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가언 Jan 15. 2024

20대 나, 10대 강아지

프롤로그




요즘 몸이 영 안 따라주는지 골골대는 강아지를 보면서 정말 남은 시간이 얼마 되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이 유난히도 든다. 부모님과 신나게 산책하고 돌아와서는 이틀을 꼬박 앓아눕질 않나, 그 후로 계속 컨디션 난조가 이어지며 골골대다 또 조금 괜찮아지길 반복하다 오늘 아침에는 코피를 조금 흘려 놓았다.


마취하기도 힘든 나이인데 비강에 출혈이 생긴 것은 검사하려면 CT가 필수라고 한다. 그래서 그냥 피 흘린 것을 사진으로만 남겨 놓고 묵묵히 닦기만 했다. 다행히 강아지는 코피를 몇 방울 뚝뚝 흘려 놓았으면서도 밥도 양껏 먹고, 물도 잘 마시고 배변활동도 잘 했다. 기분도 최근 요 며칠에 비해서는 나쁘지 않아 보인다.


원래는 블로그에 간간히 푸념식 글을 올리는 것으로 그쳤는데 브런치에 제대로 기록을 남겨 보자고 마음 먹은 것은 이런 연유에서였다. 노견에게 코피가 났다는 건 그리 좋은 징조는 아니다. 시골에 살아서 제대로 된 검진을 받으려면 1시간동안 차를 타고 이동해야 하는데 그것도 부담스러운 연령의 강아지고, 사실 도시의 병원에 가서 원인이 뭔지 명확히 밝혀낸다 치더라도 뚜렷한 방법은 없을 것이다.


지금보다도 어렸던 나이에도 마취하기 어려운 강아지였던 딸기가, 이제 와서 수술 등 마취가 필요한 처치를 견딜 수 있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니 그냥 별 일 아니겠거니, 요즘 꽃이 많이 피고 공기가 건조해서 잠깐 코피가 났겠거니 애써 긍정적으로 생각해볼 뿐이다.


오늘 어머니랑도 잠깐 대화했다. 만약 입원이나 수술 조치가 필요한 단계가 오면 그냥 집에서 폭 안고 맛있는 거 주고 편안하게 보내주자고. 나도 이제 슬슬 현실을 받아들이고 천천히 마음의 준비를 시작해야 할 때가 온 거다.


우리 첫 만남은 좀 웃겼다. 10살의 초딩과 3개월짜리 말티즈. 아버지가 어느 날 갑자기 안고 오셨다. 바람이 엄청 불었고, 아버지는 어머니한테 혼날까봐 전전긍긍하던 것이 기억난다. 강아지를 좋아하는 나는 그저 바보같이 신났지만, 어머니가 얼마나 착잡했을지 이제는 어느 정도 짐작할 수 있다.


굴러다니는 솜뭉치같던 아기 딸기. 집에서 우릴 돌봐주시던 할머니는 개를 싫어하셨지만 하얗고 작은 녀석이 종종거리며 돌아다니는 모습에는 그저 홀딱 빠져버리셨던 것 같다. 그렇게 딸기는 우리 식구가 됐다.


학업 때문에 도시로 이사하게 된 뒤 딸기는 할머니랑 살게 되고, 할머니가 돌아가신 뒤 다시 우리 집으로 왔다. 자주 만나긴 했지만 그때까지는 그저 한번씩 만나서 귀여워하는 것 정도가 다였던 나는 딸기가 노견에 접어들 때가 되어서야 제대로 그 애를 책임지게 된 것이다.


나 20대 초반, 딸기 10대 초반. 쏟아지는 과제와 세상 풍파에 마음이 거칠어진 대학생과 슬슬 나이 들어가는 노견. 우리는 꽤 괜찮은 파트너였다. 조용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좋아하고 누군가에게 간섭받기 싫어하는 사람 하나와 개 하나는 서로가 있는 공간을 좋아했다. 내 옆에서 들리는 작은 숨소리에 나는 안도감을 느꼈고, 아마 딸기도 그랬을 것이다. 나는 호들갑 부리는 편은 아니니 곁에서 편안하게 쉬기도 좋았을 테고.


작가가 된 뒤, 책상에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그리고 딸기도 조금 더 나이 들었다. 몇 번의 사고와 병, 헤프닝을 겪으며 강아지는 확연히 노견 티가 나기 시작했다. 잠이 늘어난 딸기는 눈만 뜨면 내가 보이는 자리를 골라 마음껏 쿨쿨 잤고, 나는 딸기가 도로롱 코 고는 소리를 들으면서 키보드를 두드려 내 세상을 펼쳐냈다.


그렇게 또 몇 년. 대학원생 겸 작가가 된 나, 20대 중후반, 그리고 딸기, 10대 중 후반. 지금. 이제 딸기는 누가 봐도 노년기에 접어들었다. 항상 강아지라고만 생각했는데 이제는 동네에서 제일가는 노견이 됐다. 이빨도 없고 침도 흘린다. 눈도 거의 보이지 않는 것 같고, 부르는 소리도 잘 못 듣는다. 치매 증상이 가볍게 와서 밤중에 집안을 어슬렁대며 돌아다니고 다리를 절 때도 있다. 병치레가 잦고, 신경질적으로 변해서 얼굴을 닦아주거나 발톱을 깎는등 기본적인 케어도 힘들어졌다.


그치만 딸기는 여전히 나한테는 10살 차이 나는 동생이다. 좋아하는 그 자리에서 쿨쿨, 예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자고, 느지막이 일어나서 밥 먹고 물 마시고, 용변 보고. 그런 다음에는 잠깐 마당에 나갔다가 다시 돌아와 잔다. 이 단순하면서도 편안한 루틴에 내 강아지는 행복감을 느낄까. 하루하루 기력이 쇠하는게 눈에 보이는데, 한 해 한 해가 다른데.


알 수 없으니 일단은 최선을 다해야지. 마당에 안고 나가면 눈을 반짝이고, 하네스를 채우면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것처럼 군다(신나는 걸 못 이겨서 오래 걸었다가 지난번에 몸살이 거하게 왔다). 실컷 자다가 말똥 눈을 뜬 딸기랑 시선이 마주치면 탁하지만 까만 눈에서 애정을 느낀다. 그게 착각이 아니었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게 착각이 아니기를 원하면서, 나는 가끔 짬을 내서 짧게나마 기록을 남기기로 마음 먹었다. 남은 시간이 얼마 없다. 얼마나 있는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바라는 것보다는 짧다는 게 분명하다.


딸기한테 심신을 쏟는 나를 위한 글이 되면 좋겠다. 나는 사람들 앞에서는 괜찮은 척, 눈물 안 나는 척 하는 병이 있어서 스스로 달랠 수단이 필요하다. 언젠가 딸기가 없는 세상이 왔을 때도 나는 우리 강아지랑 이렇게 지냈구나, 딸기는 꽤 괜찮은 견생이었구나, 하고 스스로 위로할 수 있도록 하루하루를 충실히 보내야지.




*23년에 작성한 글을 편집해서 재업로드합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