협업은 낯선 언어에서 시작된다.

낯선 말들을 지나, 하나의 방향으로

by 디프렙 아카데미

입사한 지 어느덧 반년.

처음엔 오늘을 버티는 것만으로도 벅찼지만, 이제는 업무의 흐름도 익숙해지고 프로모션 디자인도 능숙하게 해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요즘 이서는 다른 차원의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지곤 했다.


'이 일을 하면서 나는 잘 성장하고 있는 걸까?'


단순히 주어진 일을 해내는 것과, 팀 안에서 진짜 기여를 하는 것의 차이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새로운 프로젝트 'LOKAL'에 참여하게 되면서 이서는 자연스럽게 협업의 무게를 실감하기 시작했다. 한 명의 디자이너가 아닌, 한 팀의 구성원으로서 말이다.


오늘은 그 협업의 첫 관문이 열리는 날.

지금까지 진행된 리서치 내용을 정리하고 키포인트를 뽑아내는 '어피니티 다이어그램'을 구성하는 회의가 예정되어 있었다.


이서는 가볍게 들고 나온 텀블러를 꼭 쥔 채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할 수 있을까? 다른 사람들처럼 의견을 잘 낼 수 있을까?'


설렘보다도 불안이 앞섰다. 회의실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지 않았지만, 그 안엔 분명 성장에 대한 기대도 함께 담겨 있었다.


회의실 문을 여는 순간, 벽면 가득 채운 형형색색의 포스트잇들이 이서의 시선을 사로잡았다. 각 팀이 리서치 데이터를 토대로 정리하고 있는 인사이트들이었다.


이서는 누군가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내용을 적은 포스트잇들을 천천히 읽어 나갔다.


어떤 것은 분석적이고, 어떤 것은 감성적이었다.


모아놓은 이 메모들에 각자의 입장과 감정이 파편처럼 담겨있어 이것을 추리하는 것도 꽤 재밌었다.


고객 유입 퍼널, 클릭률, 전환율 등 고객을 유입시키는 방안들 위주로 적힌 메모들을 보며 마케팅팀의 강 대리가 생각났고,


또 어떤 메모들은 타깃들의 로그인 방법에 대한 고민과 데이터 처리 방안에 대한 고민이 적혀 있어 개발팀의 흔적으로 보였다.


이서는 벽면의 포스트잇들을 바라보다 슬며시 웃었다.

"정말 낯선 언어들이네."

같은 프로젝트를 두고 이렇게도 다르게 말할 수 있다니. 마치 세계 각지에서 온 사람들이 한 테이블에 앉아 각자 고유 언어로 토론하는 듯한 풍경이었다.


그녀도 조심스레 포스트잇 한 장을 꺼내어 적었다.


'업주가 필요로 하는 기능과 소비자가 기대하는 기능에는 명확한 차이가 있음‘


간단한 문장이었지만 업주들과 고객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며 얻은 이서의 관찰과 고민이 담겨 있었다. 포스트잇을 벽 한쪽에 붙이며 마음속으로 생각했다.


'이게 쓸모 있는 의견이 되면 좋겠는데…'


더 많은 내용을 적고 싶었지만 소심해진 이서는 펜을 내려놓고 다른 사람들의 관점들을 살펴보는데 집중하였다.




잠시 후 회의가 시작되자

각자가 추린 핵심 의견들이 모였고 서로 의미가 비슷하거나 같은 정체성을 지닌 내용들끼리 분류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어피니티 다이어그램이 조금씩 완성되어 가며 핵심 주제는 자연스레 흘러나왔다.



"LOKAL 서비스의 중심 타깃은 누구인가? 주문하는 사용자인가, 아니면 서비스를 제공하는 소상공인인가?"



마케팅팀의 강 대리가 입을 열었다.

"우리는 사용자 중심으로 고민해야 합니다. 사용자 입장에서 쉽고 매력적인 화면, 신뢰를 줄 수 있는 구조가 핵심이죠."


개발팀의 최 과장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하지만 실제로 플랫폼을 운용하는 주체는 소상공인입니다. 그들이 메뉴 등록이나 주문 확인을 어렵게 느끼면 서비스는 작동하지 않아요."


디자인팀의 박 팀장은 중립적인 시선을 유지하며 말했다.

"리서치 결과를 보면, 업주들의 디지털 화면 진입 장벽이 자주 언급됐습니다. 공급자와 사용자의 균형을 맞추는 방향이 필요하다고 봐요."


이야기는 쉽게 결론이 나지 않았다. 각자 주장에는 타당한 근거가 있었고, 모두의 말이 옳았다.

많은 메모들이 언급되었지만 누구도 이서의 메모는 언급하지 않자 이서는 어쩐지 얼굴이 화끈거렸다.

'괜히 붙였나…'


조용히 눈을 피하려던 찰나, 박 팀장이 이서의 포스트잇을 집어 들었다.


"이 의견, 아주 중요한 힌트일 수 있어요. 각자 필요한 기능이 차이가 나는 건, 두 타깃을 모두 고려하는 별도의 방안이 필요하다는 의미가 될 수도 있어요."


잠깐의 정적 후, 마케팅팀의 강 대리도 말했다.

"맞아요. 저는 사용자 중심으로만 생각했는데, 소상공인의 정보와 가게들이 많이 보여야 사용자의 불안도 줄어들겠네요."


그제야 이서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말이 입 밖으로 나오기까지 수초가 걸렸다.

"그.. 모두를 고려해야 하는 건 맞지만 디지털 화면에 대한 진입 장벽이 있는 사장님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초기 화면에서 업주와 고객들이 자신이 원하는 방향을 선택할 수 있게 해야 초기 혼잡도를 줄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얼굴이 빨갛게 달궈진 그녀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그 말은 회의의 분위기를 바꾸기에 충분했다. 박 팀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좋습니다. 그럼 두 타깃 모두의 입장을 반영한 구조를 생각해 봅시다. 사용자에게도, 소상공인에게도 친절한 구조."




회의가 끝난 후 이서는 자신의 의견을 피력하는 방법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내 의견을 말할 때마다 늘 작은 긴장감이 그녀를 둘러쌌다.


'내 의견이 틀린 것은 아닐까?', '다른 사람과 충돌하는 의견은 괜히 말하지 말까?'


하지만 오늘 그녀가 느낀 건, 감정을 섞지 않고 논리적이고 명확하게 의견을 전달한다면 상대방도 충분히 경청하고 존중해 준다는 사실이었다.


서로의 의견을 존중하는 태도는 단순히 친절의 차원을 넘어 효과적인 소통의 기반이 된다.

이서는 의견을 말하기 전에 객관적인 데이터를 준비하고, 상대방이 사용하는 용어나 관심사에 맞춰 설명을 구성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해하게 되었다.


다른 의견을 공격하는 것이 아니라, 의견이 다를 때에도 그 이면의 의도를 파악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건강한 협업의 출발점이었다.


협업은 결국 다양한 생각이 모이는 공간에서 이루어진다. 감정을 배제한 채 서로를 존중하며 건설적으로 의견을 주고받을 때, 비로소 진정한 협업의 힘이 발휘된다는 것을 이서는 조용히 마음속에 새겼다


디자인은 혼자 하지 않는다. 그리고 협업은, 낯선 언어를 이해하려는 순간부터 비로소 시작되는 것이다.






디자이너들을 위한 메모



어피니티 다이어그램(Affinity Diagram)이란?

사용자 리서치에서 수집한 다양한 의견, 관찰, 인사이트를 직관적으로 분류하고 정리하기 위한 시각화 도구입니다. 팀원 각자가 쓴 메모(보통 포스트잇)를 주제별로 묶고 분류하면서, 공통된 이슈나 중요한 흐름을 파악할 수 있게 돕고 최종 결론을 도출합니다.


언제 쓰이나요?
-사용자 인터뷰, 관찰, 설문 등 다양한 리서치 결과를 종합하고 정리할 때.


어떻게 구성하나요?

-각자 핵심 인사이트를 포스트잇에 적는다. -> 유사한 주제끼리 묶고 라벨링 한다. -> 팀원들과 함께 군집을 분석하며 핵심 주제를 도출한다.


왜 중요할까요?

-서로 다른 시각과 언어를 가진 팀원들이 공감대를 형성하고, 리서치에서 발견한 ‘진짜 문제’를 공통의 언어로 정리하는 과정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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