로 눈을 맞추거나 다 같이 분수대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그림을 그리겠다고 아이패드와 충전기, 보조배터리까지 바리바리 싸들고 온 내가 너무 부끄러워져서 다시 집어넣었다.
메뉴판에 'Eis Kaffee'라는 메뉴가 있어
'역시 분수대 앞에 자리를 잡을 만큼 부유한 카페는 아이스커피도 팔아주는구나' 하고 호기롭게 주문을 했다.
주변 수다를 훔쳐 듣고, 군중 속의 고독을 참지 못하고 한국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해서 안부도 묻고 하다 보니 주문한 커피를 직원이 가져다주었다.
위에 휘핑크림이 잔뜩 올라가 있어서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얼음이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기대하고 벅차오를 준비를 하며 빨대로 음료를 살짝 저었다.
웬걸 빨대가 음료 안에서 고요히 놀았다.
'eis kaffee'의 eis는 얼음이 아니라 아이스크림의 독일어였다.
에스프레소에 우유, 바닐라 아이스크림, 그리고 휘핑크림.
죽어도 커피에 얼음은 못 넣겠다는 의지인가 싶어 실소가 나왔다.
하지만 평소에 새로운 음료를 시도하는 걸 좋아했기 때문에 좋게 생각하고 마시기로 했다.
내가 모르고 주문한 거니까 할 수 있는 게 없긴 했다.
얼음의 달그락거리는 소리는 없었지만 부드럽게 시원했다.
아이스아메리카노는 머리를 시원하게 긁어 나를 깨우는 느낌이라면 아이스커피는 나를 부드럽게 감싸서 쓰다듬으며 깨워주는 듯했다.
나는 사실 달달한 커피를 즐겨마시는 편은 아니다.
라테도 시럽 없이 담백하게 우유만 들어간 걸 마시고, 달달한 걸 먹고 싶으면 스무디나 프라페같이 아예 '달기 위해 만들어진 음료'를 마셨다. 하지만 커피를 쓴맛 하나 없이 마실 수 있는, 언뜻 보면 커피같이 생기지도 않은 이 음료에
마치 어른이 되고 싶어 안달복달하는 어린아이가 떠올랐다.
무엇이든지 다 알고,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엄마를 동경하는 작은 여자아이,
엄마 화장품에서 빨간 립스틱을 훔쳐다가 바르고,
선글라스를 얹고 어른처럼 머리를 올려 묶은.
또각또각 소리가 경쾌하던 엄마가 중요한 날 신는 빨간 하이힐을 꺼내서 발을 조심스레 넣는다.
굽이 바닥에 끌려 원하는 소리가 나지는 않지만 시야가 높아진 게 제법 어른이 된 기분이다.
지갑에서 신용카드를 꺼내 커피를 주문하며 '신용카드로 주문할게요'라고 흉내를 내는,
그런 아이가 떠오르는 음료였다.
커피를 마시는 어른이고 싶지만 아직 커피의 쓴맛을 즐길 만큼의 어른은 아니어서,
에스프레소의 쓴맛을 거의 완전히 지우지만 '커피를 마신다'라고는 할 수 있는 음료를 마시는.
하지만 먼 훗날 진한 커피에 권태를 느끼는 어느 날에 이 음료를 시키고는 어릴 때는 단걸 참 좋아했다며 웃음 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