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가 되었다. 하지만 난 단 한 번도 "엄마"를 배운 적이 없었다. 아이를 낳으면 그냥 좋은 엄마가 될 줄 알았다. 어떤 누군가도 내게 엄마에 대해 일러주지 않았다. 늘 책으로, 글로 배우기를 선호했던 모범생 스타일의 나이기에, 육아서를 보면 아이를 잘 키울 줄 알았고, 자녀 교육서를 읽으면 아이 교육을 완벽하게 할 줄 알았다. 아이 키우는 것이 드라마에서 보듯 쉬워 보였다. 내가 했던 공부나, 병원 생활보다는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처음으로 적성에 맞는 일일지도 모르겠다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엄마"는 책으로 배우는 것이 아닌 것 같다. "육아"는 글로 배워서만 되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자녀 교육이라는 것이 간단하게 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했던 일 중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다. 내가 맡았던 역할 중 가장 어려운 역할이다. 딸의 역할보다, 며느리 역할보다, 아내 역할보다 더 어려운 것이 엄마의 역할이다. 아마 사람을 자라게 하고, 성장시키는 것이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아주 간과했던 부분이 있었다. 내가 낳은 아이들에 대한 착각이 그것이다. 난 내가 낳은 자식은 착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고, 똑똑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고, 내가 크게 신경 쓰지 않아도 태생적으로 자신의 일을 척척하고, 예의 바르고, 야무질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눈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을 했다. 얼마나 큰 오만이고, 얼마나 큰 착각이었는지... 내가 이렇게도 바보스럽다. 왜 내 아이는 상위권을 유지해야 하는 것인가? 왜 내 아이는 자신의 일을 척척해내고, 하나를 알려주면 셋넷을 알아야 하는가? 이것만큼 바보스러운 생각과 착각이 또 있을까?
안타깝게도 나는 그런 바보스러운 착각과 생각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좀 더 심하게 표현을 하자면 나는 내 아이가 태어나면서부터 다 알고 나올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주몽처럼, 박혁거세처럼 완성된 인간으로 태어나서 "어머니~ 이제 제 갈 길을 제가 스스로 헤쳐보겠습니다."라고 할 것만 같았다. 나만큼이나 환상 속에 사는 엄마도 드물 것이다. 그만큼 나는 커가는 과정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지 않은 사람이었다. 완벽하게 완성된 모습에 감탄하고 부러워하는 엄마였다. 그 사고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나쁜 엄마인가?
나에게는 지극히 평범하고 평균적인 첫째 딸아이가 있다. 까다로운 기질의 아이로 태어났지만 점차 몸의 까다로움을 제외하고 성격적인 면과 정서적인 까다로움은 거의 둥글게 변한... 사랑스러운 아이이다. 엄마가 하라는 것에 고집을 부리기는 하지만 자기 생각에 맞다고 생각하는 부분에선 동의하며 자기의 최선을 다하는 성실한 아이이다. 하지만 아이의 성실함에 비해서 학습 이해력이나 결과가 좋지 않은 아이이다. 운동 신경이며, 음악적, 미술적 능력이 (쉽게 확인할 수 있는 보이는 능력) 눈에 띄지 않는 아이이다. 그 말은 그냥... 잘하지도 못하지도 않는 그런 아이라는 것이다. 아주 보통의 아이인 셈이다.
욕심이 많은 나쁜 엄마의 눈에는 아이가 한없이 부족해 보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잘못된 색안경을 끼고 있으니 아이의 커가는 모습은 보이지 않은 것이다. 책을 읽었으면 그 책 내용을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어야 하고, 요즘 걱정하는 문해력과는 상관없는 아이여야 하고, 수학은 기본서만 알려줘도 유형서 건너뛰고 최상위를 거뜬하게 풀 줄 아는 아이여야 했다. 이 얼마나 말도 되지 않은 환상이란 말인가? 지금은 나의 헛된 욕심으로 인한 신기루였음을 알지만 그때는 그게 실체라고 생각했었다. 그렇게 나쁜 엄마는 아이를 자꾸 부족한 아이로 만들어가고 있었다. 뭘 해도 부족한 아이.....
병아리가 막 태어나 샛노란 털색을 낼 때는 그렇게 예쁘다. 검은 눈만 깜빡여도 귀여운 인형이다. 그런데 그 샛노랗던 병아리가 점점 자라면서 털도 빠지고, 색도 변하면서 참 못생겨진다. 어린 병아리처럼 윤기도 없고, 심지어 보드랗게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게 미운 시기를 지내야 한다. 그 과정에서 부리는 점점 단단해지고, 스스로 단단한 땅을 파서 지렁이를 찾아 먹기도 하고, 다리를 단단하게 만들기도 한다. 자기의 영역을 만들고 자신의 위치를 만들어 간다. 모이를 더 먹을 수 있는 방법을 스스로 터득하기도 한다. 추위에 이겨내는 방법을 배워가기도 한다. 그렇게 견디고 버티며 성장한 닭은 어엿한 암탉과 수탉이 된다. 새벽을 깨우는 "꼬끼오" 소리를 멋지게 울어줄 수 있고, 알을 낳아줄 수 있는 수탉, 암탉이 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체는 약하지만 귀엽고 사랑스러운 시기를 지나서 단단해지기 위해 무수히 깨지고 넘어지는 시기를 거쳐야 한다. 가끔은 죽을 것 같은 힘든 시기도 있다. 하물며 곤충도 그런 시기를 겪는데, 더 고차원적이고 더 큰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은 말해 무엇하겠는가! 하지만 나쁜 엄마는 그 과정을 보지 않는다. 아니, 보지 못한다. 샛노란 병아리에서 바로 멋지게 꼬끼오하고 우는 수탉이 되길 원하고, 크고 단단한 달걀을 낳을 수 있는 암탉이 되길 원한다. 윤기 없는 깃털색을 보고 싶어 하지 않아 하고, 자기 자리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기웃거리는 모습, 아직 단단하지 못한 부리로 땅을 파기 위해 부르르 떠는 모습을 보기 싫어한다.
나쁜 엄마들의 절단된 의식으로 인해 더 단단하게 자라야 하는 아이들은 스스로를 굉장히 부족한 아이, 뭘 해도 부족한 아이, 모든 것에 부족한 아이라는 인식을 가지고 자라게 된다. 그 아이가 한 것이라고는 '나쁜 엄마'를 만난 것 외에는 한 것이 없는데 말이다. 심지어 자신이 선택한 적도 동의한 적도 없는 일이다. 그런데 자꾸 살아갈수록 부족한 아이에서 못난 아이, 태어나지 말았어야 하는 아이....로 자신을 점점 더 낮추게 되는 것이다. '너무 억지이지 않아요?'라고 질문을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야단 안 맞으면서, 핀잔 안 맞으면서 자란 아이가 어디에 있다고 그런 질문을 하나 생각했다. 하지만 나쁜 엄마의 행동은 다르다. 아이의 모든 행동에 간섭을 하고, 모든 것을 못마땅해한다. 과하게 야단을 치고, 학대에 가까운 언어로 아이를 가슴 아프게 한다. 게다가 요즘 아이들은 스트레스를 풀 곳이 없다. 함께 놀며 오랜 시간을 두고 이 얘기, 저 얘기할 친구도 없다. 다들 바쁘니 시간을 내주지 않는다. 기댈 곳이 없는, 자신을 채울 곳이 점점 사라져 가는 시대에 사는 아이들이니 억지는 아니다.
나 역시 이런 과정을 서서히 밟고 있는 나의 악마 같은 나쁜 엄마의 모습에 깜짝 놀라며 반성을 했다. 반성을 하면서 우울증을 겪기도 했다. 내 욕심을 내려놓는 것, 신기루라고 생각해야 하는 것, 환상이었고 이루어질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너무도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내 안에서는 '아이를 서서히 죽여가는 나쁜 엄마'는 되고 싶지 않았다. 태어난 것만으로도 사랑받아야 할 내 아이가 자신의 태어남 자체를 원망하게 되면, 싫어하고 거부하게 되면 이 아이를 낳고 안았을 때의 기쁨이 거짓이 될까 봐 두려웠다. 그 기쁨은 무덤에 가는 순간까지 내 기억과 감각 모든 부분에서 살아있는데 말이다. 그러면 난 내 아이를 살리고, 내 아이를 부족한 아이가 아닌, 있는 존재 자체로 소중한 아이로 받아들여야 했다. 그것은 선택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내 아이가 살아야 내가 살아갈 수 있는 이유이기도 했다.
나쁜 엄마에서 벗어나는 길은 생각보다 크게 어렵지는 않았다. 나를 돌아보며, 인간의 성장 과정을 돌아보면 되는 것이었다. 나 역시 어렸을 때 별 볼 일 없었지만 지속되는 실수에도 꾸준히 도전했고, 공부하면서 조금씩 성장했다. 그 과정에서 쾌감을 느끼며 도파민의 분비에 흠뻑 취해 더 큰 성취를 얻기 위해 더 어려운 시험을 택하고 준비하기도 했었다. 그러면서 실패도 하고, 울어도 보면서 단단해졌던 것 같다. 내 아이에게도 이런 과정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데, 나는 그 귀한 경험을 아이에게서 뺏으려고 했었던 것을 깨달았다. 지금 못한다고 해서 영원히 못하는 아이는 없다. 자신감만 있다면. 응원해 주는 이가 있다면 말이다. 이걸 깨닫고 나니.... 내 아이의 성장을 지켜보는 것이 조금씩 즐거워지기 시작했다. 지금 못하는 모습이 부끄럽지 않았다. 노력하는 모습, 성장해 가는 모습이 고맙고 기특해 보였다.
나쁜 엄마보다 조금 덜 나쁜 엄마, 더 나아가 응원해 주는 엄마, 믿어주는 엄마가 되어보자.
내 아이가 자신의 성장에 기뻐할 수 있도록, 자신의 성취에 취할 수 있도록 격려해 주자. 점점 발전해 가는 모습이 스스로 기특해서 자신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아이로 만들어보자. 그게..... 어쩌면 엄마인 내가 해줘야 하는 진짜 모습, 아이가 원하는 엄마, 아이가 고마워하는 엄마가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