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만 그런 거 아니야”
“야, 너 얼굴 왜 이렇게 푸석하냐?”
채연의 한 마디에 이서는 괜히 머리카락을 정리하는 척했다.
금요일 저녁, 오랜만에 모인 친구들과의 약속. 삼삼오오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서로의 근황부터 쏟아졌다.
공무원 준비 끝에 구청에서 일하게 된 채연, 광고대행사에 다니는 주원, 그리고 유일한 프리랜서인 하영까지. 각자의 직장과 삶은 달랐지만, 꺼내는 이야기엔 이상할 정도로 비슷한 피로가 섞여 있었다.
“진짜 별것도 아닌 거에 시달리면서 하루가 다 가. 내가 뭘 한 건지 모르겠어.”
“회의는 왜 이렇게 많고, 왜 아무도 메모를 안 해?”
“나 진짜… 요즘은 퇴근하면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데, 또 가만히 있으면 죄책감 들어.”
이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맥주잔을 들었다. 처음엔 자신만 힘든 줄 알았는데, 이렇게 앉아보니 다들 비슷했다. 그냥 자기가 느낀 ‘피로’가 능력 부족에서 오는 게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마음 한쪽이 살짝 가벼워지는 느낌도 들었다.
“야, 근데 너 요즘은 뭐 해? 잘 지내?”
채연의 물음에 이서는 맥주 한 모금을 넘기며 말했다.
“음… 열심히는 하고 있는데, 자꾸만 같은 데서 맴도는 느낌? 잘하고 싶은데, 체력도 그렇고, 감정도 그렇고, 내가 좀 안 따라주는 느낌이랄까.”
그 말에 친구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건배를 제안했다.
“그래도 우리, 월급 루팡은 아니잖아. 이만하면 잘하고 있는 거야.”
잔이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이서의 표정에도 잠시 웃음이 번졌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다는 말. 요즘의 이서에게 꼭 필요한 문장이었다.
월요일 아침, 이서는 평소보다 조금 일찍 회사에 도착했다. 전 주의 피드백은 대부분 반영을 마쳤고, 이제는 와이어프레임을 조금 더 정제해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 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이상하리만큼 멍했다.
‘일을 못 하겠는 건 아닌데… 뭔가 덜 찬 느낌이야.’
스크롤을 내리며 기존 작업물을 훑어보다가 이서는 문득 자기가 만든 화면이 전부 어디서 본 듯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분명 새롭게 만든 건데, 왜 이렇게 익숙하고, 뻔하게 느껴질까.
그 순간, 금요일 저녁 채연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가끔은 그냥, 기계처럼 일하는 것 같지 않아?”
이서는 그 말이 이제야 제대로 와닿는다는 걸 깨달았다. 열심히 하는데, 성취감은 덜하고, 피곤한데 쉬는 느낌도 없다. 이걸 어떻게 하면 좀 나아질 수 있을까? 단순히 ‘열심히’가 아니라, 조금 더 '유연하게' 일할 수는 없을까?
그날 오후, 이서는 점심시간을 맞아 박 팀장과 카페에 마주 앉았다.
메뉴판을 바라보며 둘 다 똑같이 아메리카노를 골랐다.
“요즘 계속 피드백받고 고치는 걸 반복하다 보니까, 점점 자신이 없어져요. 제가 뭘 잘하고 있는지도 모르겠고요.”
이서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내자, 박 팀장은 잠시 고개를 끄덕이며 컵을 들어 올렸다.
“근데 말이에요. 일이 계속 잘 안 풀릴 땐, 실력 문제보단 리듬 문제일 수도 있어요.”
“리듬이요?”
“어느 날부터 일이 하나도 손에 안 잡히는 날 있잖아요? 그게 보통 몸이 신호를 보내고 있는 거거든요. ‘잠깐 쉬자’고.”
“그럼 진짜 쉬면 되나요?”
“진짜 쉬면 돼요. 근데 그 ‘진짜’가 어렵죠.”
박 팀장은 웃으며 말을 이었다.
“예전에 저도 똑같이 퇴근해서도 집에서 주말 내내 일하다가, 결국 병원에서 링거 맞고 깨달았어요. 아, 사람이 일은 일정량만 소화할 수 있구나. 그 후로 진짜 철저하게 구분해요. 일하는 시간, 쉬는 시간, 감각 채우는 시간.”
“감각 채우는 시간이라…”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감각이라는 단어는 막연하지만, 어딘지 디자인이라는 직업에 더없이 어울리는 단어였다.
이서는 돌아와서 생각에 잠겼다. 뭔가 거창한 루틴이 아니어도 좋으니, 자신만의 감각을 회복할 수 있는 시간을 만들어보자.
그렇게 그녀는 다음 날, 평소보다 조금 일찍 눈을 떴다.
먼저 노션에 폴더 하나를 새로 만들었다. 이름은 조금 유치하지만 솔직하게,
‘이서의 재정비 프로젝트’.
거창하지 않아도 되니까, 작고 단순한 루틴을 하나씩 쌓아보기로 했다.
첫 번째는 ‘하루 10분 뉴스레터 읽기’. 디자인 관련 뉴스레터를 구독해 놓고도 매번 안 읽은 메일함에 쌓여 있었던 걸 떠올린 것. 커피를 마시며 짧은 글을 읽는 그 시간이 생각보다 꽤 좋았다.
두 번째는 ‘퇴근 후 30분은 무조건 비일상 콘텐츠 보기’. 처음엔 드라마를 틀었지만, 금세 디자인 관련 영상만 들여다보는 자신을 발견했다.
그래서 이서는 이 대리에게 조언을 구했다.
“대리님, 혹시 아무 생각 없이 볼 만한 콘텐츠 추천해 주실 거 없을까요?”
이 대리는 고개를 끄덕이며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비버요. 유튜브에 ‘비버가 나무 베는 영상’ 있어요. 8시간짜리.”
“…네?”
“진짜예요. 음악도 없고 해설도 없어요. 그냥 비버가 나무 베는 소리만 들려요. 근데 그게 진짜 집중되고 묘하게 힐링돼요.”
“그걸 왜 8시간이나…”
“밤에 틀어놓고 자면 좋아요. 저는 주말엔 비버랑 같이 자요.”
이서는 피식 웃음을 참지 못했다. 어쩐지 이 대리는 일이든 휴식이든, 자신만의 방식으로 아주 충실하게 해내는 사람 같았다.
그날 밤, 이서는 진짜로 ‘비버 영상’을 틀어보았다.
나무를 톱질하는 소리, 물소리, 멀리서 들리는 새소리. 아무것도 하지 않는 시간인데도 묘하게 감각이 깨어나는 기분이 들었다.
계속해서 무언갈 만들어가는 비버를 상상해 보니 마치 자신과 같다고 느껴지며 위로를 얻는 기분이었다.
그날 이후, 이서는 아침마다 뉴스레터를 보는 습관을 들였다.
처음엔 눈으로만 훑는 수준이었지만, 며칠 지나자 ‘이건 우리 프로젝트에도 적용할 수 있겠다’ 싶은 내용엔 별표를 붙이기 시작했다. 예전엔 ‘시간 날 때 봐야지’ 하며 넘겼던 정보들이 이제는 다르게 보였다.
작은 변화는 다른 부분에서도 드러났다. 업무 정리도 달라졌다.
회의 후, 이전엔 막연하게 기억에 의존하던 이서는 이제 슬랙과 노션에 자신만의 메모를 남기기 시작했다. 그날 어떤 피드백이 나왔는지, 자신이 이해한 방향이 맞았는지, 막혔던 이유는 무엇이었는지를 간단히 적어두는 것만으로도 다음 회의 때 머리가 훨씬 정리되어 있었다.
한 번은 디자인 리뷰 중 박 팀장이 불쑥 말했다.
“이서 씨, 오늘 정리해 온 화면 플로우 괜찮았어요. 방향도 타깃 사용자 관점에서 잘 잡았고.”
그 말을 들은 순간, 이서는 어딘가 가슴이 울컥했다. 뭘 잘했다고 자부할 수 없던 시간이 길었기에, 짧은 칭찬 한 마디에도 몸이 따뜻해지는 느낌이었다.
그날 저녁, 퇴근길에 공원 벤치에 앉아있던 이서는 문득 지난 몇 주를 되돌아보았다.
여전히 일이 어렵고, 피드백도 여전하며, 와이어프레임도 완벽하게 나오진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무언가에 쫓기듯이 허둥대지 않았다. 자기만의 템포로 조금씩 조율하는 중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 스스로를 안심시켜주고 있었다.
집에 돌아온 이서는 노트북을 열고 ‘이서의 재정비 프로젝트’ 폴더에 오늘의 메모를 덧붙였다.
오늘의 회의 피드백: 정보 구조 흐름은 괜찮았음. 기획팀 요청사항은 UX 플로우에 미리 반영하자
오늘의 감각 저장소: 비버 영상 다시 보기. 오늘은 어젯밤보다 좀 더 잔잔하게 느껴짐
그 문장을 쓰고 나니, 피곤했던 하루가 조용히 마무리되는 기분이었다.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중요한 건, 자신만의 리듬으로 버텨내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주말 아침, 이서는 커피 한 잔을 내려놓고 테이블 앞에 앉았다. 여느 때처럼 노트북을 켜지는 않았다. 대신, 노란 포스트잇에 ‘이번 주 좋았던 일’이라는 제목을 적었다.
회의 때 흐름을 먼저 설명했다.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뉴스레터에서 본 트렌드를 기획자에게 공유했더니, 다음 주 회의 안건으로 채택됨.
비버 영상 덕분에 주말 저녁에 웃었다.
그녀는 조용히 웃으며 적어둔 메모를 한 장 접었다. 아직도 배울 것도 많고, 불확실한 일도 많지만 괜찮았다. 중요한 건 이제 조금은 자신을 조율하는 법을 배워가고 있다는 것.
커피 향을 따라 천천히 창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이서는 마음속으로 이렇게 되뇌었다.
‘잘하고 싶다는 마음도 좋지만, 잘 견디고 있다는 것도 꽤 괜찮은 일이다.’
디자이너들을 위한 메모
조금 더 단단해지고 싶은 당신에게
디자인 실력은 하루아침에 쌓이지 않는다.
하지만 아주 작고 사소한 실천은, 어느 날 우리의 마음을 지탱해 주는 뼈대가 되어 있다.
이서가 자신을 위해 만들어낸 루틴처럼, 당신에게도 작지만 유효한 리듬이 있기를 바라며 이 메모를 남긴다.
1. 하루 10분, 가볍게 보기
뉴스레터, 드리블, 브런치 스토리, 요즘 잘 만든 앱 하나.
딱 10분만 눈으로 훑어본다.
“트렌드가 바뀌어가는 걸 알아챘을 즈음 당신의 눈은 분명 변해 있는 것이다. “
2. 회의 후, 조용히 세 줄
왜 이런 피드백이 나왔을까.
내가 말한 방식에 아쉬움은 없었을까.
짧은 메모는 묘하게도, 다음 회의에서의 나를 바꿔놓는다.
3. 모른다는 말, 나를 성장시킨다
“이 내용은 잘 모르겠어요. 다시 설명해 주시겠어요?”
생각보다 이 말은 낙제가 아니라, 시작점이 된다.
팀원들과의 솔직한 대화에서 더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다.
4. 좋아하는 걸, 마음껏 보기
주말엔 좋아하는 인플루언서의 브이로그, 손이 가는 에세이 한 편.
‘일이 아닌 나’를 회복하는 콘텐츠는 생각보다 다양하다.
디자인을 멀리했더니, 다시 가까워지고 싶어졌다.
5. 잘하고 싶은 마음보다
‘잘 받아들일 수 있는 나’가 먼저다. 오늘을 버텼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좋은 디자이너가 되기 전에, 괜찮은 마음의 내가 되는 것부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