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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달 Jun 25. 2024

경주 최 씨 동상이 왜 부산에?

해운대 동백섬에서 만난 최치원 선생 이야기


동백섬에서 그분을 만나다


부산, 해운대 해수욕장이 시작하는 곳에 동백섬이 있다. 

동백섬에는 이름처럼 동백나무가 많이 있다. 이름은 섬이지만, 오래전부터 육지와 이어져 있어, 걸어서 섬을 둘러볼 수 있다. 해운대의 모래사장과 바다를 내려보는 조망이 멋져 많은 분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이곳에는 중요한 장소가 두 곳이 있다. 

누리마루와 웨스틴조선호텔이다. 얼마 전, 웨스틴조선호텔에서 회의가 있었다. 회의를 마치고, 동백섬을 산책하는 시간을 가졌다. 정상회의가 열렸던 누리마루는 종전에 가보았던 곳이라, 이번에는 둘레길을 산책했다.


둘레길을 산책하다가, 동백섬 언덕으로 올라가는 길을 따라 걸었다. 

중턱에서 낯익은 분을 만났다. "고운 최치원 선생" 유적지와 기념동상이 있었다. 나의 본관, 경주 최 씨 집안의 시조로 알려진 분이다. 그런데, 경주 최 씨 시조인 분의 동상이 왜 경주가 아니라 부산 해운대에 세워졌을까? 의아했다. 궁금했다.



동백섬 둘레길에서 최치원 선생 유적지로 올라가는 입구


동백섬 제일 높은 곳에 있는 '고운 최치원 선생' 동상





한류문화의 시초?


'최치원 선생'은 9세기 통일신라 말기의 학자이자, 관료이다.

자는 고운(孤雲), 해운(海雲), 경상북도 경주에서 태어났다. 선생이 태어난 경주최 씨 집안은 '6두품'이었다.

당시 신라는 '골품제'라는 엄격한 신분제가 적용되는 사회였다. 성골, 진골은 모든 관직을 할 수 있었지만, 6두품인 경우에는 관직에 나가는데, 여러 가지 제약이 많았다. 


이런 신분제의 한계를 벗어나기 위해, 선생은 12살 어린 나이에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다. 

18세에 당나라 과거 시험에 합격해  '율수현위'라는 벼슬을 하였다. 25세에는 '토황소격문'(반란군의 지도자, 황소를 꾸짖는 격문)을 지어 당시 당나라 문단에 엄청난 파란을 일으켰다. 이어서 시어사 벼슬과 자금어대를 하사 받았다고 한다. 외국 사람으로서 젊은 나이에 얻은 큰 영광이었으며,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고 한다.


당나라에서 이렇게 능력과 업적을 인정받은 선생은 29세에 고국으로 돌아왔다. 

고국에서도 자신의 업적을 인정해 주리라 기대했지만, 귀족들(성골, 진골)의 경계와 미움을 받았다. 그 결과 하급관리인 '태수'로 지방을 전전하게 되었다. 37세에는 정치가 우선해야 할 과제(시무 10조)를 임금에게 올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미 기울어가던 국운을 구할 수 없음을 알고, 40세에는 벼슬을 버렸다. 그 후, 방랑의 몸이 되어, 전국 여러 곳을 돌아다녔다. 그러면서, 역사에 남을 많은 명문과 명시를 남겼다. 


뒷날 고려 시대에 이르러 선생을 '해동유학'의 시조로 받들고 '문창후(文昌侯)'라는 시호를 내렸다. 마침내 선생의 도덕과 학문을 높이 숭상하기에 이르렀다고 한다.






경주 최 씨 동상이 부산에?


당나라 벼슬을 마치고, 신라로 돌아온 최치원은 국내 정치를 바꾸기 위해 10가지 개혁안이 담긴 시무책을 진성여왕에게 올렸다. 하지만, 당시 지배층인 진골 귀족들이 반대해 실행되지 못했다.


이에 좌절을 느낀 최치원은 40세 무렵 관직을 버리고, 이곳저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산과 강, 바다를 다니며 글도 쓰고, 책 읽기도 하였다. 그러던 과정 중에, 가야산 해인사로 가기 전에 해운대 해수욕장과 연결된 동백섬에 머물렀다.


동백섬에 머물던 어느 날, 주변에 바다와 구름을 보고, 달과 산을 바라보니, 경치가 너무 아름다웠다. 이에 최치원은 동백섬 남쪽에 있는 바위에 '해운대'(海雲臺)'라는 세 글자를 새겼다. 그 후부터, 이곳의 부산 바다를 '해운대'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해운"은 "고운"과 함께 최치원의 호이기도 하다.


그래서, '해운대'라는 이름을 최치원 선생이 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런 사연 덕분에 부산 동백섬 언덕 위에 경주 출신 '최치원'의 동상을 세우게 되었다고 한다. 


동백섬에서 해운대를 바라보는 전경
최치원 선생이 바위에 새긴 '해운대 석판'



본관? 그게 뭐예요?


연세가 지긋하신 어르신들을 처음 만나, 인사를 드리다 보면 이런 질문을 자주 하신다.

"최 씨? 본관이 어디인가? 파는?"


전에는 이런 질문을 받으면 당혹스러웠다. 본관이 경주라는 건 알았지만, 큰 의미가 없다 생각했었다. 하지만 우연한 기회에 경주최 씨의 시조 격인 어른의 일대기를 돌아보며, 많은 생각을 했다. 12살 어린 나이에 멀리 이국땅에서 고생하며 공부했을 생활이 안타까웠다. 신분제 틀을 깨기 위해, 힘든 삶을 살아갔을 모습이 떠올랐다. 요즘처럼, 재산이나 출신과 무관한 세월을 사는 젊은이들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다.


대학생인 딸아이들에게, "고운 최치원 선생" 이야기를 해주었다. 

역시 반응이 별로였다. 옛날 옛적 어르신 이야기가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는 반응이었다. 그리고 물었다.


"아빠, 나도 경주 최 씨인가요?"

"나는 서울에서 태어났는데, 왜 본관이 경주인가요?"

"한 동네에 같은 성을 가진 사람들이 수십 명, 수백 명이 모여 산다는 건 정말 상상이 안 가는 일이에요."


요즘 젊은이들이 역사에 관심이 없는걸 탓해야 할까? 

그동안 딸들에게 본관에 대해, 최 씨 조상님들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던 걸 탓해야 할까? 


그냥, 무심해지기로 했다. 언제가 딸아이들도 나이가 들면, 아빠에 대해, 선조들에 대해 새로운 시각과 관심을 가지게 날이 오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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