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을 그만둔 후로는 거의 언제나 도서관에서 오후 시간을 보낸다. 원래도 책을 좋아해서 많이 읽는 편이었지만 일을 그만두고 난 후에는 좀 더 많이 읽고 있다. 일을 했을 때와 조금 다른 점이 있다면 시간이 여유롭고 조급함이 없어서인지 전에 읽으려고 사 놓고 나 두었던, 집중력을 요구하는 책들을 꺼내 읽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유전자, 칼 세이건의 코스모스 같은 책들이다. 전에는 소설류를 주로 읽었었는데 요즘 이런 책들을 읽으며 공부하듯 메모도 하고 모르는 용어들을 찾아보기도 하는 시간들이 참 좋다. 그래서 평일 오후 시간은 언제나 짧게 느껴진다.
오늘은 오랜만에 좋아하는 작가 중 한 명인 넬레 노이하우스의 신작을 발견하고 읽을 수 있게 되어 평소보다 더 흥분한 상태로 도서관에 왔다. 넬레 노이하우스는 타우누스 시리즈로 유명해진 독일 작가이다. 타우누스 시리즈는 추리 소설물인데 추리 소설은 내가 처음 책에 빠지게 된 계기가 된 장르이기도 하다. 어릴 적에는 존 그리샴의 추리물을 많이 읽었었다. 추리 소설은 책을 다 읽을 때까지 범인이 누구인지 모르겠는 그런 책이 좋다. 책 중간에 범인을 알게 되는 책은 내가 추리한 사실이 맞아 짜릿하기 보다는 실망스러운 것 같다. 그래서 넬레 노이하우스의 타우누스 시리즈는 끝까지 범인이 헷갈리는 그런 점이 참 재미있다.
책을 읽는 중간에 엄마에게 전화가 왔다. 어제 핸드폰에 간단한 은행 업무를 할 수 있는 앱을 깔아 드리고 송금하는 방법을 알려 드렸는데 오늘 막상 해보니 잘 안 되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날도 추운데 다시 은행에 다녀오셨다고 하신다. 우리 엄마는 76세에 나이보다 젊어 보이시고 꽤 지적이게 보이시는 외모와 달리 초졸이라는 학력 컴플렉스를 가지신 분이다. 아직도 은행 atm기 사용을 어려워하시고 관공서에 가서 서류작성이라도 하실 때면 참 힘들어하신다. 엄마의 이런 면들을 내가 어릴 적에는 잘 알지 못했다. 엄마가 아빠보다 항상 더 큰 사람으로 인식되었고 엄마가 해결하지 못할 일은 없어 보였으니까. 문득 예전 드라마 한 장면이 떠오른다. 응답하라 1988에서 주인공 정환이 엄마 라미란에게 전화해서 급하게 여권번호를 불러 달라고 하는 장면이다. 여기서 라미란은 여권을 쳐다보며 한동안 가만히 있는다. 그리고 아들에게 엄마가 영어를 몰라 라고 말한다. 그 장면에서 나도 모르게 엄마 생각이 났다. 가끔 엄마 집에 가면 어디서 받은 것인지 모를 화장품 샘플을 잔뜩 꺼내 놓고 이게 로션이니, 언제 바르는 거니, 하며 물어보신다. 그러면 나는 싸인펜을 들고 와서 로션, 샴푸, 에센스 라고 써드린다. 엄마가 샴푸라고 써진 용기를 보며 어쩐지 에센스인가 하고 머리에 발랐더니 자꾸 거품이 나서 머리를 다시 감았다고 웃픈 얘기를 하신다. 이런 얘기를 들으면 가슴이 참 짠해진다.
암튼 엄마의 약간 짜증스런 말투에 부정적인 발들을 듣고 있자니 나도 화가 나지만 또 차분히 생각해보니 나도 우리 아이에게 저렇게 얘기하는구나 하고 알아차리게 된다. 그러면서 전에 남편이 내가 약간 공격적인 말투라고 한 것이 무슨 뜻인지 단박에 이해가 간다. 나는 엄마의 이런 모습들을 참 싫어하면서도 많이 닮았구나.
벌써 6시다. 이제 집으로 갈 시간이다. 오늘은 엄마랑 통화하고 이런저런 생각들 때문에 목표한 만큼 책을 읽지 못했다. 아마도 집에 가서 마저 읽어야 할 거 같다. 오늘도 아보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