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밤에 여름 끝자락에 비가 꽤 많이 내렸다. 아침에 일어나니 너무 맑고 청명한 날씨가 어디론가 떠나고 싶게 만들었다. 하루아침에 계절이 여름에서 가을로 바뀐 듯했다. 당장 여행은 어렵지만 일단 외출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지하철을 타고 광화문에 내렸다. 요즘 드라마 케데헌(케이팝 데몬 헌터스) 때문에 한국의 위상이 더욱 올라갔고 배경지인 서울의 남산 서울타워, 국립중앙박물관, 낙산공원 등이 외국인에게는 명소 순례지로 핫하다고 한다. 광화문 또한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외국인 관광객이 많았다. 오랜만에 찾은 광화문은 지하철에서 올라오자마자 보이는 경복궁과 그 뒤에 한 폭의 그림 같이 펼쳐진 북악산 뷰가 눈을 시원하게 만들었다.
오늘 목적지는 국립 현대 미술관이다. 이 미술관은 여름에 실제 얼굴 크기의 4배의 작가의 자화상이라는 론 뮤익 전시로 사람들이 북적였던 곳이다. 오늘은 김창렬 화백의 회고전과 현대미술 하이라이트, 올해의 작가상 작품 등이 전시 중이었고 역시나 사람들이 많았다. 천천히 둘러볼 생각으로 통합권으로 관람을 시작했다.
먼저 들어간 곳은 올해의 작가상 중 한 명인 김영은 작가의 방이었다. 근데 작품은 한 점도 없고 커다란 화면이 세 개나 있고 사람들이 큰 화면마다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아 헤드폰을 쓰고 무언가 듣고 있었다. 난 처음에 이게 뭐지? 화면으로 보여주는 영상인가 했다. 하지만 그러기엔 화면에는 영상이 아닌 자막이 나왔고 도무지 이해가 안 갔다. 그냥 다른 방으로 가려고 하다가 마침 한 화면 앞에 자리가 비어 얼른 앉아 사람들처럼 헤드폰을 썼다. 내가 앉은자리에는 붉은 소리의 방문이라는 제목의 붉은 화면과 함께 각종 소리가 흘러나왔다. 1981년까지 있었던, 지금 아이들은 이해하지 못하던 시절에 울리던 통금 사이렌 소리, 라디오를 맞추는 주파수 소리, 일상 속의 소음, 배경음 등이 들렸다.
다음 앉은 화면에는 제2차 세계 대전 때 일본 해군 사관생도들이 받았던 청음 훈련이 소개되었다. 비행기가 천 미터 상공이 있을 때 나는 소리와 5천 미터 상공에 있을 때 나는 소리를 구분하는 연습을 하고 자국의 잠수함 소리와 타국의 잠수함 소리를 구분하는 연습을 하는 소리였다.
방을 나오면서 조금 충격을 받았다. 나는 항상 미술이란 그림이나 조각 등 눈에 보이는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작가는 듣는 소리 또한 미술이라고 생각한 것 같다. 김영은 작가는 소리를 듣는 행위에 내재된 힘을 탐구한다고 한다. 그에게 청취란 단순한 감각적 경험이 아니라 역사와 권력의 관계를 드러내는 비평적 실천이라고. 그동안 듣지 못했던 목소리와 소리를 오직 귀로만 집중해서 듣다 보니 새롭게 들렸다. 참 신기한 경험이었다.
다음에 눈여겨보게 된 것은 언메이크랩이라는 팀의 시시포스의 변수라는 작품이었다. 제각각 모양이 다른 많은 돌멩이가 큰 쟁반에 가득 놓여 있다. 그중 어떤 돌들은 모양이 약간 길쭉하고 그 위에 케첩이 뿌려져 있다. 이건 무엇을 표현한 걸까. 궁금했다. 작품 앞에 화면을 보며 작품 설명을 보니 과연 AI가 이 돌들을 어떻게 인식할까.라고, 쓰여 있었다. 다음 화면에서 AI가 쟁반 위를 쓱 스캔하더니 놀랍게도 케첩이 뿌려져 있던 돌들은 모두 핫도그라고 인식하는 것이다. 이래도 AI가 똑똑하다고 할 수 있을까? 이 작품은 이렇게 질문을 던지고 있었다. 이러한 발상이 재미있었지만, 한편으로 오싹한 기분도 들었다.
김창렬 화백은 물방울 작가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림을 포함한 그의 여러 작품을 보았을 때는 사실 별로 느껴지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가 왜 물방울 작가가 되었고 물방울에 집착했는지에 대해 듣고는 작품이 달라 보였다. 그는 6.25 전쟁 중에 중학교 동창 120명 중 60명이 죽었고 그 상흔을 총알 맞은 살갗의 구멍이라고 생각하며 물방울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는 듯하다. 얘기를 듣고 그의 물방울 그림을 다시 보니 비가 와서 창에 맺힌 듯한 크고 작은 물방울들이 선명해 보이면서 왠지 처연해 보이기도 했다.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았을 때 그것이 작고 사소한 것일지라도 받는 사람은 크게 감동할 수 있다. 내가 오늘 바로 그런 기분이다. 생각지도 못한 선물을 받은 느낌,
앞으로 미술을 대하는 시야를 한 뼘 더 넓혀주었던 뜻깊은 시간이었다.
오면서 북촌 감로당 길에서 맛본 커피 맛은 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