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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언 Jan 15. 2024

20대 나, 10대 강아지 (1)

당분간 시중을 더 들 수 있을 것 같다

우선 기쁜 소식. 기쁘다면 기쁜 소식이고, 아니라면 아니겠지만 어쨌든 나한테는 기쁜 소식이다.


이 시리즈의 집필 계기가 되었던 딸기의 출혈. 각혈이나 비강 출혈이라고 여겨서 세상 모든 근심 걱정을 지고서 얼마 남지 않은 이별을 걱정하고 청승도 떨어 보고, 피를 닦으며 온갖 착잡한 감정을 혼자 삼켜냈더랬다.


그런데 오늘 병원에 가보니 잇몸 출혈이란다. 원래 잇몸이 좋지 않은 녀석인데 그것의 염증이 터져 출혈이 생겼다고.


피가 비친 순간 병원에 데려갔으면 일찍 알았을지도 모르고, 걱정도 덜 했을 것을. 오늘도 이렇게 노견 견주로서 반성한다.


잇몸 염증도 큰일이긴 하지만 당장 암이나 뇌출혈, 종양 등이 아니라는 걸 확인받은 나는 급격히 안도했다.



당분간 시중을 더 들 수 있을 것 같다.



잇몸에서 피가 그렇게 흐르는데도 꿋꿋하게 밥을 우걱우걱 먹어주다니. 젊을 때는 없던 식탐이 최근 들어 생긴게 오히려 반갑다.


내 호들갑을 반성하며, 밑도 끝도 없이 느낀 우울을 짧게 후회하고, 그럼에도 그게 반성과 후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사실이 솔직히 기쁘다.


애는 잇몸에서 피를 흘리고 있는데 그걸 기쁘다고 말하는 건 좀 문제가 있겠지만, 솔직한 심정은 그렇다.


하지만 노견을 반려하는 주인, 보호자, 내지는 집사들에게 호들갑을 떼어 놓을 수나 있을까. 기침만 조금 해도 심장이 철렁하고 자다가 잠꼬대로 낑 소리만 내도 혹여 단말마인가 싶어 기겁하며 벌떡 일어난다.


대다수의 경우, 녀석들은 괜찮다. 하지만 0.01퍼센트, 안 괜찮을 경우를 염두에 두지 않을 수 없다. 내 반응이 조금이라도 늦으면 적어도 며칠, 몇 달을 더 살 수 있을 녀석들이 한순간에 목숨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강박에 시달린다.


솔직히 나만 그런 줄 알았는데, 내가 본 대부분의 노견 견주님들이 그렇다. 우리의 시간보다 이녀석들의 시간이 훨씬 빠르게 흐른다는 걸 뼈저리게 느끼는 시기라 어쩔 수 없다.


소중한 가족이, 내 친구가 노환으로 시들어가는 중 내비치는 불편의 기색에 태연할 견주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거기에 죄책감, 내 강아지와 고양이가 더 젊을 때 관리를 더 잘 해 줄걸 하는 후회는 반드시 따라붙는다. 나도 그렇다.


인터넷을 보면 안 괜찮았던 이야기들로 가득하다. 작은 증상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큰일이었고, 치료 시기를 놓쳐서 예후가 좋지 않았다. 이런 살벌한 글들은 나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더군다나 당장 병원에 갈 수 없는 상황에서(집이 시골에 있어서 밤에 여는 동물병원이 없다. 24시간 병원을 가려면 1시간을 운전해서 가야하는데, 그조차도 늙은 강아지에게는 고역이고.) 혹여 응급처치라도 가능할까, 하는 마음으로 증상을 검색했더니 암, 종양, 뇌출혈 등등 눈앞이 아찔해지는 이야기들이 쏟아져서 나는 미칠 지경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나와 같은 상황인 견주님들께 혹여 도움이 될지도 모르니 반성문 겸 기록을 남겨본다.


이건 정말 모든 견주, 묘주, 그리고 각종 동물을 돌보는 반려인들이 하는 말이지만 한번 더 강조한다.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병원으로 바로 들쳐 업고 가자.


난데없이 병원에 끌려가는 봉변을 당한 반려동물에게 원망 어린 눈길을 받아도, 원장님께 "괜찮습니다. 크게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라는 말을 듣는대도 상관없다.


원래 병원은 괜찮다는 말을 들으러 가는 곳이라고 했으니까. 큰 병일 경우, 병원에 빨리 가면 갈수록 신속한 처치가 가능하고 별 것 아닌 일인 경우 반려인의 멘탈을 지킬 수 있다. 양쪽 다 중요한 일이다.


그리고 나처럼 당장 병원을 갈 수 없는 반려인.


빠른 시일 내로 병원을 방문할 계획이 있다면, 필요 이상으로 검색엔진에 의지하지 말자.


물론 어느 정도는 필요한 일이다.


증상을 검색하면 짐작할 만 한 질환이나 원인을 얼추 알아낼 수 있는 것은 아주 도움이 된다. 하지만 곧이어 쏟아지는 무시무시한 이야기들에 패닉에 빠져 버리면 오히려 처치가 늦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잇몸 질환인데 괜히 암이나 종양 생각이 들어서 병원을 가봤자 소용 없는 것 아닌가, 하는 멍청한 생각을 했던 내가 이 자리에서 크게 반성하며 느낀 바다.


여하튼, 중요한 것은 그거다. 괜찮은지 안 괜찮은지는 수의사 선생님이 알려줄 테니 일단은 들쳐 업고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가는 것.


그리고 당장 병원에 갈 수 없다면 긍정 회로를 돌려보는 것이 상책이다.


반려동물을 케어하려면, 특히 나이 많은 애들을 돌보기 위해서는 반려인 멘탈도 중요하다. 당장 응급이 아니라면 조금 마음을 놓는 것도 필요하다. 나만 해도 밥 잘 먹고 돌아다니는 애를 보면서 눈물을 흘렸으니까.


그걸 보는 딸기는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을지 상상만 해도 얼굴이 화끈거린다. 빨리 병원 가서 잇몸약이나 타 올 것이지, 괜히 며칠간 피만 더 봤잖는가.


명심하자. 혼자 호들갑 떨지 말고, 청승도 떨지 말고, 최대한 빨리 병원으로 뛰어가기. 생각은 그 다음에 해도 좋다.


이 글을 쓰는 지금, 내 노견은 내가 잘 보이는 자리에서 세상 모르게 곯아떨어졌다. 옆으로 누워서 앞발을 모은 게 꼭 새우잠을 자는 사람처럼 보여서 귀엽다.


적어도 당분간은 저 모습을 더 볼 수 있겠지. 가슴 철렁하는 일이야 앞으로도 수시로 있겠고, 언젠가는 진짜 절망할 날도 오겠지만 저번 글에 남겼다시피 그건 내가 감당할 일이고.


병원 가서 주사 한 방 맞은 딸기는 짧게 삐졌다가 약도 잘 먹고 밥도 잘 먹었다. 당분간은 치주염과의 싸움이 될 것 같다.


당분간 메뉴도 정해졌다. 사료는 조금 갈아서 물에 불려서 씹을 일 적게, 하지만 좋아하는 소세지는 꼭 하나씩 넣어서 맛있게 먹을 수 있도록.


앞으로도 요 사랑스러운 응석받이의 시중을 들 수 있어서, 그리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일이 아직 있어서 다행이다.


그리고 숱한 번뇌와 걱정, 절망을 안고 희망을 찾으려 노력하시는 세상 모든 환견 환묘, 그리고 아픈 반려동물들의 보호자 님들께 오늘도 존경과 찬사를 보낸다.


분명 많이 아픈 아이들의 손을 꼭 잡고 오늘 하루만 더, 하루만 더 하고 간절히 기도하는 분들이 계실테고 작은 증상 하나에 일희일비하며 안도와 절망을 반복하는 나날을 보내는 것도 다들 마찬가지일 테니까.


횡설수설하는 이 글은 나에게, 그리고 많은 노견 견주분들께 전하고 싶은 말들로 마무리지어야겠다.


우리는 최선을 다했으며 최선을 다하고 있고, 앞으로 아이들이 마지막 산책을 떠날 때까지 우리가 하는 모든 일이 최선일 것이다. 그러니 앞으로도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을 찾아서 하면 된다.


화이팅. 노견, 노묘, 여튼, 늙은 모든 반려동물 만세다.





+)정보


과한 인터넷 서치를 지양하겠다는 글에서 이런 덧붙임을 남기는 것도 좀 이상하지만, 호들갑 과정에서 알아낸 몇 가지가 혹시 도움이 될까 하는 마음에 남겨봅니다.


반려견의 코피는 원인이 다양합니다. 보통 외상/비염/질병/종양 넷 중 하나입니다.


외상: 코 안에 이물질이 들어가거나 머리를 세게 부딪히면 코피 증상이 생길 수 있습니다.

비염: 코를 훌쩍거리고 평소 콧물을 많이 흘리는 아이들은 비염이 심해지면 피를 흘릴 수 있습니다.

질병: 이빨이 썩거나 잇몸이 크게 상해 코피가 날 수 있습니다. 입에서 냄새가 심하게 나고 잇몸과 이빨이 거의 녹아내린 것이 육안으로 보일 것입니다.

종양: 비강(코) 내부에 종양이 생긴 경우로, 암에 속한다고 합니다. 한쪽 얼굴이 붓거나 호흡곤란, 코 내부에 육안으로 보이는 종양 등이 증상에 속합니다.


반려견이 코피를 흘린다면 빠르게 병원을 찾으시는 것이 좋습니다. 가정 내에서 처치가 곤란하고, 신체 구조 상 코피가 잘 나는 경우가 없기 때문에 피가 나기 시작한 거라면 좋지 못한 징조일 가능성이 있고, 무엇보다 코 안에 피가 고이면 아이들이 숨쉬기 힘들어하기 때문에 내원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반려견의 입에서 출혈이 보인다면 관찰이 필요합니다.

구강(잇몸이나 혀, 입천장 등)에서 출혈이 생기면 우리가 아는 붉은피가 흐릅니다.

장기 내부에서 출혈이 일어나 그것을 토한 경우에는 분홍색이나 갈색을 띄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피 색을 사진으로 남겨 두고 내원하셔서 수의사에게 보여드리면 도움이 될 겁니다.


밥그릇이나 아이가 평소 자는 공간에 피가 묻어나면 코피나 구강 출혈을 의심해보시고 내원하시는 것이 좋습니다.




*23년도에 작성한 글을 수정 후 업로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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