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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경보 Sep 07. 2024

작지만 큰 성취감

대학 1학년 때 잊을 수 없는 일이 있었다. 필수 과목에 “고전”이란 과목이 있었다. 그 과목을 담당하신 교수님은 아주 잘 생기셨고 품위 있는 60대 남 교수님으로,  종종 기모노를 입고 오셔서 강의를 하셨다. 그런데 그 교수님이 사용하신 강의 자료는 알 수 없는 글자로 새겨져 있는 프린트물이었다. 그 글자는 고대 일본어로서 현재 가나가 만들어지기 전에 사용된 글자체인 만요가나(万葉仮名)로, 작가에 따라 글자체가 다르고, 글자들이 흘려 쓰여 있어서 한 글자가 어디에서 어디까지인지 판독 불가였다. 같은 반 일본 학생들은 고등학교 때 접해본 적이 있어서 내용을 아는 듯했다. 




중간고사를 본 후, 나를 포함한 많은 유학생들은 교수님으로부터 경고문을 받았다. 기말고사를 제대로 보지 않으면 학점을 줄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과락이 있거나 점수가 어느 일정 수준에 달하지 않으면 수업료 면제 대상에서 제외되기 때문에, 배려심 깊은 그 교수님께서 유학생들에게 그런 러브레터를 보내신 것이었다. 그 경고문을 받고 나는 두려웠다. 1과목 때문에 수업료 면제를 받지 못하면 아르바이트를 두 배로 늘려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그 강의가 있는 날이든 없는 날이든, 매일 아침 학교 가기 전 30분씩 그 읽지 못하는 강의 자료를 펴 놓고 읽고 또 읽으며 한 자 한 자 외워 나갔다. 그렇게 2달을 했고, 기말고사 일이 다가왔다. 




기말고사 시험 후, 성적이 메겨진 시험지를 우리들에게 돌려주던 그날도 교수님은 기모노 차림이었다. 내 이름이 불리고 교단 앞으로 갔을 때, 앉아서 호명하시면서 시험지를 돌려주시던 교수님께서 갑자기 일어서더니만, 내게 고개를 숙여 예를 표하고 나서 시험지를 건네주시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이 학교에서 30년 가깝게 교편을 잡아 왔는데,  유학생이 이 시험에서 이 점수를 받은 건 처음”이라며, 내게 존경의 표를 한다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 시험에서 1문제를 틀렸다. 그 1문제는 교수님께서 깜박하셔서 배우지 않은 범위에서 출제된 문제였다. 그 과목의 학기 성적은 평균 점수가 아니라 기말고사 성적에 기반되어 있었다. 




하루에 30분씩 매일 읽고 또 읽어서 얻은 성취감은 내 유학 생활에 매우 소중한 체험이 되었고, 지금도 그날의 일을 선명히 기억하고 있다. 나도 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긴 순간이었다. 스터트 라인에서 나는 다른 학생들보다 뒤처져 있었지만, 하루에 30분 더 공부한 덕분에 훌륭한 성과를 얻었다. 


그때의 마음가짐 덕분일까? 유학 시절에 심각한 열등의식, 우울증, 질투심 같은 감정으로 크게 힘들었던 기억이 거의 없다. 아니면, 하루하루가 강의와 아르바이트로 메꿔져 그런 감정을 겪을 겨를이 없었던 것일까? 시간이 많이 흘러 선명히 다 기억할 수 없지만, 그런 감정에서 피로를 느꼈던 기억들은 거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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