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으로 사는 이야기

내가 아닌 우리가 일하는 법

by 디프렙 아카데미

박창희는 지금의 회사에서 ‘팀장’이라 불린다.

직급 자체는 익숙하지만, 모든 걸 ‘맡는’ 자리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디자인 전공, 에이전시 5년, 대기업 3년.
그는 빠듯한 일정과 까다로운 클라이언트를 거치며 실력을 쌓았고, 복잡한 조직 속에서 사람들과의 균형을 배워왔다. 하지만 지금은 전혀 다른 환경에 있다.


대표를 포함해 열 명 남짓한 작은 회사. 팀장은 실무자이자 조율자, 때론 방패막이 역할까지 해내야 했다.

얼마 전, 개발팀의 핵심 인력이었던 최 과장이 갑작스럽게 퇴사했다. 그날 이후 회사의 공기는 눈에 띄게 무거워졌다. 그 여파는 디자인팀에도 스며들었다.


"혹시 나도… 괜찮지 않은 건 아닐까?"
창희는 조용한 사무실에서 모니터를 바라보며 문득 그런 생각에 빠졌다.
스스로도 언젠가 한계에 부딪히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
그리고 그보다 더 큰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
‘나는 지금, 이 팀에서 어떤 역할을 하고 있는 걸까.’

그 질문은 오래 미뤄왔던 그의 이야기를 조심스레 꺼내게 만들었다.






그의 커리어는 꽤 다채로웠다.
대학교에서 디자인을 전공하고 곧바로 유명한 디자인 에이전시에 들어갔다.
야근과 촉박한 일정, 다양한 클라이언트의 요구 속에서 그는 빠르게 성장했다.
매일이 전쟁터 같았지만, 자신의 디자인이 실제로 반영되는 순간은 짜릿했다.


5년 뒤, 더 안정적인 시스템을 원해 대기업으로 이직했다.
정돈된 프로세스와 매뉴얼, 확실한 역할 분담.
처음엔 그 구조가 주는 안도감이 꽤 괜찮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디자인을 한다’는 감각이 점점 희미해졌다.
보고서가 책상 위를 채우고, 회의는 디자인이 아닌 보고 체계와 기획 변경에 집중됐다.
무난한 안만이 살아남고, 창의적인 시도는 “위에서 원하지 않아” 한마디에 묻혔다.

'내가 정말 디자인을 하고 있는 게 맞나?'
창희는 그렇게 점점 무기력해졌다.


어느 날, 에이전시 시절 존경했던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다.
“창희야, 나 사업 하나 시작했는데 같이 하지 않을래? 네가 원하는 대로 디자인할 수 있을 거야.”

그 말에 창희는 숨이 턱 막혔다.
오랜만에 가슴속에서 ‘디자인’이라는 단어가 살아 숨 쉬는 듯했다.


하지만 불안했다.


작은 회사에서 실패하면 어쩌지, 연봉이 줄어들면 생활은 괜찮을까.
하지만 고민 끝에 그는 스스로에게 솔직히 물었다.

‘나는 지금 이 일을 좋아하고 있는가?’


답은 분명했다.
그는 타협하며 살고 있었다.

스스로가 아닌 생존을 위해 움직이고 있었다.


‘어떤 디자인을 하고 싶지?’

자신의 선택이 반영된 결과물,
작지만 의미 있는 프로젝트,
‘디자이너 박창희’의 이름을 걸 수 있는 일.


그 순간, 마음은 정해졌다.
창희는 사직서를 냈다.
그는 다시 한번, 자신만의 이름으로 디자인을 시작하기로 했다.






이직 후 가장 낯설었던 건 업무 자체보다 사람과의 관계였다.
대기업에선 정해진 역할을 수행하면 그만이었다.
업무의 책임도, 경계도 명확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회의의 방향, 일정 조율, 다른 부서와의 마찰을 중재하는 일까지.
모든 결정이 빠르게 이루어지는 스타트업에서, 팀장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창희는 처음엔 대기업의 습관대로 신중하게 움직였다.
결정을 미루고, 매뉴얼을 참고하고, 충돌은 피했다.


하지만 어느 날, 마케팅 팀장과의 미팅에서 충돌이 일었다.
“디자인이 너무 안정적이잖아요.”
“리스크를 생각하면 안전한 방향이 나쁘지 않아요.”


그 말이 돌아오는 길, 마음을 무겁게 만들었다.
팀장이 되어서도 왜 여전히 결정을 피하려 하는 걸까.


그날 이후, 그는 바뀌기 시작했다.
책임을 피하지 않고, 의견을 더 명확히 전하고, 결정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하기로 했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었다.
실패가 무서웠고, 팀원들이 지칠까 염려됐다.

하지만 그는 점점, 자신의 선택으로 무언가를 바꾸는 즐거움을 느끼고 있었다.


몇 달 후 분기 계획 회의.

대표는 말했다.
“디자인 일정, 여기 맞춰주실 수 있죠?”


창희는 생각했다.
단순히 “네”라고 답하면, 결국 팀원이 야근할 것이고,
문제를 지적하면 마찰이 생길지도 모른다.


“하루 이틀 정도만 여유를 주시면 완성도 있게 맞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일정 조율은 내부에서 다시 확인해 보겠습니다.”

그는 그렇게 답했다.


회의를 마치고 돌아오며, 슬랙을 열었다.
이지민은 조용히 과중한 업무를 감당하고 있었다.
윤이서는 조금씩 익숙해지고 있었지만, 때때로 중요한 논의를 건너뛰는 일이 있었다.


그는 생각했다.
묵묵한 사람에겐 적절한 쉼을,
조급한 사람에겐 충분한 설명을.

그리고 그것이 팀장의 역할이라는 것을.


며칠 뒤, 회의실에서 진행한 디자인 리뷰.
윤이서의 시안 피드백을 조심스럽게 전달하고,
이지민에게는 일부 업무를 나누겠다고 말했다.


어쩌면 팀장이란,
누군가에게는 과하지 않게,
또 누군가에겐 부족하지 않게
그 사이를 조율하는 사람인지도 모른다.






그해 여름, 팀원들이 자리를 잡아가던 어느 날.
창희는 처음으로 ‘우리가 함께 만드는 팀’에 대해 생각했다.

기획과 개발 사이에서 일정을 조율하고,
대표의 급한 요청을 부드럽게 되돌리며
디자인팀을 지키는 일.


그건 단지 연차가 많아서 되는 일이 아니었다.
먼저 책임지는 용기,
지치지 않게 곁을 지키는 인내,
가끔은 모른 척해주는 여유.

그게 바로 팀장이었다.


그날 밤, 창희는 오랜만에 집에서 노트북을 켜지 않았다.
회사에 처음 왔을 땐 ‘내가 뭘 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면,
지금은 ‘우리가 어떻게 일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고 있다.






디자이너들을 위한 메모



1. 완벽한 리더가 되려 하지 않습니다.
잘하려는 마음이 때로는 실수를 두려워하게 만들고,
과정의 속도를 망설이게 합니다.
완벽보다 중요한 건, 팀원과 함께 걷는 일입니다.


2. 팀원 각자에게 맞는 리더십이 필요합니다.
묵묵한 사람에게는 무게를 나누고,
조급한 사람에게는 여유를 줍니다.
한 명의 팀장도 여러 가지 얼굴을 가져야 합니다.


3. 리더는 중심을 잡는 사람입니다.
누구의 편만 들지 않으면서도 팀의 입장을 분명히 전하고,
외부의 압박에는 방패가 되어야 합니다.
흔들릴 수밖에 없는 순간에도, 한 발 늦게 흔들리는 사람이 팀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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