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은 없었다, 질문이 틀렸던 거야
입사한 지 3주 차, 윤이서는 회사 업무에 점점 익숙해지고 있었다.
그동안 맡았던 업무는 기존 서비스의 콘텐츠 디자인이었다. 프로모션 배너, 이벤트 페이지 등 그녀가 제작한 콘텐츠가 실제 서비스에 올라가는 걸 볼 때마다 작은 뿌듯함과 성취감을 느끼곤 했다.
오늘 아침, 마케팅팀에서 새로운 디자인 요청이 메신저로 왔다.
[여름 맞이 특가 이벤트 배너 디자인 요청. 웹과 앱 모두 적용하며, 강조할 문구는 "최대 50% 할인"과 "기간 한정"으로 심플하게 부탁드립니다.]
처음엔 간단히 끝날 줄 알았던 작업이었지만, 디자인을 시작하자마자 욕심이 생겼다. 지금까지 맡았던 일들이 단순한 작업이라서 이번 기회에 제대로 자신의 능력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 컸다.
‘예쁘고 화려하게, 확 눈에 띄게 만들고 싶다.’
이서는 트렌디한 폰트에 다양한 컬러 조합, 감각적인 일러스트까지 추가하며 화려함을 더했다. 작업에 몰입해 수차례 배치를 바꾸고 조합을 변경하다 보니 어느새 몇 시간이 흘러 있었다. 하지만 결과물은 기대와 달랐다. 복잡한 화면 속에서 가장 중요한 메시지가 흐릿해져 있었다.
"분명 화려하긴 한데... 왜 이렇게 산만하지?"
그때 이 대리가 지나가다가 그녀의 모니터를 보고 잠시 멈췄다.
"이서 씨, 엄청 열심히 하네요? 디자인이 꽤 화려해졌는데요."
이서는 솔직히 말했다.
"사실 욕심부리다가 오히려 망친 것 같아요."
이 대리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아직 시간 많이 남았잖아요 다시 처음부터 되짚어보세요"
이 대리의 조언을 듣고 이서는 다시금 마음을 가다듬었지만 아직 해답을 알 수 없어 초조한 마음이 생겼다.
점심시간이 끝나고 이서는 혼자 힘으로 해결할 방법을 찾아 나섰다. 누구에게 묻는 것도 부담스러웠고, 괜히 '이것도 몰라요?' 같은 반응이 돌아올까 봐 겁이 났다.
어차피 이건 내 일이고, 누군가가 대신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니까.
또, 괜히 초반부터 사소한 것까지 물어보는 신입으로 보이고 싶지 않았다.
이서는 자신이 먼저 부딪혀보는 게 더 낫다고 생각했다. 먼저 디자인 커뮤니티에 가입해 관련된 팁을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게시글은 이서가 원하는 내용과는 달랐다. 그녀는 고민 끝에 오픈채팅방에 익명으로 질문을 올렸다.
「혹시 배너 디자인에서 메시지를 명확히 전달하는 좋은 팁이 있나요?」
몇 분 뒤, 몇 개의 답글이 달렸지만, 그 내용들은 너무 추상적이거나 일반적이었다.
「강렬한 폰트를 써보세요!」, 「컬러 대비가 중요해요!」, 「깔끔하게 만드세요~」
"깔끔하게라니... 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깔끔하게 하라는 거야?"
이서는 점점 초조해졌다. 답답한 마음에 디자이너 친구가 추천했던 유명 디자이너들의 브런치 아티클을 뒤져보기로 했다.
브런치 앱을 켜고 검색창에 ‘배너 디자인’, ‘CTA 버튼 강조법’, ‘디자인 실수 사례’ 등의 키워드를 급히 입력했다. 수 편의 아티클을 빠르게 넘겨가며 읽었지만 정작 필요한 답변을 찾기는 어려웠다.
지금껏 '좋아요'를 누르며 따라다녔던 디자인 인플루언서들의 글을 하나하나 살펴봤지만, 대부분 이론중심의 내용이고, 각자 상황이 다르기에 이서가 원하는 내용이 아니었다. 분명 그 글들은 높은 안목과 경험에서 나온 좋은 조언들이었지만, 지금 이서가 원한 건 원칙이 아니라 당장의 마술 같은 해결 방법이었다.
그녀는 결국 UX 디자인 관련 블로그까지 파고들었다. 하지만 눈에 띄는 구체적 팁이 보이지 않았고, 이미 그녀가 알고 있는 정보의 반복이었다.
"이게 뭐야, 구글 검색하다가 봤던 내용이랑 똑같잖아..."
이서는 노트북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시계를 보니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흘렀고 급한 마음에 여기저기 얻은 정보들을 무작정 디자인에 적용해 보았지만, 결과물은 여전히 혼란스럽기만 했다.
이서는 여전히 초조했고 유튜브도 열어봤다.
"배너 디자인 잘하는 법"
취업 전에도 하지 않았던 검색어를 입력해 브이로그, 튜토리얼, 디자인 리뷰 영상들을 1.5배속으로 넘기며 확인했지만, 이서가 느끼기엔 현실적인 도움이 되지 않았다. 누구도 틀린 말을 하는 건 아니었지만, 정작 이서의 디자인 상황에 바로 적용할 수 있는 조언은 없었다.
이서는 한참을 그렇게 모니터 앞에 앉아 있다가, 창밖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정답을 구하려고 뒤지고 또 뒤졌던 검색 기록들, 그 과정에서 느꼈던 허탈함과 좌절감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찝찝한 의문점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내가 어떤 것을 물어보고 있었지?”
그 순간, 그녀는 깨달았다.
자신이 하고 있던 수많은 검색과 클릭이 어쩌면 '정보 탐색'이 아니라, '현실 도피'였음을.
쉽게 누군가의 조언으로 빠르게 정답을 찾아내겠다는 조급한 집착이었고, 그 과정에서 애써 답해준 사람들과 소중한 시간을 들여 글을 써준 디자이너들의 진심 어린 노력마저 자신의 불안과 초조함으로 소비하고 있었다.
그들은 아무 잘못이 없었다. 오히려 너무 친절했다. 낯선 질문에도 진심으로 응답해 준 이들이었고, 브런치에 쓴 글들도 각자의 고유한 경험과 고민에서 비롯된 깊은 고찰이었다. 누군가에겐 충분히 도움이 되는 내용들이었을 것이다.
문제는, 이서 자신이 '지금 나에게 맞는 해답'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은 채 무작정 답만 찾으려 했다는 점이었다.
자신이 겪고 있는 복잡한 문제를 마치 인터넷에서 쉽게 찾을 수 있는 간단한 팁으로 해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 것 자체가 착각이었다.
이서는 그들을 오해하고, 원망하고, 스스로를 합리화하는 데 에너지를 쏟고 있었음을 깨달으며, 그 모든 이들에게 괜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왜 이렇게 바보 같았을까.'
이서는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제는 도움을 요청할 때였다.
그녀의 사수 이 대리에게 조심스럽게 물어보았다.
"대리님 배너 만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포인트가 뭔가요? 제가 너무 복잡하게 생각한 것 같아요."
이 대리가 곧바로 친절하게 답해줬다.
"한눈에 들어오는 명료함이 제일 중요해요. 사용자 입장에서 딱 필요한 정보만 보일 수 있도록요."
"그리고 디자인을 콘셉트에 맞지 않게 꾸미려고만 하면 오히려 역효과 나는 경우가 많죠.
이 대리가 이서를 바라보며 물었다.
"우리가 제작하는 배너의 주된 목표가 뭘까요?"
이서는 이대리의 질문에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이대리는 머릿속이 복잡해 보이는 이서를 보며 몇 년 전의 자신이 생각나며 웃음이 새어 나올뻔했지만
무덤덤한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
"고객들이 눌러보게끔 하는 게 첫 번째 목적이지 않을까요?"
이서는 잠시 눈이 동그랗게 바뀌었다.
"대리님 저는 왜 이런 기본을 까먹었을까요"
이 대리는 대답했다.
"맞아요, 신입 때는 누구나 그렇게 욕심이 앞서죠. 예쁜 디자인이 항상 좋은 건 아니거든요. 사용자가 가장 명확하게 메시지를 전달받을 수 있는 디자인이 좋은 디자인이에요."
"배너는 화려함도 중요하지만 먼저 사람들이 잘 눌러보게끔 하는 게 기본 목표이죠, 그래서 메인 카피라이트와 버튼이 들어간다면 같이 눈에 띄게 잘 강조해 주세요."
이 대리의 말을 듣고서야 이서는 너무 지나친 욕심과 불필요한 정보 수집이 오히려 독이 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리에 돌아와 차분히 숨을 고른 뒤, 이서는 자신의 디자인을 과감하게 수정했고 이서는 오전부터 제작한 배너를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팀장에게 전달했다.
"수고했어요. 메시지 명확하게 잘 들어오네요."
팀장은 빠르게 피드백을 남겼다.
"다만, 모바일에서 볼 때 텍스트 컬러의 대비감이 살짝 낮아 보이니 다음엔 그 부분만 더 신경 써보세요."
짧은 한 줄의 피드백이었지만 이서는 그것만으로도 안도감을 느꼈다. 과정은 힘들었지만 큰 실수 없이 업무를 마무리할 수 있었고, 무엇보다 자신이 다시 정리한 방향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버스 의자에 앉은 이서는 오늘 하루의 경험을 곱씹었다. 눈앞에 지나가는 어두운 터널과 반짝이는 불빛이 머릿속 생각들과 겹쳐졌다. 아침에 컴퓨터 앞에 앉으며 가졌던 의욕, 오후에 느꼈던 막막함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처음에는 '예쁘게, 눈에 띄게'라는 목표 하나로 시작했지만, 돌아보니 정작 사용자에게 전달해야 할 메시지는 뒷전이었다.
화려함에 집착한 나머지 본질을 놓치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고 나니, 부끄러움보다도 시원한 자각이 더 컸다.
"디자인은 내가 하고 싶은 말만 하면 되는 게 아니었는데."
실수는 아팠지만, 그 덕분에 지금처럼 명확한 방향을 발견하게 되었다. 오늘의 업무가 완벽하진 않았지만, 의미 있었다고 느껴졌다.
"생각보다 많이 헤맸지만, 그래도 여기까지는 온 거잖아. 부족한 건 맞지만, 오늘 배운 것은 분명 남을 거야."
이서는 오늘 처음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버스는 오늘의 깨달음을 싣고 천천히 다음 정거장으로 향했다.
디자이너들을 위한 메모
콘텐츠 디자인 실무에서 자주 하는 실수
‘예쁘기’에만 집착: 시각적으로 화려하지만 핵심 메시지가 묻히는 경우가 많음
핵심 정보의 계층 구조 무시: 무엇이 가장 중요하고, 무엇이 덜 중요한지에 대한 구분 부족
소비자 환경 미반영: 데스크톱 기준으로 작업 후, 모바일에서 가독성이나 비율 문제 발생
브랜드 가이드라인 미숙지: 색상, 폰트, 버튼 스타일 등에서 일관성 없는 디자인 발생
실무 팁
디자인 작업 전, 목표와 메시지를 한 줄로 정리해 보자:
“이 배너에서 사용자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한 문장은?”
의도한 감정을 중심에 두되, 정보의 우선순위를 시각적으로 표현하자.
완성 후, 사용자 입장에서 바라보기: “처음 보는 사람이 이걸 3초 안에 이해할 수 있을까?”
최초 스케치 or 가시안을 선호 색상 없이 흑백으로 진행해 시각적 계층에 집중하는 것도 방법이다.
가끔은 ‘버리기’를 연습해야 한다. 디자인 요소는 더하는 것보다 빼는 것이 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