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했을 때, 진짜 배움이 시작된다.
"이서 씨, 마이크로사이트 시안 내일까지라고 했던 거 기억하죠? 점검 차 지금 바로 저에게 보내주세요."
박 팀장의 메신저 알림이 뜨자, 이서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마우스 커서가 흔들리는 손끝을 따라 위태롭게 움직였다. 지난 며칠 밤새 공들였던 디자인을 보낼 때의 그 떨림은 기대감과 두려움이 뒤섞여 있었다.
잠시 후, 박 팀장이 다급하게 이서를 불렀다. 회의실 문을 열자 박 팀장의 굳은 얼굴이 보였다.
"이서 씨, 지금 시안 본 거 맞죠? 이게 어떻게 기획서 내용과 이렇게 다를 수가 있어요?"
평소보다 차가운 톤에 이서는 할 말을 잃었다.
"텍스트 위계도 없고, 중요한 프로모션 메시지가 제대로 드러나지도 않았어요. 게다가 왜 가로 스크롤을 적용한 거죠? 이거 논의된 적 없잖아요."
이서의 얼굴이 빨개졌다. 대답하려고 입술을 움직였지만 아무런 말이 나오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제가 제대로 확인을 못 해서..."
"이서 씨, 혼자서만 작업하고 누구와도 공유하지 않은 이유가 뭡니까? 내일이 마감일인데, 제가 확인 안 했으면 이대로 제출하려고 했어요? 디자인은 혼자 하는 게 아닙니다. 빨리 이 대리랑 함께 마무리하세요."
이서는 떨리는 목소리로 다시 죄송하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에 돌아왔다. 그녀의 마음은 부끄러움과 자책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박 팀장은 회의 직후 조용히 이 대리를 불렀다.
"이 대리, 급하게 도와줘야 할 것 같아. 마케팅팀에 내일까지 전달해야 하는 시안이야. 일정이 빠듯하지만, 이서 씨가 만든 시안은 기획서랑 맞지 않아서 지금 상태론 제출이 어려워."
이 대리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자리로 돌아온 그는 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이서는 그 모습을 멀리서 지켜보며 스스로를 탓했다. 자신이 초래한 일에 모두가 애쓰고 있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깊은 자책감을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늦은 밤, 이 대리와 박 팀장은 시안을 마무리 지었다.
다음 날 아침, 박 팀장은 이서를 조용히 불렀다.
"이서 씨, 어제 내가 좀 심하게 말했죠? 그만큼 중요한 프로젝트였어요. 디자이너로서 일정 안에 결과물을 완성하고, 기획의 의도를 정확히 담아내는 건 기본 중 기본이에요."
"그래도 이서 씨가 잡은 컨셉을 바탕으로 디자인은 잘 마무리되어 넘어갔어요"
이서는 고개를 숙인 채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이번만큼은 혼자 해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질문을 자주 하는 게 민폐이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박 팀장은 부드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신입이 질문하는 건 당연한 거예요. 스스로 해보려는 자세는 좋지만, 그게 팀에 부담이 된다면 오히려 독이 될 수 있어요. 디자이너는 결국 커뮤니케이션하는 사람입니다. 다음엔 더 자주 질문하고, 공유하세요."
이서는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같은 실수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이서가 메인 디자이너로 참여한 첫 번째 프로젝트는 그렇게 마무리되었다.
책상으로 돌아온 이서는 이 기억들을 되새겼다. 배운 점이 많은 시간들이라 생각하는 동시에 자신의 실수로 끝까지 마무리 짓지 못한 상황에 씁쓸한 감정이 들었다.
잠시 후, 이 대리가 조용히 이서를 불렀다.
"커피 한잔 어때요? 잠깐 바람 쐬고 오죠."
두 사람은 근처 카페에 앉았다. 이 대리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가볍게 웃으며 말을 꺼냈다.
"저도 신입 때 실수 엄청 했어요. 한 번은 포토샵 레이어를 모두 덮어써서 전체 시안을 날려버린 적도 있고, 회의에 잘못된 자료 들고 들어가서 진땀 뺀 적도 있고요."
이서는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 대리님도 그런 적이 있으셨다니, 조금 위로가 돼요."
"그럼요. 중요한 건 실수가 아니라, 실수 이후 어떻게 대처하느냐예요. 그리고 혼자 끙끙 앓는다고 나아지는 건 없어요."
이 대리의 말을 들은 이서는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디자이너로서 피드백을 받는 게 중요한 것은 알았지만.. 자꾸만 자신감이 떨어지고 감추고 싶은 마음이 들었어요"
이 대리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진지하게 덧붙였다.
"지금처럼 혼자서 모든 걸 책임지려는 자세, 물론 멋지긴 해요. 하지만 결과가 나빠지면 누구도 그 과정을 알아주지 않아요."
"그리고 디자이너는 나의 작업물에 너무 많은 감정이입을 해서는 힘들어요. 최선을 다하는 동시에 언제든 피드백을 받아들여 수정할 수 있다고 생각해야 유연하게 수용할 수 있어요."
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조언 감사합니다. 많이 배워가고 있어요."
일주일 뒤, 이서는 여전히 피드백받고 수정하며 업무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이서가 실패했던 첫 번째 프로젝트는 다행히 성과가 있었고, 이제는 클라이언트의 의뢰를 받게 되는 지속적인 프로모션 프로젝트로 발전되었다.
그렇게 시작된 두 번째 프로모션 프로젝트 담당자로 다시 이서가 지목되었다.
자신이 지목된 사실이 이서는 믿기지 않았다. 지난번 일이 있었기에 자신은 제외될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 모든 건 박 팀장이 마케팅팀을 설득한 결과였다.
회의 전, 그는 조용히 이 대리를 불러 상황을 설명했고, 둘은 마케팅팀에 이렇게 설명했다.
"이번 프로모션은 이서 씨가 담당하는 게 맞다고 봅니다. 초반부터 이 대리와 함께 진행하며 체크할 예정이고, 내부 프로세스도 조율해 두었습니다. 앞으로를 위해서라도 기회를 줬으면 합니다."
이는 신규 프로젝트로 업무 부하가 많은 이 대리와 더 많은 경험이 필요한 이서를 위한 박 팀장의 마음이었다.
마케팅팀은 처음엔 반신반의했지만 박 팀장의 진심 어린 설득에 결국 동의했다.
이 사실을 모른 채, 이서는 프로젝트를 다시 맡게 되었다는 사실에 조용히 놀라고, 묵묵히 마음을 다잡았다.
한번 넘어져 본 이서는 아픔 속에 한걸음 더 성장했다.
이서는 기획 미팅부터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박 팀장에게는 중간중간 디자인을 확인받았다. 모르는 점은 바로 질문했고, 팀원들과 자주 의견을 나누며 디자인을 완성해 갔다.
결과는 성공이었다. 마케팅 팀은 더 이상 수정사항을 요구하지 않았고, 클라이언트도 만족한다는 피드백을 전달받았다.
박 팀장은 조용히 말했다. "이서 씨, 정말 많이 성장했네요. 수고 많았어요."
이서에게 여전히 피드백은 아프고, 때론 그 말들이 머릿속을 며칠씩 맴돌기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아픔 속에 숨겨진 진심과 방향성을 조금씩 읽을 수 있게 됐다.
'안 좋은 피드백을 받더라도 무조건 주눅 드는 게 아니라, 내가 놓친 걸 찾는 게 먼저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며, 이전보다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하루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처음부터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중요한 건 조금씩, 계속 나아가는 것이라는 걸 이서는 느끼고 있었다.
그렇게 퇴근길 버스 창밖 풍경과 이어지는 마음속 다짐이 조용히 그녀를 안아주었다.
디자이너들을 위한 메모
1. 마감기한을 반드시 지키자: 실무에서의 디자인은 퀄리티보다 일정 안에 완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기도 합니다. 마감기한 안에 일정 이상의 퀄리티를 만드는 것이 실력이 좋은 디자이너로 평가받을 수 있습니다.
2. 피드백과 수용적 태도: 디자이너에게 피드백은 숙명과도 같은 것입니다. 신입 디자이너들은 때때로 결과물에 필요 이상으로 몰입하여 타인의 피드백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디자인은 대부분 타인의 '니즈'로 시작되는 결과물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스스로의 만족이 아닌 의뢰주의 만족을 기준으로 작업하며, 피드백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수용적 태도가 곧 디자이너의 실력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