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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페롤스프릿츠, 선명한 주황빛 묘약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게 아페롤 때문인지 얘 때문인지

by 만두


여름의 유럽을 돌아다니다보면

길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이 밝은 주황빛 음료를 마시는 모습이 보인다. 같이 교환학생을 간 언니가 다 저걸 마시길래 웨이터한테 물어보고 왔다며 이름을 알려주었다.


유럽에 섞이고 녹아드는 듯한 느낌이 중독적이었던,

나도 이들 중 하나가 된 듯한 착각에 빠져들게 했던,

아페롤스프릿츠에도 그렇게 떠올리면 한없이 그리운 추억이 생겼다


유독 나는 유럽에 대한 향수가 진하다.

고작 6개월이었지만, 내가 항상 갈망했던 모습의 사랑을 했기 때문이다.


가장 쨍하게 남은 주황빛 기억.


4월에도 로마의 햇볕은 너무 뜨거웠다

하지만 추운 겨울에 지쳐있었기 때문에 햇빛이 피부 사이사이에 스며드는 기분을 즐겼다.


다섯명이서 왁자지껄 함께였으나 유독 선명히 보이는 한 사람이 있었다. 내가 보는 곳마다 있는건지 내가 나도 모르게 이 사람을 쫓는건지 알 수 없었다.


온 세상을 파스텔로 뭉개놓고 이 사람만 마커로 꾹꾹 눌러 종이 위에 그려 새긴 것 같았다. 약 11개월이 지난 지금 그 당시를 되돌아보면, 파스텔은 더 뭉그러져 조화롭게 빛이 바랬지만 마커는 여전히 굵고 선명하다.


수많은 미술도구 중 그를 설명하기에 마커를 고른 이유는, 마커의 진하지만 둥근 팁 때문이다. 이 사람을 설명하는 것이 무엇이던 간에 그것이 날카로워서는 안된다. 예민하고 뾰족한 나와는 달리 정말 뭉근한, 환하게 웃으면 정말 가장 무해한 사람이기 때문이다.


로마의 뙤약볕 아래서 나는 이 아이가 웃을 때 같이 웃고 이 아이가 그늘에서 땀을 식힐 때 따라 그늘로 들어갔다. 햇빛이 세다며 양산을 펴면 같이 양산 쓰는거 정도야 거리낌 없는 이성관을 가진 사람처럼 태연하게 양산 아래로 들어갔다. 그렇게 낮을 보냈다.


더위는 사라지고 공기가 멈춰있는 듯한 유럽의 저녁이 되었고, 우리 다섯은 야경을 보겠다며 지친 발을 이끌고 숙소에서 나와 식당으로 갔다.


야외에 테이블을 쭉 늘어놓았고 건물 벽의 조명들은 밝게 빛나고 있었다.

Stephen Sanchez의 'Until I Found You'가 스피커로 흘러나오고 있었고

사람들의 식기가 달그락 거리고 잔이 부딪히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사람들이 웃음을 터트리고 떠들어도

공기가 일정 데시벨 이상의 소리를 잡아먹어 백색소음 수준으로 맞추는 듯했다.

아무도 유독 시끄럽지도, 특별히 조용하지도 않았다.


우리도 고기를 썰고, 잔을 부딪히며 얘기를 나누었다.


유럽에 있는 6개월 내내 아페롤 스프릿츠를 틈만 나면 마셔댔지만

이때 시킨 아페롤 스프릿츠가 유독, 정말 유독 진한 주황색이었고 투명한 얼음과 섞여 유난히 반짝거렸다.


유럽 사람들이 다 마시고 있어서 좋아했던 아페롤 스프릿츠가

그때는 다섯명 중 우리 둘만 주문했기 때문에 특별하게 느껴졌다.


뭐가 그렇게 웃겼는지 계속 웃음이 비적비적 나왔고

머릿속을 헤집어 얘를 웃게 만들만한 말들이라면 무엇이든 꺼내놓았다.


웃을때 보이는 작은 덧니와

약간 삐뚤어진 입꼬리,

동공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정도로 헤실대는 눈웃음을 보고 싶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렇게 로마의 밤은 서로 긴밀한 눈맞춤을 주고 받으며 지나갔고,

그때의 음악과 식기 소리, 사람들의 낮은 웃음소리들이 한데 섞여있던

그 감각은 아직까지도 나를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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