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만 빼고 다 잘하는 것 같을 때
“찜찜하다. 찜찜해.”
이서는 완성된 디자인을 바라보며 또다시 고개를 갸웃했다. 보기엔 깔끔하고 산뜻했지만, 마음 어딘가가 개운치 않았다.
며칠 전 이 대리에게 “각 UI의 퀄리티는 좋은데, 화면의 여백이 부족하고 연결되는 흐름이 매끄럽지 않아요”라는 피드백을 받은 후, 이서는 작업물을 다시 들여다보게 됐다. 디테일은 분명 신경 썼고, 마진과 컬러 밸런스도 무난했지만, 무언가 부족하다는 감각이 자꾸 마음을 찔렀다.
“이상하다... 왜 이렇게 별로지?”
답답함을 안은 채 의자에 깊숙이 기대던 순간, 이서의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 하나.
‘나는 디자인 감각이 없는 걸까?’
어떤 분야든 아는 것이 많아질수록 더 어려워진다. 이서는 요즘 그걸 온몸으로 실감하고 있었다.
처음 디자인을 시작했을 땐, 컬러를 고르고 폰트를 정하며 예쁜 무언가를 만드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나 이제는 전혀 다른 세계가 보이기 시작했다. 여백과 시선 흐름, 사용자 경험, 맥락에 따른 설계 등, 눈에 보이지 않는 요소들이 디자인의 중심이 되고 있었다.
그럴 때마다 이 대리와 박 팀장이 떠올랐다.
이서의 궁금증은 점점 커졌고, 조용히 두 사람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회의가 끝난 뒤 돌아가는 척하다가 살짝 뒤돌아 박 팀장의 모니터를 훔쳐보기도 하고, 이 대리가 무심히 던진 말을 머릿속에 저장해두기도 했다.
“이런 건 어디서 보셨어요?”라는 질문엔 늘 “핀터레스트나 드리블? 요즘은 인스타에도 많이 올라오더라고요”라고 툭툭 대답하는 이 대리.
알고 보니 그는 회의가 없는 오전 시간마다 디자이너 계정을 팔로우하고, 레퍼런스를 꼼꼼히 저장해 두는
‘디자인 수집가’였다.
어느 날 이 대리가 레퍼런스 폴더를 보여준 적이 있었다.
연도, 종류, 콘셉트별로 잘 정리된 폴더 목록은 물론 세부적인 하위 폴더까지 촘촘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이 대리의 아이클라우드 폴더를 들여다보며 이서는 감탄과 동시에 좌절했다.
‘와... 이건 거의 디자이너계의 정리왕 아니야?’
이 대리가 보여주는 퍼포먼스는 하루아침에 얻어진 게 아니었다. 출근길 좁은 지하철 안에서도 디자인 아티클을 읽고, 틈틈이 비핸스를 보며 레퍼런스를 수집하고 분류하며 만든 자산. 당장은 아무런 변화도 느껴지지 않지만, 시간이 쌓이면 그 모든 것이 '관점'으로 돌아온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디자인에서 감각은, 성실함으로 훈련될 수 있다.
한편, 박 팀장은 조금 달랐다. 오랜 경력과 화려한 포트폴리오를 가진 그는 누구보다 빠르게 새로운 것을 익히고 받아들이는 ‘디자인 얼리어답터’였다.
피그마가 새롭게 업데이트된 날이면 그날 아침, 팀 슬랙방에 “이 기능 써봤어요?”라며 링크를 공유했고, 직접 만든 튜토리얼 영상까지 첨부했다.
‘진짜… 박 팀장님은 언제 그런 걸 다 보고 계신 거지?’
그런데 며칠 전, 박 팀장이 오토 레이아웃을 설정하다 프레임이 튕겨나가는 장면을 이서가 목격했다.
“아이고야, 이거 또 왜 이래!”
박 팀장이 허둥지둥 키보드를 두드리는 모습은 의외로 귀여웠고, 완벽해 보였던 사람의 허술한 구석은 묘하게 위로가 되었다. 그러나 그는 이내 기능을 숙지하고 프로젝트에 효율적으로 반영했다.
이서도 피그마의 변화뿐 아니라 챗GPT, 미드저니, 런어웨이 등 매일 변화하는 툴의 속도를 따라가기도 버거운데, 박 팀장은 익숙한 방식이 있음에도 늘 새로움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수집가와 얼리어답터.’
이 대리와 박 팀장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감각을 만들어가고 있었지만, 공통점도 있었다.
첫째, 의미 없는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디자인을 배우기 전 이서는 디자이너란 소신을 끝까지 밀어붙이는 사람일 거라 생각했지만, 현실은 달랐다. 잘하는 디자이너일수록 수용적이었고, 피드백과 수정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며 기꺼이 수정했다.
둘째, 물어볼 게 없는 디자인을 했다.
그들의 작업물은 체계적인 컴포넌트 구조로 구성되어 있었고, 네이밍과 정리는 비디자이너도 이해할 수 있을 만큼 명확했다. 복잡한 설명이 없어도 명확히 소통되는 디자인. 그들은 단순한 제작자가 아니라,
비주얼 커뮤니케이터였다.
셋째, 여백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이들의 디자인은 화려한 요소 없이도 완성도가 높았다. 이서는 취업 전까지 여백이란 개념을 알고만 있었지 체감하지 못했지만, 이 대리와 박 팀장의 작업을 보며 처음으로 그 중요성을 실감했다. 그들은 적절한 여백과 강약 조절을 통해 내용의 맥락을 더 또렷하게 전달하고 있었다.
어느 날, 이서는 이 대리의 조언을 얻고 깨달았다. “디자인은 사실, 여백을 만드는 작업이에요.”
관찰을 끝내기로 마음먹은 이서는 자신이 누군가를 몰래 관찰하며 디자인을 배우고 있다는 사실이 웃겨 미소를 지었다.
점심시간, 이 대리와 박 팀장과 함께 앉아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가 요즘 디자인이 너무 어렵게 느껴져서... 두 분을 유심히 관찰해 봤어요.”
박 팀장이 웃으며 말했다.
“네? 뭐 건질 게 있던가요? 막상 보면 별거 없죠?”
이 대리도 장단을 맞췄다.
“팀장님이면 몰라도, 저도 아직 디자인이 어려운데 절 뭐 하러 관찰해요. ㅋㅋ”
“정말요? 저는 두 분 보면서 많이 배웠는데... 아직도 디자인이 어려우시다니, 안 믿겨요. 저 놀리시는 거 아니죠?”
박 팀장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저 진짜 감각 없어요. 동기 중에 천재가 있었는데, 걘 뭐든 잘하고 금방 해내요. 저는 자꾸 비교하면서 자괴감도 들고 그랬죠. 그러다 어느 순간 생각했어요. 천재가 아니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그렇게 꾸준히 하다 보니 나아지더라고요. 아직도 디자인은 어렵지만, 그래도 재밌어요.”
그 말에 이서는 깊은 위로를 받았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다시 자리에 앉아 화면을 바라보는 마음도 한결 가벼워졌다.
디자인 감각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
잘하는 디자이너란 정답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끊임없이 탐색하고 배우며 실수하더라도 멈추지 않는 사람이다.
그날 오후, 말없이 집중해서 보낸 하루가 이서에겐 꽤 의미 있는 날로 남았다.
이서도 그렇게, 조금씩 잘하는 디자이너가 되어가고 있는 중일 것이다.
디자이너를 위한 메모
1. 여백은 비어 있는 공간이 아니라, ‘정보의 리듬’이다
디자인에서 여백은 단순한 빈 공간이 아니다.
여백은 콘텐츠 간의 관계를 정리하고, 사용자의 시선을 유도하며, 정보의 강약과 흐름을 설계하는 ‘보이지 않는 안내선’ 역할을 한다.
많은 주니어 디자이너들이 콘텐츠를 가득 채우고 나서야 여백을 생각하지만, 사실 여백은 처음부터 의도되어야 한다.
여백이 충분히 확보되면 정보는 숨을 쉬고, 사용자는 피로감 없이 화면을 이해하게 된다.
지나치게 가득 찬 화면은 보기엔 화려할지 몰라도, 전달력은 오히려 떨어진다.
✔ 여백 설계의 핵심 질문:
지금 이 화면에서 가장 중요한 정보는 무엇인가?
어떤 요소를 먼저 보고, 다음엔 어디로 시선을 옮겨야 할까?
이 정보들이 서로 간섭하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는가?
디자인은 정보를 보여주는 일이 아니라 정보를 정돈해서 보여주는 일이다. 그 시작은 여백을 다루는 힘에서 온다.
2. 네이밍은 당신의 디자인 언어이자, 협업을 위한 약속이다
레이어, 컴포넌트, 버튼, 섹션 등… 우리가 만드는 수많은 요소들은 모두 이름을 갖는다.
이름이 있다는 건 다른 사람과 소통할 준비가 되었다는 뜻이다.
디자인 툴에서 정리되지 않은 네이밍은 혼자만 알아볼 수 있는 ‘암호’ 일뿐이다.
반면, 체계적이고 명확한 네이밍은 개발자, 디자이너, 기획자가 모두 동일한 관점으로 구조를 이해하고 소통할 수 있는 기반이 된다.
✔ 좋은 네이밍의 조건:
기능과 구조가 드러난다: btn_primary_large(✅) vs Layer 358(❌)
일관된 규칙을 따른다: card_image_title / card_image_desc 등
재사용과 확장이 가능하다: 수정하더라도 구조가 유지되도록
디자인 시스템을 운영하는 데 있어 네이밍은 단순한 편의가 아니라 운영과 효율, 신뢰의 핵심 축이다.
작은 습관이 결국 큰 차이를 만든다.
3. 시각적 우선순위: 잘 보이게 만드는 것이 좋은 디자이너다
디자인의 역할은 단순히 ‘예쁘게’ 만드는 게 아니다.
진짜 디자이너는, 정보를 사용자가 자연스럽게 인식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흐름을 만들어내는 사람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바로 시각적 우선순위다.
텍스트의 크기, 색상, 간격, 위치 등 모든 요소는 ‘무엇을 먼저 읽어야 하는지’를 기준으로 설계되어야 한다.
초보 디자이너일수록 모든 것을 강조하려고 하거나, 반대로 정보의 구조를 고려하지 않고 무작정 배치하기 쉽다.
그러나 경험이 쌓일수록 디자이너는 한정된 시야 안에서 무엇을 드러내고 무엇을 감출 지를 전략적으로 결정하게 된다.
✔ 시각적 우선순위 점검법:
이 화면을 처음 본 사람이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건 무엇인가?
강조하고 싶은 정보가 실제로 가장 두드러지게 보이는가?
서브 정보와 구분이 되어 있는가?
‘잘 보이게 하는 것’은, ‘화려한 디자인’보다 훨씬 어렵고 훨씬 중요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