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디자인인가
어린 시절 읽었던 동화 속 괴물처럼, 디자이너들 사이에서 무시무시한 존재로 일컬어지는 사람들이 있다.
바로 ‘클라이언트’.
디자이너에게 일을 전해주는 존재들이, 왜 한편으로는 두려움의 대상이 되곤 하는 걸까?
신입 디자이너 윤이서는 이 사실을 최근 들어 몸소 실감하고 있었다.
“윤이서 디자이너님, 저희 제품 사진이 조금 더 크게 들어가야 할 것 같아요.”
이서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방금 회사의 신규 클라이언트인 민 대표로부터 받은 n번째 수정 요청 메일이었다.
입사 후 몇 달이 지난 지금, 초반의 날카로운 피드백 폭풍을 견디며 어느 정도 업무에 익숙해져 있었던 이서에게 회사는 새로운 미션을 맡겼다.
이번 프로모션부터는 클라이언트와 직접 소통하며 업무를 진행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회사의 소규모 인력이 대부분 신규 프로젝트에 투입되었기에 효율적인 업무 처리를 위해 이서가 클라이언트와 직접 연락을 주고받으며 신속하게 디자인을 진행하는 편이 나았다.
인수인계 회의에서 박 팀장이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이서 씨, 그동안 정말 잘 해왔잖아요. 이제 클라이언트와 직접 소통하는 것만 추가되는 거니까 큰 어려움은 없을 거예요.”
이서는 불안한 마음을 꾹 누르며 씩씩하게 말했다.
“네, 잘해보겠습니다, 팀장님!”
하지만 마음 한구석엔 여전히 작은 걱정이 남아있었다. 이서는 조심스럽게 다시 물었다.
“팀장님, 제가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클라이언트들이 정말로 '화려한데 심플하게’, ‘샤랄라 하게’ 같은 애매한 표현을 많이 쓰나요? 인터넷이나 SNS에서는 그런 표현들 때문에 디자이너들이 고생한다는 글을 많이 봐서요.”
진지한 표정의 이서에 박 팀장은 웃음을 터뜨리며 답했다.
“하하, 제 ‘라떼 시절’엔 그런 일들이 꽤 있었죠. 그런데 요즘은 그래도 믿고 맡기시는 분들이 많아졌어요. 우리 회사 클라이언트분들은 그렇게 까다롭지는 않아요.”
박 팀장은 웃으며 이서를 안심시켰지만, 사실 그의 머릿속엔 수많은 고난의 기억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이 파일명처럼 클라이언트의 끝없는 수정 요청에 밤을 새우며 고생했던 기억들, 그리고 디자인 콘셉트만 가져가고 계약을 중단해 버린 무례한 고객에 대한 기억까지 박 팀장의 마음을 흔들었지만, 그는 이내 정신을 차리고 좋은 클라이언트들과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서를 격려했다.
“혹시 어려운 일 있으면 언제든지 이야기해요, 이서 씨.”
지금까지의 콘텐츠 디자인 업무는 모두 이 대리가 만들어 놓은 가이드라인을 따라왔기에 큰 어려움이 없었지만, 이번 프로젝트부터는 상황이 달랐다.
이서는 이제 스스로 가이드를 만들며, 직접 디자인을 리드해야 했다. 말 그대로 ‘윤이서 디자이너의 디자인’이 처음으로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클라이언트와의 첫 번째 통화를 앞두고 이서의 긴장감은 최고조에 달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민 대표의 목소리는 너무나도 차분하고 친절했다.
“잘 부탁드려요, 윤이서 디자이너님. 저희 브랜드가 처음으로 큰 프로모션을 진행하는 거라 좀 많이 신경 써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소규모 뷰티 브랜드의 대표인 민 대표는 미팅 내내 세심하고 배려 있는 말투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민 대표가 의뢰한 프로모션의 주제는 신제품 출시 기념 20% 할인 이벤트였다.
“이번 프로모션 페이지에서 저희 핵심 제품인 세럼이 좀 더 강조됐으면 좋겠어요. 제품 사진은 크게 넣고, 상세 설명도 최대한 충분히 담아주시길 바랍니다. 이번에 출시된 제품은 ‘수분 보충’이 가장 큰 특징이니까, 특히 그 부분이 잘 드러났으면 해요.”
이서는 이 대리에게 배운 대로 미팅 내용을 깔끔하게 정리하여 민 대표에게 전달할 이메일을 작성하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민 대표님은 좋은 분인 것 같아서 다행이다.”
전화 통화를 끝내고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이서는 디자인을 준비했다. 처음엔 긴장되었지만, 이제는 책임감과 함께 조금은 안도감이 섞인 기대가 피어올랐다.
첫 번째 피드백
이서가 첫 번째 디자인 시안을 완성하고 민 대표에게 전달했을 때는 자신감과 설렘이 가득했다.
민 대표가 원했던 제품의 특성을 고려하여 세럼의 사진을 강조하면서도 전반적으로 부드럽고 감성적인 분위기를 유지했다. 민 대표의 첫 번째 피드백 메일이 도착했을 때도 이서는 긴장하지 않았다.
“윤이서 디자이너님, 보내주신 디자인 잘 보았습니다. 정말 예쁘게 작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제품이 조금 더 부각됐으면 하는데, 사진 크기를 키우거나 더 눈에 띄는 색상을 써보면 어떨까요?”
이서는 순간 당황했다. 자신의 생각엔 이미 제품이 충분히 강조된 상태였다. 하지만 요청을 무시할 수 없기 에, 이서는 다시 시안 작업에 돌입했다. 제품 이미지를 키우고, 배경 색상 대비를 높여 제품이 더 눈에 띄게 만들었다.
두 번째 피드백,
하지만 다음날 두 번째 메일이 도착했다.
“윤 디자이너님, 수정된 시안 확인했습니다. 훨씬 좋아졌는데요, 이번에는 제품 설명이 너무 길고 복잡해 보이는 것 같습니다. 설명 부분을 좀 더 깔끔하게, 간결하게 수정 부탁드립니다.”
이서는 메일을 보며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제품 설명 부분은 민 대표가 최대한 자세히 넣어 달라고 했던 내용이었다.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이 반복되며 점점 디자인의 방향이 흔들리는 듯했다.
이서는 설명 부분을 줄이고 다시 한번 시안을 제출했지만, 비슷한 피드백은 반복되었다.
하루 뒤 민 대표와의 전화 미팅이 잡혔다. 이서는 전화기가 울리기 직전까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민 대표의 친절한 목소리가 들렸지만, 요구사항은 점점 더 세부적으로 바뀌었다.
세 번째 피드백,
“사실 고객들에게 가장 먼저 어필해야 하는 게 보습력이라는 핵심 기능인데요, 그게 조금 부족하게 표현된 느낌이에요. 이미지 주변에 물방울 효과 같은 걸 넣으면 좋지 않을까요?”
물방울 효과라는 말을 들은 순간,
‘그건 옛날에 유행한 스타일 아닌가…’
라는 생각이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민 대표가 왜 그런 아이디어를 제안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제품의 핵심을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아이디어였다.
이서는 고민 끝에 물방울 효과를 보다 현대적이고 세련되게 표현하는 방법을 찾았다. 제품 사진 주위에 아주 작은 입자 형태로 물방울을 표현해 촌스럽지 않으면서도 세럼의 수분감을 잘 나타냈다.
4번째 피드백,
그러나 다음 피드백은 여전히 민 대표를 만족시키지 못했다.
“이미지는 좋은데 전체적으로 너무 차갑게 느껴져요. 저희 고객층이 20~30대 여성분들인데, 좀 더 따뜻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 수는 없을까요?”
이서는 민 대표와 주고받은 여러 차례의 피드백 메일과 통화 기록들을 다시 읽으며 고민에 빠졌다.
화면 속 수많은 디자인 버전들을 살펴보면서, 처음 자신이 디자인했던 시안과 최근 수정된 시안을 비교해 보았다.
그 순간, 이전엔 보이지 않았던 차이점이 명확하게 느껴졌다.
처음의 디자인은 확실히 미적이고 예뻤지만, 민 대표가 원하는 '핵심 메시지'가 명확하지 않았다.
반면 최근 버전은 '디자이너가 봤을 땐' 처음보다 덜 세련된 느낌이 들었지만, '소비자가 봤을 땐' 제품의 강점이 한눈에 들어오는 디자인이었다.
"아, 내가 잘못 생각했던 거구나…"
이서는 그제야 자신이 클라이언트의 요구사항을 이해하려 하기보다, 계속 자신이 익숙하고 편한 미적 관점에서만 디자인을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디자이너라는 직업이 단순히 '멋지고 예쁜 디자인'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클라이언트의 입장과 비즈니스의 목적을 깊이 이해하고 이를 디자인으로 풀어내는 것임을 다시 한번 실감했다.
이제 디자인이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지, 누구를 위한 것인지 분명해졌다.
이서는 화면 속 디자인을 다시 한번 정리하기 시작했다. 이번엔 디자이너로서가 아니라, 클라이언트와 고객의 입장에서. 클라이언트의 목표와 고객층의 특성을 다시 꼼꼼히 체크하고, 그에 맞는 방향을 제안했다.
“대표님, 말씀 주신 내용을 바탕으로 분위기를 따뜻하고 친근하게 바꾸면서, 세럼의 효과가 직관적으로 전달되도록 수정했습니다. 어떠신지 한번 봐주세요.”
몇 번의 피드백을 더 주고받은 끝에 드디어 민 대표의 만족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윤 디자이너님, 마음에 듭니다! 처음보다 훨씬 좋아졌어요. 저희 제품을 가장 잘 보여주는 디자인입니다. 정말 고생 많으셨어요!”
메일을 읽은 이서는 긴장이 풀리며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이번 프로젝트를 통해 클라이언트의 비즈니스 목표를 디자인에 담아내는 것이 진정한 디자이너의 역할이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분명히 깨달았다.
이서는 프로젝트를 마치며 혼자 사무실에 앉아 디자인 파일을 정리하다 잠시 생각에 잠겼다.
사실 중간에 민 대표의 끝없는 수정 요청에 불평도 많았고, 때로는 자존심이 상했던 것도 사실이었다.
하지만 작업물을 돌이켜보며 이서는 이제야 클라이언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었고, 그것이 이번 프로젝트에서 얻은 가장 큰 보람이라고 느꼈다.
"클라이언트의 만족이 나의 만족이 되는 순간이 이렇게 뿌듯하구나."
디자이너로서 한 걸음 더 성장했음을 실감하며, 이서는 다음 프로젝트를 조금 더 기대하게 되었다.
“클라이언트는 문제를 주는 존재가 아니라, 함께 문제를 푸는 존재였다.”
디자이너들을 위한 메모
1. 전문 용어는 피하고, 시각 자료를 활용하자:
클라이언트와 소통은 구두, 텍스트 보다 무드보드, 레퍼런스 이미지 등을 활용하면 말보다 빠르고 정확합니다.
2. 요약 메일은 필수다:
회의나 피드백 이후, 핵심 내용을 정리한 메일을 보내는 것은 서로의 이해를 맞추는 가장 확실한 방법입니다.
3. 고객 중심의 사고로 소통하자:
‘좋은 디자인’이란, 클라이언트의 목적을 정확히 담아내는 것입니다.
4. 안 되는 것은 정확하게 표현하자:
실현 불가능한 콘셉트, 무리한 수정 요구 등 안 되는 것들은 오해가 쌓이지 않게 확실하고, 친절하게 의사를 전달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