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야심경을 들으며 지하철역으로 달려갑니다. 독실한 불교 신자냐고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살려고 듣는 겁니다. 내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려고요.
핸들 잡고 10쯤 반야심경을 들으며 작은 아들을 맞이할 준비를 합니다. 아들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거울로 제 표정을 점검하고, 저는 마치 면접실에 앉아 있는 면접생처럼 테스트를 받곤 합니다.
"엄마, 표정이 왜 그래?"
"내 표정이 어때서?"
우리 둘이서 자주 오가는 대화입니다. 내 표정이 그렇게 안 좋은가? 혼자 있을 때 거울을 들여다봅니다. 남들한테는 "인상이 좋다." "고상하다"라는 말을 듣는데. 어제 아침에 세수도 안 한 채로 공원에서 맨발로 걷고 있을 때도 한 아저씨가 저보고 "고상하다"라고 말했는데...
그런데 작은 아들은 왜 자꾸 제게 표정 타령, 말투 타령을 하며 시비를 거는 걸까요?
곰곰이 생각해 보았습니다. 작은 아들이 일부러 나를 골탕 먹이려고, 내 마음에 불을 집히려고 하는 말이 아니라, 그의 눈에 포착된 걸 솔직히 표현하고 있겠죠.
고백하자면, 전 작은 아들을 보면서 마음이 불편할 때가 적지 않습니다. 반야심경을 들으며 평온한 마음으로 역에 도착했건만, 역 앞에 서서 기다리는 아들 모습을 보는 순간 마음이 울렁거리기 시작합니다. 외투를 쓰레기처럼 손에 들고 있으며 외투 한쪽 팔이 땅에 닿아 있고요. 차 안으로 들어올 때 보면 어깨에 메고 있는 가방이 다 열려 있습니다. 학교에서부터 지하철을 30분간 타고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가방을 연 채로 온 걸 생각하면 방금까지 호수 같았던 마음은 어디론가 자취를 감춰 버리곤 하지요. 그런 마음을 감추려 애쓰지만, 선천적으로 칼날 같은 관찰력을 갖고 태어난 아들은 그런 내 마음을 표정에서 읽는 것일 겁니다.
왜 말하지 않냐고요? 왜 말을 안 했겠습니까? 가방 잘 닫으라고 하면, 왜 가방을 닫아야 하냐고 되묻습니다. 가방 안에 귀중품이 있는 것도 아니고, 몸을 숙일 때는 조심한다고. 고정관념을 버리라고 오히려 조언합니다. 목욕 후에 문을 열고 환풍시키라고 하면 왜 환풍을 시켜야 하는 이유를 말하라고 합니다. 외출할 때 에어컨, 선풍기, 등불을 하나도 끄지 않고 몸만 나오는 걸 보고는, 뒤돌아 좀 점검하라고 하면, 그 지적은 귀로 들어가지 않고 내 표정, 말투에만 온갖 촉각을 세우며, 왜 말투가 그러냐고 화를 냅니다. 그러면 "내 말투가 어때서?" 하고 반문을 하고요.
친구에게 이런 일상을 하소연했더니, 대학에 들어가면 괜찮을 거라고 하더군요. 그러기를 바랍니다. 큰 아들은 엄마가 동생에게 너무 잘해줘서 그렇다고 합니다. 버릇을 잘못 들였다는 거지요. 작은 아들은 하루는 심각한 표정으로 제게 정신과에 가서 진료해 보라고 조언을 하더군요. 그런 아들에게 너 앞에서만 그런 불편한 마음이 생긴다는 걸 말하지 못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