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는 처음이라, 나도 배워가는 중입니다
디자인팀이 조용해질 때가 있다. 다들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지만, 그 침묵엔 묘한 결이 있다. 묵묵히 손을 놀리며 각자 생각에 잠기는 시간.
그런 고요함 속에서, 유독 손이 빠르게 움직이는 사람이 있다.
윤이서의 사수이자, 팀의 대리인 이지민.
지민은 입사 초부터 지금까지 줄곧 막내 디자이너였다. 실무를 도맡으며 팀의 허리처럼 움직여온 사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처음으로 후배가 생겼고, 처음으로 누군가의 ‘사수’가 되었다.
처음부터 디자이너였던 건 아니다. 그는 무역회사에서 일했다. 택배 송장, 통관서류, 클라이언트 응대. 명확하고 반복적인 일이 싫지는 않았지만, 자기가 점점 작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지민은 어느 날, 커피를 타러 나간 사무실 탕비실에서 멍하니 서서 생각했다.
“이걸 5년, 10년 뒤에도 하고 있을까?”
눈앞에 그려지는 자신의 모습이 너무 뚜렷하고, 동시에 너무 답답했다.
대학 시절 즐겨 그리던 낙서, 학보사 디자인 활동, 그리고 좋아하던 웹페이지 디자인 저장해 두던 폴더. ‘그때 그거, 그냥 취미였던 걸까?’라는 생각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그렇게 지민은 더 늦기 전 마지막 도전이라 생각하며, 퇴근 후엔 국비지원 학원에서 웹디자인을 배웠다. 몇 달간 기초 수업을 듣고 프로젝트를 쌓아 포트폴리오를 만들었다. 하지만 완성된 결과물은 어딘가 부족했다. 이미지도, 플로우도 어색해 보였으나 스스로는 해결 방법을 찾기 어려웠다.
"이건 실무에선 좀 약하겠네요." 힘들게 현직 디자이너를 찾아 조언을 받았을 때 들은 이 말이 계속 마음에 남았다.
그래서 다시 돈을 모아 사설 학원에 다녔다. 낮엔 근무, 밤엔 다시 디자인 작업. 많지 않은 월급에 학원비와 월세, 학자금 대출을 감당하는 건 쉽지 않았지만, 그는 한 번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시절의 지민은, '디자이너가 될 수 있을까?'보다 '언젠간 될 거야'를 더 자주 생각했다.
그리고 어느 날, 첫 입사 제안을 받는다. 5인 미만의 디자인 에이전시였다. 최저 임금보다 못할 것 같은 작은 연봉이었지만, 실무 경험을 쌓을 수 있다는 말에 망설이지 않았다.
그 회사는, 디자인도 회사도 매뉴얼이 없었다. 출근하면 가장 먼저 대표의 기분을 살펴야 했다. 지민은 막내였기에 잡무를 도맡았다. 디자인은 늘 급했고, 기획은 없었다. 하지만 더 힘들었던 건, '지도'가 아닌 '지적'만 남는 대표의 태도였다.
"이딴 디자인을 누가 돈 주고받아?" "이래서 국비출신은 안 된다니까. 실전 감각이 없어."
피드백은 늘 무례했고, 모욕이었다. 지민은 매일 밤을 새우며 시안을 갈아엎었다. 하지만 바뀌는 건 없었다.
연차는 형식상 있었지만 쓸 수 없었고, 월급은 종종 밀렸다.
야근 수당을 요구한 동료에게는 비꼬며 말했다.
"너는 그렇게 돈 욕심만 부리다가 이 업계에서 아무것도 못한다."
그렇게 퇴사한 동료의 빈자리를 보며 대표는 말했다.
"자기 주제를 모르면 이렇게 되는 거예요. 다른 회사는 뭐 다를 것 같아? 여기서 일하고 싶다는 사람 널렸어요, 널렸어."
대표에게 직원은 그저 소모되는 부품일 뿐이었다. 계속해서 회사는 그런 식으로 운영됐다. 함께 일하던 디자이너들도 하나둘씩 그만뒀고, 점점 업무량은 지민에게 쏠렸다.
밤 11시가 넘은 시간까지 야근하는 일은 잦아졌고 심지어 철야 근무를 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매일 피로가 누적되어 몸은 무거워지고, 일에 대한 열정은 갈수록 메말라갔다.
그렇게 고된시간을 무려 3년이나 보낸 지민이었다. 무던하고 부지런한 지민도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었고, 곧 무너질 것 같았다.
이따금 화장실 거울 앞에 선 지민은 물끄러미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퀭한 눈, 자꾸만 굳어가는 입꼬리. '내가 뭘 잘못했지?'란 질문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잘해보려 했을 뿐인데, 왜 나만 이렇게 몰려 있는 걸까. 누군가에게 말하고 싶었지만, '네가 뭘 아느냐'는 말이 되돌아올까 봐 입을 다물었다.
그 침묵은 곧 무력감이 되었다.
그렇게 어느 날, 대표에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건 좀 부당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계속 일하면... 저는 너무 버겁습니다."
대표는 책상에 앉은 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말했다.
"그럼 나가. 퇴직금은 생각하지 마."
그 말 한마디에, 지민은 처음으로 회사를 나와 노동청을 찾았다. 마음 한편은 서러웠고, 한편은 후련했다. 처음엔 무서웠지만, 이건 정의가 아니라 생존이라는 걸, 점차 깨달았다. 몇 번의 진술과 서류 제출 끝에, 미지급된 퇴직금을 받았다. 그리고 그 사건 이후, 회사는 얼마 안 가 문을 닫았다.
그로부터 몇 달 후. 예전에 함께 일하던 디자이너가 소개해 준 자리에서 박 팀장을 처음 만났다. 인터뷰 자리에서 그는 따뜻하게 말했다.
"지민 씨, 고생 많으셨겠어요. 여기선 그런 일 없을 거예요."
그 말이 진심처럼 느껴졌다. 그렇게 두 번째 회사에 들어오게 됐다.
지금의 회사에서는 처음으로 '막내'가 아닌 역할을 맡고 있다. 그리고 그 막내가, 바로 윤이서였다.
이서 역시 성실하고, 무던하며, 예의 바르다.
초보답게 허술하고 걱정 인형 같은 모습도 보여줄 땐, 마치 깃털이 뽀송한 병아리 같기도 했다. 하지만 이 병아리는 꽤 날카로운 피드백에도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그게 더 걱정되기도 했다. 마치 몇 년 전 자신의 모습과 겹쳐 보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서의 작업물을 살피며 속으로 종종 중얼거렸다.
‘잘하고 있어. 너무 조급해하지 말고.’
하지만 그 말은 좀처럼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사실 지민은 오래전부터 마음속에 그리고 있던 사수의 이미지가 있었다.
방향만 잡아주고, 답은 스스로 찾게 도와주는 사람. 잘했을 땐 꼭 말로 인정해 주는 사람.
그런데 막상 사수가 되고 나니, 그 이상과 현실 사이엔 생각보다 많은 간극이 있었다.
좋은 말을 전하고 싶으면서도, 이서의 반복된 실수에 답답함이 올라올 때면 그 마음을 다 숨기기도 어려웠다.
며칠 전, 이서의 시안을 보며 피드백을 주던 날이었다. 나름 조심스럽게 전했다고 생각했지만, 이서의 얼굴에 잠깐 떠오른 긴장된 표정을 지민은 놓치지 못했다.
‘말투가 너무 딱딱했나? 오히려 자신감을 꺾은 건 아닐까…’
그날 밤, 박 팀장이 늘 어떤 식으로 말했는지를 떠올렸다.
날카로운 지적보다는 타이밍 좋은 한마디. 정답을 바로 말하진 않지만, 방향을 제시해 주는 말투.
그건 마치, 말없이 옆에서 속도를 맞춰주는 사람 같았다.
지민은 그 뒤로 자신의 초보 시절을 떠올리며, 이서의 속도에 맞춰 조금 더 천천히, 여유 있게 피드백하려 애썼다.
며칠 뒤, 퇴근길 복도에서 박 팀장이 지민에게 말했다.
"요즘 이서 씨, 좀 안정돼 보이더라. 이 대리랑 얘기 많이 하는 것 같던데."
지민이 고개를 끄덕이자, 박 팀장이 가볍게 웃으며 덧붙였다.
"너무 잘하려고 애쓰지 말고, 그냥 이 대리 방식대로 해요. 잘하고 있어."
그 말은 조용한 격려처럼 오래 남았다. 완벽해야 한다는 강박이, 그 말 한마디에 조금 느슨해지는 기분이었다.
사수가 된다는 건 누군가를 끌고 가는 일이 아니라, 옆에서 함께 걸어주는 일이란 걸, 이제야 몸으로 배우고 있었다.
여전히 서툴고 때로는 흔들리지만, 지민은 안다.
누군가의 옆에 진심으로 있어주려는 그 마음 자체가, 사수로서의 첫걸음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디자이너들을 위한 메모
1. 처음 사수가 된 디자이너에게
-피드백은 감정이 아닌 관찰로 전달합니다.
피드백은 감정이 아닌 ‘관찰’에 기반해야 합니다.
“이건 좀 별로예요”보다는 “이 부분은 사용자가 흐름을 이해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처럼 구체적으로 표현합니다.
정확한 피드백은 성장을 위한 기준이 됩니다.
→ 출처: Nielsen Norman Group, UX Mentorship Tips
-정답을 주기보다, 함께 방향을 찾아갑니다.
“이건 이렇게 해요”보다는 “왜 이렇게 했어요?”, “이 문제를 어떻게 바라봤나요?”라는 질문이 상대의 사고력을 확장시킵니다.
디자이너는 단순히 답을 고르는 사람이 아니라, 문제를 정의하고 접근하는 사람입니다.
→ 출처: Julie Zhuo, 『The Making of a Manager』
-심리적 안전감을 만드는 것이 먼저입니다.
실수해도 괜찮고, 질문해도 민망하지 않은 환경을 만드는 것이 팀 전체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실제로 심리적 안전감이 높은 팀이 더 높은 성과를 낸다는 연구도 있습니다.
→ 출처: Google, Project Aristotle
-방향에 대한 안내는 큰 힘이 됩니다.
“작업 폴더는 이렇게 나누면 좋아요”, “파일명은 이 기준에 맞춰봅시다”처럼
처음 시작하는 이에게는 그런 기본적인 안내 하나도 큰 기준이 됩니다.
방향만 잡아줘도 후배는 스스로 길을 찾아갑니다.
→ 출처: IDEO U, Leading for Creativity
누구든 처음은 서툽니다.
그리고 그 서툶 덕분에 관계는 단단해집니다.
사수는 정답을 말해주는 사람이 아니라,
곁에서 함께 고민해 주는 사람입니다.
2. 첫 회사에서 알아야 할 기본 권리
-근로계약서는 반드시 서면으로 작성합니다.
입사 시 구두 약속만 받고 일하는 경우, 법적으로 보호받기 어렵습니다.
근로계약서에는 업무 내용, 근무시간, 임금, 휴가 등이 명시되어 있어야 하며, 입사 당일 전에 반드시 작성·교부받아야 합니다.
→ 출처: 근로기준법 제17조
-연차휴가는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1년 미만 재직자도 매달 1일의 유급휴가가 발생하며, 1년 이상 근속 시 연 15일의 연차가 부여됩니다.
회사는 연차 사용을 제한하거나 사용하지 못하도록 강제할 수 없습니다.
→ 출처: 근로기준법 제60조
-임금과 수당은 정해진 날짜에 전액 지급되어야 합니다.
월급은 약속된 날짜에 전액 지급되어야 하며, 야근·휴일 근무 등에 대한 수당도 포함해야 합니다.
임금 체불은 명백한 법 위반이며, 고용노동부를 통해 진정을 넣을 수 있습니다.
→ 출처: 근로기준법 제43조, 제56조
-퇴직금은 반드시 지급받아야 합니다.
1년 이상 근무한 모든 근로자는 퇴직 시 퇴직금을 받을 수 있으며, 회사가 이를 지급하지 않으면 법적 대응이 가능합니다.
→ 출처: 근로자퇴직급여 보장법 제4조
처음 겪는 일이라고 해도
불이익을 참고 견디는 것이 미덕은 아닙니다.
모두가 알아야 할 노동의 권리는, 디자이너에게도 예외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