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자이너의 첫 근로계약서
두 번째 출근길의 아침은 첫날보다는 조금 덜 긴장되었지만, 여전히 설렘과 작은 불안이 섞여 있었다.
이서는 알람 소리에 눈을 뜨자마자 창밖을 바라봤다.
햇살이 비추고 있었지만, 마음속에는 안도감보다 낯선 책임감이 더 크게 자리 잡고 있었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다 마음을 다잡고 자리에서 일어나 거울 앞에서 셔츠의 주름을 다시 펴고, 재킷의 깃을 손질하며 어제보다 더 단정하게 보이려고 노력했다.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학생이었던 자신이 이렇게 출근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이 여전히 믿기지 않았지만 아침 지하철 안 풍경은 전날보다 익숙하게 다가왔고, 이서는 그들 사이에서 점차 자신의 자리를 찾아가고 있었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동료들이 밝게 인사를 건넸다.
어제보다는 더 자연스럽게 웃으며 인사를 나누게 된 이서였다.
업무를 시작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관리팀에서 호출이 왔다.
드디어 근로계약서를 작성하는 시간이었다. 이서는 계약서 한 장이 상징하는 무게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단순한 절차가 아니라, '디자이너'라는 호칭을 공식적으로 부여받는 순간이었다.
관리팀 직원은 친절한 목소리로 계약서를 설명해 주었고, 이서는 꼼꼼히 읽어나갔다.
연봉, 수습기간, 근무시간, 연차, 퇴직금까지. 항목마다 머릿속 계산기와 질문이 동시에 작동했다.
특히 지적재산권, 경업금지, 비밀유지 조항은 낯설고 어려운 문장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질문을 던질 때마다 이서는 혹시 자신이 까다롭게 보이지는 않을지, 또는 회사에 대한 불신으로 비치지는 않을지 걱정이 앞섰다. 바쁜 담당자의 시간을 너무 뺏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목소리가 작아졌다가도,
스스로를 다잡고 다시 질문을 이어갔다.
"지적재산권 조항이 제가 만든 모든 디자인이 회사 소유가 된다는 뜻인가요? 포트폴리오에 활용할 수는 있나요?"
관리팀 직원은 부드럽게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네, 회사 업무 중 제작한 모든 창작물의 저작권은 회사에 귀속됩니다. 하지만 포트폴리오 목적으로 개인의 경력 개발을 위해 활용하는 건 가능합니다. 다만 회사의 기밀이나 공개되지 않은 자료는 사용하시면 안 됩니다."
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물었다.
"여기 경업금지 조항이 있는데, 퇴사 후 일정 기간 동종업계에서 일을 못 하게 되는 건가요?"
"네, 퇴사 후 1년 동안 경쟁사에서 유사한 업무를 하는 걸 제한하는 조항이에요. 일반적인 직업 활동까지 심하게 제한하지는 않지만, 경쟁사에서 중요한 직책을 맡는 건 주의해 주셔야 합니다."
"그럼 비밀유지 조항은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요?"
"업무상 접하는 회사의 중요한 정보나 프로젝트 내용을 외부로 유출하지 않는다는 약속입니다. 퇴사 후에도 일정 기간 비밀을 유지해야 하는 의무가 있습니다."
모든 설명을 듣고 나서 계약서에 서명을 하기 전 마지막으로 펜을 든 이서의 손끝이 살짝 떨렸다. 그 안에는 여러 감정이 얽혀 있었다.
법률 지식이 부족한 자신이 정말 문제없는 계약을 맺고 있는 건지 불안했지만, 그보다 더 큰 감정은 ‘진짜 디자이너가 되는 순간’에 대한 두려움과 설렘이었다.
결국 이서는 펜을 내려 계약서에 서명했다.
이 계약은 단순한 종이 한 장이 아니라, 책임과 기대, 그리고 처음으로 '직업인'으로서 맞이하는 공식적인 첫걸음이었다.
자리로 돌아온 이서는 깊은숨을 내쉬었다. 정신을 가다듬고 책상에 앉았을 때,
책상 위의 작은 화분이 눈에 들어왔다. 화분 앞에는 손글씨로 적힌 메모가 있었다.
“환영합니다 :)”
놀란 듯 화분을 바라보던 이서에게 사수인 이 대리가 다가왔다.
"이서 씨 환영 선물이에요. 어제는 정신없을 것 같아 오늘 드렸어요. 앞으로 잘 부탁해요."
그리고는 잠시 망설이더니 덧붙였다.
"이제부터는 이서 씨도 프로젝트에 필요한 업무가 조금씩 추가될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은 유심히 프로젝트 내용들을 살펴보세요."
이서는 마음 깊은 곳에서 따뜻함이 퍼지는 것을 느꼈고, 조용히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대리님. 정말 감사합니다."
그 말에 이 대리는 옅은 미소를 지었고, 다시 자신의 자리로 돌아가 화면을 바라보며 일을 시작했다.
이서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이런 사람이 사수라 다행이다’라고 생각했다.
이서는 다시 책상 앞에 앉아 디자인 가이드와 프로젝트 파일을 하나하나 열어보았다.
이제는 자신이 이 결과물을 책임지는 일원이라는 사실이 실감 났다.
어제와는 다른 시선으로 파일을 바라보며, 작은 수정 과정 하나에도 깊은 생각을 담으려 애썼다.
그리 길지 않은 시간 동안 이서는 자신이 어떤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지,
어떤 태도로 일하고 싶은지를 스스로에게 묻는 시간을 가졌다.
그리고 그것을 조심스럽게 메모장에 적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하루가 저물어갈 무렵, 회사 전체가 퇴근 준비로 분주해졌다.
이서는 책상을 정리하며 오늘 하루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아침의 긴장, 계약서 앞에서의 복잡한 심경, 사수의 환영 선물, 업무에 몰입하며 느낀 작은 성취감.
모든 순간이 낯설었고 버겁기도 했지만, 그 속에서 분명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사무실 문을 나설 때, 이서는 또 한 번 화분을 바라보았다.
작고 조용한 그것이 전하는 따뜻함은 이서에게 오늘의 자신을 응원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사무실 복도에 드리운 노을빛을 바라보는
이서의 어깨엔 여전히 낯설고 어색한 무게가 얹혀 있었지만, 그 무게를 받아들이는 자세만큼은 조금 단단해져 있었다. 건물 문을 나서는 순간, 바람이 얼굴을 스쳤다.
하루를 잘 보낸 사람들이 반기게 되는 상쾌한 공기였다. 이서는 작게 숨을 들이쉬고, 또 내쉬었다. 천천히, 그러나 단단한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디자이너들을 위한 메모: 근로계약서 체크리스트
1. 임금 및 수당
연봉 총액 외에 기본급과 성과급 비율 확인
식대, 교통비, 통신비 등 실비 지원 여부
2. 근로시간과 수습조건
주당 근무시간과 유연근무제 적용 여부
수습 기간 중 급여 차감이나 조기 해지 조건 명시 여부
3. 연차 및 휴일
연차 발생 시기와 사용 방식 (연차 촉진제도 여부 포함)
법정 공휴일과 대체휴일 적용 여부
4. 저작권 및 포트폴리오 사용
업무상 제작물의 저작권 귀속
포트폴리오 사용 가능 여부와 조건 (보안자료 제외 등)
5. 경업금지 조항
적용 기간 (보통 6개월~1년), 적용 범위(업종, 지역) 확인
과도한 제한일 경우 무효 가능성도 검토
6. 비밀유지 조항 (NDA)
적용 시기와 범위 (퇴사 이후까지 포함되는지 여부)
NDA 위반 시 책임 범위 확인
7. 근태관리 및 복무규정
재택근무, 외근, 지각/조퇴 시 처리 기준
경조사, 병가 등의 휴가 사용 방식
8. 계약서 사본 보관
서명 전 계약서 촬영 또는 PDF 저장
전자서명 시에는 저장 링크 및 원본 확보
+ Tip
이해되지 않는 조항은 묻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필요시 가족이나 지인, 노무사 등에게 사전 검토를 부탁해 보자.
불공정하거나 이해되지 않는 내용은 협의 요청이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