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느 때처럼 퇴근하고 집에 왔다. 옷을 갈아입고 우리 집 남자 둘이 저녁을 먹었는지 확인했다. 어라, 밥이 밥통에 그대로 있다. 국도 그대로인 것 같고.
저녁 안 먹었냐고 물었더니 두 남자 모두 답이 없다. 남편은 식욕이 없어도 끼니를 거르는 사람이 아니다. 이상했다. 그러고 보니 집에 들어섰을 때부터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아이 방을 노크했다. 어, 문이 잠겨있다. 우리 아이는 사춘기 때에도 문을 잠그지는 않았는데. 정말 이상했다.
문을 두드려도 대답이 없다. 자는 것 같지는 않은데. 할 수 없이 문을 따고 들어갔다.
아이는 책상에 엎드려 있었는데 얼핏 운 것 같기도 했다. 어디 아프냐고 해도, 저녁을 안 먹었냐는 말에도 대꾸가 없다.
무슨 일인가 어리둥절해하는 나를 남편이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고는 사실 저녁 먹으려고 차렸는데 식탁에서 한두 마디 오가다 언성이 높아졌다고 한다. 남편은 아이에게 성적에 맞춰서 네가 원하는 대학 말고 다른 대학에 가라고 했고 아이는 그런 대학 가느니 차라리 군대에 가겠다고 했단다. 군대 얘기에 남편이 발끈해서 그동안 참아왔던 잔소리를 날렸고 아이는 아이대로 아빠가 고리타분하고 말이 안 통한다고 했다고.
여기까지 들으니 안 봐도 비디오다. 지금껏 잘 참아왔던 잔소리를 해댄 남편도 이해가 되고 자기 마음을 이해 못 한다고 생각했을 아이 마음도 이해가 되었다.
아이가 어릴 적엔 누구보다 자상하고 따뜻한 아빠였고 그래서인지 아기였을 때 엄마인 나보다 아빠를 더 찾아대곤 했는데 사춘기를 지나면서 조금씩 아빠랑 멀어지는 것이 느껴지더니 입시를 두고 대적하면서 더 멀어지는 것 같다.
아이가 클 때는 내가 아이랑 많이 싸우고 남편이 중재하고 했는데 어느새인가 그 역할이 바뀐 것 같다. 양쪽을 오가며 서로의 마음을 달래주는 것도 쉽지 않다.
다음날 나는 좋게 아이와 대화를 시도했다. 하지만 요점은 어제 아빠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이는 왜 자꾸 강요하냐고 대들었다. 나는 의견 나누기 혹은 설득이라고 생각했는데 아이 입장에서는 아빠, 엄마가 돌아가며 자기 의견은 무시한 채 일방적으로 강요한다고 생각했나 보다. 나는 나대로 화가 나서 흥분했다. 아이 마음을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부모 뜻을 몰라주는 것에 대해서 화가 났다.
냉랭할 대로 냉랭해진 분위기에 집에 있기가 부담스러웠다. 마침 일찍 퇴근한 남편에게 봉은사에 가고 싶은데, 갈래? 했더니 얼른 따라나선다. 낮에 어떤 글을 읽었는데 봉은사 터가 좋아서 마음이 불안정할 때 기도하기에 좋은 절이래, 했더니 대부분 사찰이 모두 터도 좋고 뷰도 좋은 거 아니야 한다. 그렇긴 한데 하고 많은 글귀 중에 오늘 그 말이 내게 왔으니 아무래도 절에 다녀오라는 얘기인가 봐, 했다.
절에 가는 차 안에서 남편은 사실 어제 그렇게 화를 낸 것이 자기 어릴 적 생각이 나서 그랬다고 했다. 본인도 그 시절 막상 시험이 끝나고 나니 무기력함에 좋은 시절을 아무것도 한 거 없이 보낸 게 아쉬워서 잔소리했다고, 대학 라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어디 가서든 자신이 열심히 하면 되는 것을 말해주고 싶었다고.
남편 말을 듣고는 맞아, 나도 그런 마음으로 얘기를 한 건데 잘 전달되지 않았어. 결국 화만 낸 꼴이 되고 아이는 이틀 연속 엄마, 아빠 잔소리를 들은 셈이 됐어. 했다.
정목스님은 감정이 태도가 되지 말게 하라고 하셨다. 어떤 순간에도 감정이 앞서면 누구와도 대화가 잘 되지 않는다고. 그러니 연습이 필요하다고.
봉은사에서 기도를 하고 집에 와보니 아이는 무언가 열중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어릴 적에 너무 좋아하던 건담 프라 모델 만들기를 하고 있었다.
아, 너는 무언가 집중할 게 필요했구나. 일 년을 압박해 오던 시험이 끝나고 갑자기 주어진 시간에 무기력해지고 예상과 빗나간 성적에 화가 난 마음을 달랠 무언가가 필요했구나. 생각이 들었다.
안 그래도 미안한 마음에 안쓰러운 마음까지 더해졌다. 너도 열심히 너랑 싸우고 있구나. 기다려 주지 못하고 화만 내버린 나 자신이 참 한심해 보였다.
이제 얼마 남지 않은 12월, 다음 주부터는 작년보다 더 치열해진 경쟁에 신중하게 생각하고 원서를 써야 한다.
그래도 열심히 노력했으니 온 우주의 기운까지 끌어다 좋은 소식이 오길 바라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