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공간에서 마주한 새로운 관계들
처음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이서는 자신의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어젯밤에도 몇 번이나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했던 장면이었다.
입구를 지나 복도를 따라가며 낯선 풍경 속에 익숙함을 찾으려 애썼다.
흰색 벽과 나무 책상이 놓인 공간은 면접 때 봤던 모습 그대로였지만, 공기의 온도는 전혀 달랐다.
이젠 그저 방문자가 아닌, 이 공간에서 ‘일하는 사람’이 된 것이다.
팀장이 이서를 데스크에 안내하자, 맞은편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이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첫 출근이시죠?”
순간 당황했지만, 이서는 얼른 미소를 띠며 고개를 숙였다. "네, 잘 부탁드립니다."
잠시 후, 팀장이 “오늘은 우리 팀에 새로 합류한 윤이서 디자이너입니다”라고 말하자
주변에 있던 동료들이 고개를 들어 인사를 건넸다.
각자의 자리에서 짧게 눈을 마주치며 “잘 부탁드려요”라는 인사가 오갔다.
이서도 작게 인사를 건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모두가 무심한 듯 친절했다.
이서는 속으로 생각했다. 이 인사들이 앞으로 어떤 관계로 이어질까.
이 조용하고 익숙한 듯 낯선 공간에서 자신도 자연스럽게 어우러질 수 있을까.
짧은 눈빛과 미소 속에서도 묘하게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지금까지 이서의 디자인은 언제나 혼자만의 작업이었다. 노트북 앞에 앉아 구상하고, 완성하고, 피드백을 받더라도 스스로 정리하며 성장해 왔다.
하지만 이제는 달랐다.
이 공간에서 이서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논의하고, 공유하고, 조율하며 함께 만들어가는 과정에 들어서야 한다. 낯설지만 설레는 변화였다.
회의실에서 팀장이 간단한 OT를 시작했다. 회사 소개, 조직 구조, 디자인팀의 역할, 앞으로의 일정이
순서대로 이어졌다. 회사는 막 하나의 서비스를 시장에 내보낸 상태였고,
다음 프로젝트를 위한 준비에 한창이었다.
규모가 작기에 구성원 한 사람 한 사람이 중요한 시점이었다. 이서는 그 무게를 낯설게 느꼈다.
“우리 회사는 아직 프리 A 단계라고 할 수 있는 스타트업이에요.
이번에 받은 투자로 다음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고요.”
팀장의 설명이 이어졌다.
이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스타트업 생태계를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디자이너들을 위한 메모
스타트업은 투자 유치 단계에 따라 시드(Seed), 프리 A(Pre-A), 시리즈 A, B, C 등으로 나뉘며,
각 단계는 기업의 성장 수준과 투자 유치 목적에 따라 구분된다.
이 구분을 이해하는 것은 디자이너에게도 중요하다.
회사의 현재 위치를 이해하면, 디자이너가 기대되는 역할과 프로젝트의 성격,
그리고 조직의 방향성까지 가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시드(Seed) 단계: 스타트업의 가장 초기 단계로, 아이디어나 프로토타입 수준의 사업 아이템을 기반으로 창업자 본인 혹은 가까운 투자자로부터 소액의 자금을 조달한다. 제품 개발과 시장 적합성 탐색이 주요 목표이며, 팀 구성도 아직 불완전한 경우가 많다.
프리 A(Pre-A) 단계: 실제로 MVP(최소 기능 제품)가 시장에 출시된 이후 사용자 반응을 확인하고, 사업 모델 가능성을 검토하는 시기다. 이 단계에서는 제품이 시장과 어느 정도 맞물리는지 확인하는 ‘제품-시장 적합성(PMF, Product-Market Fit)’ 확보가 핵심이다. 자금은 이를 개선하거나 사용자 기반을 확대하는 데 쓰인다.
시리즈 A 단계: 제품과 시장의 기본적인 궁합이 입증되면, 본격적인 사업 확장을 위해 대규모 자금이 유입된다. 조직을 정비하고, 마케팅과 영업을 강화해 수익화를 목표로 하며, 디자이너는 제품의 완성도를 높이는 동시에 브랜드 경험 전반에 참여하는 경우가 많다.
시리즈 B, C 단계: 시리즈 B는 안정적인 수익 구조와 사용자 기반을 바탕으로, 해외 진출이나 신규 사업 확장을 위한 단계다. 시리즈 C는 IPO(기업공개) 또는 M&A(인수합병)를 염두에 둔 규모 확장 단계로, 이 시점의 디자인은 단순한 UI 수준을 넘어, 조직 전반의 서비스 경험과 전략적 디자인 역량을 요구받는다.
예: 컬리(퀵커머스), 밀리의 서재(전자책 구독)는 시리즈 C 단계에 해당하며, 대중적인 인지도와 동시에 글로벌 또는 산업적 확장을 모색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례다.
교육이 계속되며 실무에 사용하는 협업 툴도 소개됐다. ‘피그마’, ‘노션’, ‘슬랙’은 익숙한 이름이었지만,
실무에서 어떻게 쓰이는지는 여전히 어색했다. 제공받은 계정을 열어보며 설명을 따라갔다.
“이건 지난번 출시 화면의 초기 와이어프레임인데…”
팀장의 설명에 이서는 무의식적으로 자세를 고쳐 앉았다. 실전의 무게가 화면 속에서 느껴졌다.
교육이 마무리되자 팀장은 기존 프로젝트 자료가 담긴 링크를 공유하며 말했다.
“점심 먹고 시간 날 때 천천히 봐요. 저는 미팅 있어서 잠깐 자리를 비울게요.”
이서는 자리에 앉아 조심스럽게 파일을 열기 시작했다.
와이어프레임, 화면 시안, 피드백 히스토리. 그것은 단순한 작업물이 아니라,
생각의 흐름과 팀의 대화가 고스란히 담긴 집합이었다.
이서는 마치 누군가의 머릿속을 들여다보는 기분으로 페이지를 넘겼다.
혼자 작업하던 이전과는 전혀 다른 밀도였다.
잠시 후, 사수가 조용히 말했다.
“첫날이니까 천천히 자료부터 훑어보세요. 궁금한 건 언제든 물어보시고요.”
“네, 감사합니다.” 이서는 조심스럽게 답했다.
사수는 다시 화면으로 돌아가 집중하기 시작했다.
피그마를 빠르게 조작하고, 슬랙을 확인하며 손이 멈추지 않았다.
그 모습이 익숙하고 단단해 보여서, 이서는 문득 ‘나도 언젠가 저런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어쩐지 멋있었다.
오전이 지나고 팀장이 돌아오자 점심시간이 되었다.
“근처에 괜찮은 덮밥집 있어요. 같이 가요.”
이서는 조용히 따라나섰다. 날씨는 맑았지만 바람은 서늘했다.
걷는 동안 팀장과 동료들은 가볍게 말을 이어갔다.
“이 동네는 점심시간 되면 진짜 빨리 붐벼요.”
“첫날인데 날씨 괜찮아서 다행이에요.”
“혹시 매운 거 좋아하세요?”
이서는 그 틈에 몇 마디를 얹었지만, 머릿속은 점점 복잡해졌다.
방금 소개받은 얼굴과 이름이 전혀 연결되지 않았다.
‘누가 누구였지?’ 하며 애써 정리해보려 했지만, 이름표 없는 얼굴들이 겹쳐졌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다행히 식당에 도착하자 동료들 사이에서 어떤 드라마 이야기로 열띤 감상 토크가 이어졌고,
마침 최근에 챙겨 본 이서도 자연스럽게 대화에 합류할 수 있었다.
먼 제주도의 애순이와 관식이의 사랑 이야기가 지금 서울의 이서를 돕고 있었다.
이렇게 익숙한 이야기 속에서 긴장이 조금씩 풀리고, 어색했던 분위기에도 잔잔한 웃음이 돌기 시작했다.
이서는 느꼈다. 누군가 먼저 말을 걸어주는 것이 얼마나 큰 힘이 되는지를.
어색함과 조심스러움 속에서도, 그 말 한마디 한마디가 자신을 이 자리에 연결해 주는 끈처럼 느껴졌다.
직장에 들어오기 전에는 몰랐던 일이다. ‘인사 잘하고, 일만 잘하면 되지’라고 생각했지만,
그 사이사이에 감정의 결이 있었다.
말 한마디, 눈빛 하나에도 서로를 배려하고 긴장을 풀어주는 공기가 있었다.
무심한 듯 건네는 말과 가볍게 웃는 표정에도 이서는 조금씩 마음을 놓기 시작했다.
점심을 마치고 사무실로 돌아오는 길, 이서는 자신이 이제 진짜 시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또 한 번 실감했다. 누군가의 자리를 대신한 것도, 대체 가능한 인력이 된 것도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 이 순간부터는, 이서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 있다는 믿음이 조심스럽게 피어오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