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건강 의학과에 오게 되었다. 지난주에 부랴부랴 검색을 통해 예약하고 온 곳이었다. 접수하고 나니 몇십 장쯤은 되어 보이는 설문지를 나와 아이에게 각각 나누어 주신다. 아. 이래서 예약 시간보다 일찍 오라고 했구나. 생각하며 설문지를 채워 나갔다. 설문지에는 우리 가족 인적 사항에서 시작해서 가족 각자의 성격과 관계에 대해 그리고 아이를 임신했을 때의 기분, 낳았을 때의 상황, 아이가 모유를 먹었는지, 분유를 먹었는지, 대, 소변을 언제 가렸는지, 한글을 배운 나이와 어린이집에 가게 된 시점, 초등학교에 들어갔을 때의 학업과 친구들의 관계, 선생님과의 관계 등 이제는 기억나지 않는 일들까지 세세하게 물어보고 있었다. 갑자기 아이를 가졌을 때부터 낳아서 어떻게 키웠는지가 머릿속에서 파노라마처럼 흘러갔다.
설문지를 다 채우고 또 한참을 기다린 후에 아이가 진료실에 들어갔다. 나는 그때 서야 병원을 찬찬히 훑어보았다. 병원 내부에는 정신과가 아닌 마음 클리닉이라고 되어 있었다. 대기실에는 나를 비롯해 우리 아이와 같은 또래로 보이는 여학생도 있고 우리 엄마 벌 되시는 분도 계시고 20대 대학생일까. 직장인일지 하는 남자도 있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무슨 이유로 여기에 왔을까? 저마다의 사연이 퍽 궁금해졌다.
지난주에 아이가 난데없이 정신과에 가고 싶다고 했다. 사실 난데없는 것은 아니고 담임 선생님과 상담하면서 셈이 병원에 한번 가보시는 것도 좋겠다고 말씀하셔서 아이랑 얘기해 보겠다고 한참이었다. 나는 올 것이 왔구나 하는 기분이었다. 가까운 지인들 아이가 벌써 병원에 다닌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남자아이라서 덜 민감하고 무덤덤한가 하고 생각하고 있었다. 지인에게 병원을 소개받을까 하다가 괜스레 우리 아이도 병원 다니게 되었다는 말을 듣게 하고 싶지 않아서 집에서 가깝고 청소년과 가 있는 병원으로 알아보게 되었다.
30분쯤 지났을 때 아이가 진료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바통 터치하듯 내가 진료실에 들어갔다. 선생님은 내가 설문지에 쓴 것들에 대해 간단하게 물어보셨다. 부모님과의 관계도 좋고 친구들이나 학교에 문제도 없어 보이는데 우울 지수가 높게 나왔다고 했다. 우울증일 때는 집중 못 하거나 심하면 자해를 하는 경우도 있다고 하시면서 일단 약을 약하게 쓰면서 상황을 보자고 하셨다. 나중에 혹시 약물이 과다가 되면 기분이 너무 좋아져 조증이 될 수도 있으니 이것 또한 잘 관찰해 달라고 했다. 그리고 아이를 케어하면서 어려운 일이 있으면 부모님도 꼭 상담받으시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그러면서 우울증은 마음의 병이 아니라 뇌의 병이라고 하셨다.
우리 뇌에 세로토닌은 사람의 기분, 수면, 기억력, 불안, 식욕 등에 관여하는 호르몬인데 세로토닌의 분비량보다 스트레스가 더 커서 감당이 안 되면 우울증이 온다고 한다. 처방 약은 세로토닌의 생성을 돕는 구실을 해서 세로토닌이 더 많이 분비되도록 하는 것이라고 한다. 약은 처음에 약하게 시작하기 때문에 2주 이후부터 조금씩 변화가 있을 거라고 했다.
나는 처음 담임 선생님이 우리 아이가 불안도가 높은 거 같으니, 상담을 받아보라고 하셨을 때도, 아이가 마침내 정신과에 가고 싶다고 얘기했을 때도 그리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 내 생각에는 아이가 엄마나 아빠에게도 하지 못할 말이 있을 수 있으니 상담하면서 속 편하게 얘기해 보라고 병원에 온 거였다. 이렇게 우울증이란 진단까지 나올 줄은 몰랐다. 더욱이 약을 먹게 될 줄은.
애써 담담한 척을 하며 집으로 돌아왔다. 병원을 다녀오고 며칠이 지나고 아이는 약을 꼬박꼬박 잘 챙겨 먹는다. 약 효과가 2주 후부터 있다는 얘기는 하지 않았다. 하지만 아이는 약효가 없는 약을 먹고도 환자가 진짜라고 믿고 병이 호전되는 현상인 플라세보 효과처럼 본인이 괜찮아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다행이다. 그래, 수능까지만 잘 버텨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