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50대가 되었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갱년기가 찾아왔다. 가끔 얼굴에 열이 오르고 몇 달씩 생리가 끊기고 드라마나 책을 볼 때 감정신이 나오면 잘 운다. 아니 펑펑 운다. 이러한 변화들을 갱년기 변화라고 많이 들어 알고 있었고 생각도 하고 있었지만 나는 이런 변화가 아니라 내가 벌써 50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했던 것 같다. 예전 어릴 때 내가 느끼던 50대는 지금 내가 느끼는 50대가 아니다. 그래서 내가 50대가 되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던 거 같다.
직장을 옮기면서 일주일의 휴가를 얻게 되었다. 예전 같으면 무조건 여행을 갔겠지만 이번에는 나만의 일주일을 보내보기로 했다. 우선 월요일에는 미리 예약해 둔 은희경 북 콘서트에 가기로 했다. ‘새의 선물’이란 그녀의 책을 읽은 지가 너무 오래되어 잘 기억이 나지도 않고 책도 집에 없어서 다시 구입해서 책을 읽어보았다. 책은 어릴 때 읽는 것과 나이 들어 읽을 때가 다른 것 같다. 줄거리는 기억이 나지만 주인공들에 대해 느껴지는 것들이 다르게 다가왔다.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이 크게 다가온 부분들도 있었고 그때 어렴풋이 느껴졌던 감정들이 이제는 완전히 다 알 것만 같은 그런 감정들을 되새기며 책을 아주 재밌게 읽었다. 그러면서 예전 책들을 다시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처음 가 본 북 콘서트는 뭐랄까? 내 지적 호기심을 자극시켜 주었다고 할까? 한마디로 너무 좋았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같은 책을 읽고 그것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일이 이렇게나 멋있는 일이었다니. 다음에도 이런 기회가 있다면 또 참여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날은 레터링 케잌을 만들러 갔다. 이것은 참 우연히 다가오는 결혼 52주년을 기념하고 싶어 레터링 케잌을 예약하려고 찾다가 마침 원 데이 클래스 수업으로 직접 만들 수 있다는 글을 보고 예약을 하게 되었다. 원하는 디자인을 고르고 그림과 레터링 연습을 하고 빵에 크림 바르기도 해보고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그런 나에게 똥손인 나도 잘 할 수 있다고 샘은 자신감을 불어 넣어 주셨다. 그렇게 마침내 완성된 케잌은 그럴싸해 보였다. 이게 뭐라고. 뿌듯하기까지 하다. 그러고 생각해보니. 아이가 자랄 때 체험 학습시킨다고 많이도 다닌 거 같다. 아이가 체험하는 동안 엄마인 나는 옆에서 사진 찍어 주고 완성된 작품 보고 박수쳐 주고 같이 또 사진 찍고. 그때 우리 아이도 지금 나와 같은 뿌듯한 감정을 느꼈을까. 하기 싫은 거 억지도 한 건 아닐까? 나처럼 원하는 걸 했으면 무척 뿌듯했을 텐데. 나는 이제야 그걸 알았네.
수요일에는 전부터 가 보고 싶은 북 카페에 가 보기로 했다. 망원역 에는 처음 가 보는 초행길이다. 길치인 내가 잘 찾아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었지만 일단 부딪쳐 보기로 했다. 그렇게 도착한 북 카페는 생각보다 작지만 아득했고 서점 특유의 우디향이 날 반겨주었다. 여기 시그니쳐 메뉴라는 흑임자 라떼를 주문하고 미리 찜 해 논 책 도 한 권 사 서 자리에 앉아 있으니 책 읽을 맛이 났다. 어느새 훌쩍 두 시간이 지나가고 나는 오로지 나만의 두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너무 행복한 시간 이었다.
다음날은 무엇을 할까 고민을 했다. 내가 해보지 않은 일을 해보면 어떨까? 그래서 그림에 도전 해
보기로 했다. 내가 가장 자신 없는 분야가 바로 그림인데 그것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일단 가장 쉽다는 아크릴화 그리기 원 데이 클래스를 예약했다. 나는 좋아하는 꽃 튤립을 그리기로 하고 가장 쉬워 보이는 도안을 골랐다. ‘그림은 정말 나랑 안 맞는구나’ 라고 생각할 무렴 샘이 내게 와서 이렇게 얘기 하는 거다. ‘괜찮은 데요’ ‘잘 하시네요’ 헐.. 원 데이 클래스 샘들은 입에 칭찬을 물고 계시나보다. 스케치한 그림에 색을 입히고 덧칠을 계속 하다 보니 그림이 점점 나아지고 있었다. 신기했다. 내가 신기해하는 모습을 눈치 챘는지 샘이 재미있죠? 하신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거렸다. 샘이 이런 맛에 그림 그리는 거예요. 하신다. 한 가지씩 새로운 기법을 배우는 재미에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다고 하시면서. 아. 미술은 그냥 잘 그리면 되는 줄 알았다. 내가 정말 무식해 보이는 순간 이었다. 내가 완성한 그림은 지인들이다 다 ‘와’ 하며 잘 그렸다고 한다. 그림을 계속 배워볼까 심각하게 고민 중이다.
내가 마지막 날에 해보고 싶은 것은 나만의 향수 만들기이다. 나는 평소에 향수나 디퓨져에 관심이 많아서 꼭 한번 나의 향수를 만들어 보고 싶었다. 하지만 인생이 이렇게 뜻한 대로만 되던가. 이렇게 4일 동안 내 뜻대로 보낸 것도 다행이지 싶다. 마지막까지 마무리를 못해서 아쉽지만 그래도 4일 동안 참 행복한 시간 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런 시간은 아마 처음인 것 같다.
나는 갱년기를 나를 찾아가는 시간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나는 어떤 사람인지. 나는 무엇을 좋아하는지. 나는 언제 행복을 느끼는지. 내가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인지를 찾아가는 시간이 아닐지. 그래서 앞으로 남은 인생은 어떻게 살아야 할지 생각해보는 시간이 아닐까 싶다.
나는 지난 4일 동안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미리 맛보기를 한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래서 나에게 무엇보다 소중한 시간 이었다. 이제 더 이상 갱년기가 두렵지 않다. 나는 이제 내가 누구이고 내가 무엇을 하면 행복하고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렴풋이 알아가고 있는 것 같다. 남은 인생 2막은 나의 의지대로 내 설계대로 살아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