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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 증명

by 재인

한 도서관에서 독서토론 주제로 이 책을 선정한 것을 보았다. 어떤 책일까? 잠깐 궁금해하고 그때는 지나갔다. 올봄 한 독립서점에서 이 책에 대해서 독서토론 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이번에는 너무 궁금해서 읽어보기로 했다. 도서관에 예약신청을 했는데 책을 찾는 사람들이 많은 건지 한참 만에 내 차례가 되었다.

이 책은 짧고 간결하다. 하지만 그 내용은 짧고 간결하다고 말할 수 없을 거 같다.

우선 이 책의 제목 구의 증명이란 도형의 구가 아니라 구는 남자주인공 이름이다. 그럼 무엇을 증명한다는 걸까? 내가 생각한 바로는 구의 증명이란 여자주인공 담이 남자주인공 구를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고통스러운 사랑의 증명이지 않을까 싶다.

이 책은 서술방식이 여자주인공 담과 남자주인공 구의 시점을 번갈아 가면서 진행하는 방식이다. 그래서 한 상황에 대해 두 주인공들의 서로 다른 시점을 엿볼 수 있어서 좋았다. 예전에 읽었던 츠지 히토나리와 에쿠니 가오리의 ’ 냉정과 열정 사이‘가 생각이 났다. 냉정과 열정 사이는 남자의 시점과 여자의 시점을 각각 한 권씩 나뉘어 있는 반면에 구의 증명은 한 권의 책에 번갈아 가며 남녀 주인공들의 시점을 볼 수 있어서 더 몰입감이 있었던 거 같다.


본인의 출생에 대해 모르고 이모와 살고 있는 담이와 부모님의 빚으로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구는 어린 시절부터 동네 친구이다. 초등학교 시절부터 둘은 단짝처럼 지낸다. 하지만 이 둘이 단짝이 되기 전 구는 담의 가방을 뺏고, 머리채를 잡아당기기도 하고, 실내화를 멀리 집어던지기도 하면서 담을 괴롭혔다. 그래서 담은 구가 괴롭히면 소리 없이 울곤 했다.


그런데 구의 시점에서 보면 구는 담에게 자기의 존재를 새겨 넣으려고 일부러 그런 행동들을 했다고 한다. 담의 머리채를 잡아당기면 담이 화를 낼 거고 그러면 시비 걸듯 놀리면서 둘만의 특별한 시간을 고무줄처럼 쭉쭉 늘리고 싶었다고. 그러니까 구는 담을 좋아하는 방식을 괴롭히는 것으로 표현한 것이다.

예전 우리들 학교 다닐 때처럼 말이다.

그 후로 둘은 단짝이 되어 같이 성장한다. 고등학교 시절 구가 집안 형편 때문에 학교가 끝나면 공장에서 일을 했는데 담이는 공장 앞에서 구를 기다리고 같이 집으로 가면서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공장에서 같이 기다리던, 공장에서 일하던 한 부모의 아이인 노마와 함께 집으로 오던 중에 트럭 사고로 노마가 죽게 된다.


이 일로 둘은 심한 트라우마에 시달리고 서로에게 상처가 될까 봐 잠시 떨어져 지낸다.

그 후로 구는 마음은 늘 담에게 가 있지만 몸은 공장의 진주 누나와 가까워져 누나와 함께 지내게 된다.

한편 트라우마를 함께 이겨내 보자고 마음먹고 구를 찾아온 담은 이 둘을 목격하게 된다.


시간이 흘러 구는 진주 누나와 관계가 깨지고, 구는 아무에게도 알리지 않고 군대에 간다.

구는 여전히 담이 생각을 하지만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담이 이모가 병으로 갑자기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오열한다. 마침내 제대하고 찾아온 구를 담은 담담하게 맞이하고 같이 살기로 한다.


하지만 구의 부모님이 실종상태가 되어 빚이 고스란히 구에게 넘어오자 둘은 사채업자를 피해 도망 다니며 지낸다. 그러다 구는 일하는 곳으로 찾아온 사채업자들의 폭행으로 길바닥에서 죽는다.

담은 구를 집으로 데려가 깨끗이 씻기고 소독용 알코올로 몸 전체를 꼼꼼히 닦는다.


그리고 외로운 빛으로 변해가는 구의 몸을 보며 이렇게 아름다운 몸을 땅에 묻을 수도 없고 불에 태울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먹기로 한다. 손톱, 발톱 자른 것을 먹고 한 움큼 빠진 머리카락을 먹는다. 고통스럽게 구를 먹는다.

이게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게 맞나 싶어 다시 읽고, 되돌아가서 다시 읽기를 반복했다.

구를 먹으며 담이 생각한 부분이 왠지 짠하게 느껴졌다.


’ 나는 흉악범인가, 사이코인가, 나는 변태성욕자인가, 마귀인가, 야만인인가, 식인종인가, 그 어떤 범주에도 나는 완전히 집어넣을 수 없었다.‘

’ 그의 손이 탐나서, 그의 발이 탐나서, 그의 머리, 그의 얼굴, 그의 성기가 탐나서, 지극히 존경해도 먹었을 것이고, 위대해도 먹었을 것이다. 사랑해도, 먹었을 것이다. 그들은 미개한가. 야만적인가. 지금의 인간은 미개하지 않은가. 돈으로 목숨을 사고팔며 계급을 짓는 지금은, 돈은 힘인가. 약육강식의 강에 해당하는가. 그렇다면 인간이 동물보다 낫다고 할 수 있는가.‘

구를 먹는다는 담의 행위가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구를 잃은 담의 마음을 생각해 보았다.

너무 사랑해서 먹는다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너무 사랑하면 그런 마음이 드는 걸까?

담이는 구의 장례를 끝낼 수 있을까? 아니면 정말 구를 다 먹게 될까?

현실과 이상을 오가는 얘기에 정신이 혼미하다.

마치 한강의 ’ 채식주의자‘에서 폭력을 몸으로 거부하며 나무가 되고 싶다고, 음식을 거부하는 주인공 영혜의 이야기처럼 이해는 가지만 참 모호하다.


마지막에 죽은 구는 생각한다.

’ 처음뿐 아니라 우리 함께한 지난날 모두,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마음이 널 괴롭혔고, 괴롭히고 있다.

사랑이란 원래 그런 것일까. 다른 이들도 그러할까. 죽어서도 모르는 게 너무 많다.

담아.

이 멍청아.

이젠 됐어. 넌 다 했어. 이 장례를 끝내야지. 끝내고 살아야지. 아주 오래 살아야지. 네가 살아야 나도 살아.

담아.

이 바보야.‘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이고 사람들의 감정을 다 알 수는 없다.

칼 세이건의 ’ 코스모스‘ 에서도 인간 개체의 총수는 무수히 많고 모두 전혀 다른 개체라고 말한다.

’ 알려져 있는 모든 생명체에 필수적인 생체분자인 핵산을 조합하는 방법의 수는 우주에 존재하는 전자와 양성자의 수를 전부 합한 것보다 훨씬 더 많다. 그 결과로 나타날 가능한 인간 개체의 총수는 지금까지 살았던 사람들의 수를 훨씬 능가한다. 핵산의 가능한 조합들 중에서 지금까지 지상에 살았던 그 어떤 인간을 통해서도 구현되지 않은 조합들이 아직 무수히 많다.‘

보통은 책을 읽으면 바로 글을 쓰는 편인데 왠지 이 책은 읽고 이틀을 넘겼다. 그리고 처음에는 이번에는 쓰지 말자고 생각했었다. 아마 담과 구가 서로 사랑하는 방식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어서, 그랬던 거 같다.

세상에 완전히 나와 똑같은 사람은 없고, 그러기에 나와 완전히 똑같은 감정을 느낄 수도 없을 거라 생각한다.

담이 구를 사랑하는 방식은 조금 충격적이지만 우주의 방식으로 생각해 보면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사랑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혀준 담이와 구의 마음이 오랫동안 내 마음에도 남아 있을 거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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