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아웃, 그리고 회복
창밖은 또 비였다.
며칠째 이어진 장마처럼, 회사 분위기도 해가 들 틈이 없었다.
디자인팀의 두 번째 프로젝트, ‘LOKAL’은 시작부터 꼬였다.
투자 논의는 지지부진했고, 개발 일정과 마케팅 전략은 매번 어긋났다. 팀 사이엔 눈에 보이지 않는 책임 떠넘기기와 묵은 피로가 켜켜이 쌓여, 사무실 공기마저 눅눅하게 느껴졌다.
그날 아침, 이서는 개발팀 회의실 앞을 지나가다가 익숙한 목소리를 들었다.
“이게 대체 몇 번째 수정입니까.”
낮고 단단한, 최 과장의 목소리였다.
개발팀의 핵심이자 말없이 일 잘하던 그가 목소리를 높이는 건 처음이었다.
회의실 문이 조용히 닫혔다. 그 뒤로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오후 4시, 슬랙에 공지가 하나 떴다.
[공지] 개발팀 최윤섭 과장이 개인 사정으로 금일부로 퇴사하게 되었습니다.
그동안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너무 갑작스러웠고, 너무 간단했다.
그날 이후 개발팀 데일리 회의는 취소되었고, 그의 자리는 조용히 비워졌다.
며칠 후, 누군가 자리를 정리하다 켠 그의 모니터에 조용한 숲 속 배경이 떠 있었다.
작업창도, 메모도 남아있지 않았다.
그 자리엔 아무 말 없이 정리된 공백만이 남아 있었다.
“번아웃 이래.”
박 팀장이 조용히 말했다.
“몇 달 전부터 좀 힘들어 보이긴 했지. 근데 그걸 말하는 사람이 많지 않으니까…”
이서는 막연한 충격을 느꼈다.
뉴스에서, 다른 업계에서 듣던 이야기. 하지만 이제, 너무 가까워져 있었다.
‘그 조용했던 사람이… 그렇게 갑자기?’
그날 이후로 사무실은 어딘가 조금씩 어긋났다.
개발 일정은 다시 짜야했고, 미팅 분위기도 무거워졌다.
누구도 직접 말하진 않았지만, 사람들의 말투와 회의 속도가 변했다.
주말, 이서는 채연을 만났다.
비가 그친 거리에서 조용히 걷다, 근처 분식집에 앉았다.
“우리 회사에… 이번에 개발팀 선배가 퇴사했어. 번아웃이었대.”
이서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채연은 놀라지도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있을 법하지. 우리 구청에도 그런 분 있어. 팀장이었는데, 갑자기 병가 내고 안 나왔어. 처음엔 감기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까 우울증 초기였대.”
“헉… 팀장이면 꽤 오래 다니신 거 아니야?”
“7년 차였지. 민원에 시달리다가도 혼자 야근하고, 업무는 자기가 다 떠안고. 그러다 어느 날 회의에서 말하다 말고 갑자기 울었대. 멈출 수가 없었다더라.”
“… 그렇게까지 참았다는 거야?”
“책임감 있는 사람이 더 말 못 해. 자기 빠지면 안 된다고 생각하거든.
그게 얼마나 무서운 건지, 우리 아무도 몰라.”
이서는 조용히 입을 다물며 생각했다.
'어떤 마음이었을까'
월요일 아침, 이서는 출근하자마자 공기를 먼저 느꼈다.
커피머신 옆에서 박 팀장이 아무 말 없이 서 있었다.
눈을 감고, 천천히 숨을 들이쉬고 있었다.
이서는 그 모습이 묘하게 마음에 남았다.
평소엔 늘 여유롭게 웃던 사람이었는데… 오늘은, 어딘가 다르게 느껴졌다.
그날 오후, 이서는 이 대리에게 물었다.
“대리님… 우리 업계 사람들, 왜 이렇게 지치기 쉬운 걸까요?”
이 대리는 망설이다가 조용히 말했다.
“매일 새로운 걸 만들어야 하니까.
실패하면 수정하고, 또 설득하고. 근데 감정 소모는 늘 혼자 감당하잖아요. 기획은 계속 바뀌고, 개발은 일정이 밀리고… 그걸 디자인에서 다 조율해야 하니까…”
“그러다 보면 언젠가, 내가 왜 이걸 하고 있는지 잊어버려요.”
그날도 퇴근이 늦어졌다.
야근까지는 아니지만, 누구도 먼저 일어나는 눈치를 내지 못하는 분위기.
이서는 마지막 저장을 누르고 천천히 모니터를 껐다.
커피잔을 정리하려다 무심코 돌아본 사무실.
불 꺼진 자리들, 창백한 조명 아래 고개 숙인 동료들.
말은 없지만 모두가 조금씩 지쳐 있었다.
‘이러다… 다들 하나씩 무너지는 거 아닐까?’
이서는 생각했다.
번아웃이라는 게,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매일 조금씩 잠기는 물처럼 다가오는 건지도 모른다.
그날 밤, 이서는 짧은 글을 사내 위키에 올렸다.
슬랙처럼 공개적이지는 않지만, 가끔 팀원들이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요즘 다들 많이 지치신 것 같아 걱정됩니다.
혹시 각자 피로를 덜기 위해 해보는 루틴이 있다면
소소하게라도 공유해 볼 수 있을까요?
밤늦게 올린 글이라 기대하지 않았지만, 다음날 조용한 반응이 하나씩 생겼다.
“저는 점심 먹고 꼭 산책을 해요. 바람 쐬면 좀 풀려요.”
“하루에 꼭 음악 들으면서 멍 때립니다. 이어폰 끼고 멍 때리면 그나마 숨통이 트여요.”
“퇴근 전에 캘린더에 내일 할 일 간단히 써놓고 나가요. 그거 하나로 마음이 정리돼요.”
모두 특별하거나 멋진 방법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런 조그만 생활의 흔적들이, 이서에게는 깊은 위로가 됐다.
‘아, 나만 이런 게 아니었구나.’
누구도 큰소리로 말하진 않았지만, 다들 자신만의 방식으로 버티고 있었다.
이서의 제안 이후, 팀 채널에는 종종 ‘혼자만의 회복법’들이 올라왔다.
누군가는 산책하는 길 사진을,
누군가는 최근 읽은 문장을,
또 누군가는 “오늘은 별일 없었다”는 짧은 보고처럼 일상의 감정을 공유했다.
그것만으로도 팀 분위기는 조금씩 부드러워졌다.
회의 시간에 짧은 농담이 오갔고, 누가 일찍 퇴근하더라도 눈치를 보지 않는 문화가 생겨났다.
어느 날, 박 팀장이 이서에게 말을 건넸다.
“최 과장님, 제주도에 내려갔대. 요즘은 글도 쓰고, 천천히 지내는 모양이야.”
이서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의 퇴사 이후로 처음 듣는 근황이었다.
그가 괜찮다는 소식이, 이상하게도 마음 한편을 조용히 데우는 듯했다.
“다행이네요… 잘 지내고 계신다니.”
“응, 몸도 마음도 좀 쉬어가고 있는 거겠지.”
그날 퇴근 무렵, 이서는 잠깐 회의실 앞에 멈춰 섰다.
최 과장의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지만, 그가 유일하게 남기고 간 화분은 누군가가 물을 준 듯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어쩌면, 모두가 조금씩 서로를 돌아보게 된 걸지도 몰랐다.
회사 안엔 여전히 해야 할 일이 많았고,
프로젝트는 다시 속도를 붙여야 했지만, 그 와중에도 ‘잠깐 멈춘다는 것’이
누군가를 지키는 방법이 될 수 있다는 걸 이서는 조금씩 실감하고 있었다.
창밖에선 장마가 한풀 꺾인 듯,
구름 사이로 흐린 햇빛이 슬며시 내려오고 있었다.
디자이너를 위한 메모
무너지지 않기 위해, 기억해 두면 좋은 다섯 가지
1. 힘들다는 말을 꺼내도 괜찮습니다
아무 말 없이 버티는 것이 강한 태도는 아닙니다.
“요즘 좀 지치네요.” 그 한마디로 분위기가 달라질 수 있습니다.
2. 피드백보다 먼저, 숨 돌릴 시간이 필요합니다
좋은 디자인은 여유에서 시작됩니다.
마음이 바쁘면 설계도 흐트러지기 마련입니다.
3. 동료의 표정을 한 번 더 살펴봅니다
겉으론 멀쩡해 보여도, 속으론 지쳐 있을지 모릅니다.
“괜찮으세요?”라는 짧은 질문이 큰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4. 누구도 완벽하진 않습니다
말없이 버티는 선배나 팀장도 지칠 수 있습니다.
책임감이 클수록 더 자주, 더 조용히 챙겨야 합니다.
5. 회복은 거창하지 않아도 됩니다
잠시 눈을 감는 일, 좋아하는 영상을 틀어두는 일,
일에서 벗어난 짧은 순간들이 다시 나를 단단하게 만들어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