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져갈 이삿짐을 꾸려 보니 많지 않다. 나와 작은 아들의 옷과 책, 내가 썼던 이불, 이게 거의 다였다. 작은 아들은 주말에 이 집에 온다는 조건으로 같이 나가기 때문에 아들 썼던 이불은 놔둬야 한다.
작은 아들 책상 정도는 들고 가고 싶지만, 놓을 공간이 마땅치 않아 아쉽다. 지난달에 산 전기밥솥, 새로 바꾼 지 얼마 되지 않은 압력솥으로 나도 모르게 향하려던 눈길을 돌렸다.
"내게 자유만 달라,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라고 했던 초심. 그래 작은 욕심들은 내려놓자. 몇 푼 된다고...
벽에 걸려있는 2개의 퍼즐 액자로 눈이 간다. 3년 전쯤에맞춘 1000조각의 퍼즐. 하나는 내 마음을 사로잡은그림의 퍼즐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조카가 자신의 성격을 고치려고 사서 맞추다가 성질이 더 나빠지겠다며 내게 준 한라산 백록담의 그림이다. 이곳에 걸어둔다고 쳐다볼 사람도 없을 텐데. 아니, 그건 핑계인 것 같고, 혼자서 한 조각 한 조각 직접 맞춘 거라애착이 가서라고 해야겠지. 두 아들과 같이 맞춘 500조각, 700조각의 퍼즐들은 손대지 않고, 이 2개만 벽에서 떼어내어 이삿짐에 포함시켰다.
(두고 올 수 없어, 챙겨 온 2개 퍼즐 액자입니다)
반년 전부터 오늘의 이 순간을 생각하고는 틈 나는 대로 옷들을 정리하면서 버리고 또 버렸다. 살 때는 맘에 들어 샀을 옷인데, 몇 번 입어보지도 않고 그냥 옷걸이에 주렁주렁 걸려 있는 것들이 적지 않았다. 과감히 냅다 버리면 좋으련만 무슨 미련인지 손에 들었다 다시 옷걸이에 걸어둔다. 비운다는 게 결코 싶지 않다. 시간 간격을 두며 단계적으로 버린 결과 옷가지 수를 반 정도로 줄였다.
물론 버린 것은 옷뿐만이 아니다. 책장에도 먼지가 수북한 책들이 많이 꽂혀 있었다. 한 때는 평생 소중히 할 듯 읽고 또 읽었던 책들이지만, 지금은 그 어떤 정열도 관심도 주지 않고 그저 자리만 지키고 있는 수많은 책들. 기억 속에 남지 않은 오래전에 읽은 책, 언젠가 읽을 거라고 생각하며 사둔 책, 박사 논문 집필할 때 적은 노트들은 쓰레기장으로 향했다. 그리고연구에 필요할 것 같은 책은 학교 연구실로 몇 번에 나눠 가져갔다.
옷장에 있던 이불, 아이들 옷이며 책들, 정리하고 처리했다. 냉장고 안도 뒤엎었다. 유통기한이 훌쩍 넘어버린 것. 냉동실 구석에는 무엇인지도 알 수 없는 비닐봉지 덩어리들이 있었다.
2주간, 아주 먼 데로 떠나 돌아오지 않을 사람이 하는 것처럼, 내가 벌려 놓은 곳들을 정리하고, 내 흔적을 지울 수 있으면 지우려고 했다. 그래서 이사하기 전날까지 정리하고 버리는 작업의 연속이었다. 아파트 청소 이모에게 죄송하리 만큼 쓰레기를 내놓았다.
이삿짐은 내 차로 두 번 옮기면 될 정도의 분량.
이사하던 날, 나는 아침에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작은 아들을 7시까지 학교에 데려다주었다. 차 안에는 전날 밤에 잔뜩 실어놓은 이삿짐이 있어서, 아들에게 앉을 공간을 겨우 만들어 주었다. 아들을 학교에다 내려놓고 바로 이사 갈 집으로 직행했다. 짐을 풀어놓고 또 한 번 가서 남은 짐을 가져와야 했다. 남은 짐을 다 꺼내고 나오는데, 악수하며 그동안 "미안했다!" "고마웠다!" "행복하게 잘 지내라!"라는 아름다운 광경은 역시 영화 속에서나 볼 수 있고, 그는 자기 방에서 얼굴도 내비치지 않았다. 내 안에서도 그 어떤 감정도 일지 않고, 담담히 15년간 살아왔던 집과 이별을 고했다.
살 집은 작은 아들이 방과 후에 다니는 학원 근처로 했다.
초라한 마음이 들까 봐, 아니면 최소한의 자존심을 (내게? 아들에게? 타인에게?) 보이고 싶어서였을까, 몇 푼 아끼려고 낡은 아파트로 들어가기는 꺼려졌다. 그래서 신축한 지 1년 된 방 두 개짜리 아파트를 월세로 임대했다.
24평이라고 하는데, 실 내부 면적은 11평이었다. 방 두 개, 거실, 부엌, 베란다. 두 개의 방 중, 침대가 좀 큰 방을 작은 아들에게 쓰게 했고, 나는 작은 침대 방을 썼다. 내가 쓰는 방은 명상 수련장에 가서 사용했던 방을 연상하게 했다. 작은 옷장과 1인실 침대, 그리고 옷장까지 걸어갈 수 있는 좁은 공간.
작은 아들은 집이 좁아 걸어 다니기 힘들다고 불평을 늘어놓았다. 전에 살던 아파트의 1/4 정도의 면적이라 좁게 느껴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아들은 실제 책상, 테이블, 침대 모서리에 다리가 끍혀 몇 군데 상처가 나 있었다. 약을 발라주고, 서둘러 보호대를 사다가 가구 모서리에 붙여놓았다.
나는 이 아파트가 조금도 불편하지 않고 오히려 넓게 느껴졌다. 11평이 모두 내 공간이라는 생각에 그저 좋아 거실 소파에 앉아 절로 싱글벙글한다. 좁은 집의 장점은 의외로 많았다. 그중 하나가 청소를 순식간에 마칠 수 있다. 매일 청소기를 돌렸다. 이 공간이 너무 사랑스러워 깨끗함을 유지하고 싶어서였다. 출근할 때도 문을 닫기 전, 돌아서서 집 안을 바라보며 씨익 웃는 내가 있다.
이사 온 후 일주일 동안은 퇴근 후에 매일 그릇, 냄비, 가전제품 등의 생활필수품을 사러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피곤하기는커녕 즐겁기까지 했다. 부엌살림들을 사러 다니다 보니 자취생활을 막 시작했던 스무 살 사회 초년생 때가 생각났다. 대학 기숙사에 사는 큰 아들이 가끔 오니까, 식기들을 3개씩 사다가 놓다 보니 정말 자취 생활로 돌아간 느낌이었다. 일주일이 되던 날, 처음으로 밥을 해서 아들과 둘이서 같이 먹었는데, 꿀맛 같았다. 아들도 맛있게 먹어 주었다.
9월 둘째 주 학교 개강 후, 별거를 선언하고 2주 후에 집을 나온 거라, 이사오기 전까지는 살던 집 정리하는 데 정신이 없었다. 이사 온 후 필요한 것은 살면서 하나씩 장만하자고 생각했고, 아직도 부족한 게 있지만, 서두를 필요 없다.
이 아파트에 매료된 것은 바로 16층에 있는 옥상이다. 하루는 이불 빨래를 널러 왔다가 한눈에 홀딱 반해 버린 곳. 집을 보러 왔을 때 옥상은 소개 대상에서 빠져 있었다. 이곳에서는 가오슝 시가가 한눈에 보이며 가오슝에서 가장 높은 산도 여기에서 볼 수 있었다. 특히 아침, 저녁의 노을 정경을 맘만 먹으면 언제나 이곳에서 볼 수 있다는 것에 기쁨과 감동으로 가득했다.
게다가 테이블이 몇 군데 놓여 있어서 강의 없는 날에는 여기에 와서 책을 보기도 하고 명상을 하기도 했다. 늦은 밤에 와서 산책하기에도 안성맞춤이었다. 이렇게 좋은 공간을 이용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나 혼자 전용 공간이 된 듯했다. 그래서 내가 사는 공간은 11평이 아니라 30평은 훌쩍 넘겠다고 생각하며 흐뭇해했다.
이곳에서 나는 종종 세상의 모든 잡음에서 떠나, 오로지 내 심장 박동 소리만 들리는 고요함, 평온함에 잠기곤 했다. 그 속에서 마음이 치유됨을 느끼며 감동이 벅차오르기도 했다.
(여기는 늘 조용했어요.)
(아파트 옥상에서 보는 저녁노을과 가오슝에서 유명한 산(壽山))
생각지 않은 편리함도 있었다. 아파트 바로 뒷골목에 역사 깊은 시장이 숨어 있었다. 가오슝 지역의 시민이라면 다 알만한 곳인데, 이사 온 후 1주일이 지나서야 알았다. 아침에는 전통 시장이 열려 식재료를 구매할 수 있었고, 저녁 시간이 되면 조그마한 규모의 야시장이 열리는 것이었다.
작은 아들은 밤에 공부하다 배가 고파 나가면 언제든 먹을 걸 살 수 있다며 신기해했다. 여기에 살면서 야식을 안 먹고는 못 배기는 듯했다. 구운 어묵 등을 사 와서 세상을 다 얻은 듯한 표정으로 먹으면서 여기 오래 살다가는 살이 찌겠다고 행복한 걱정을 하곤 했다.
그래, 살아가면서 이럴 때가 있어도 좋지.
(아침 6시부터 오전까지의 모습)
(오후 4시부터 밤 11시까지의 모습: 이 가게는 어묵을 파는 곳으로 인기 최고)
일본의 경제학자인 오마에 겐이치는 인간을 바꾸는 방법은 3가지뿐이라고 했다.
시간을 달리 쓰는 것
사는 곳을 바꾸는 것
새로운 사람을 사귀는 것
이 3가지 방법이 아니면 인간은 바뀌지 않는다 했다.
이제 나는 사는 곳이 바뀌었다. 이 변화는 단순한 물리적인 공간 변화가 아니라 인생 후반전의 변화의 서막이 될 거라고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