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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Dec 18. 2023

동네 친구가 많지 않은 엄마 사람이라  좋다.

  집에만 있는 사람이다보니, 또한 사교적이지 못한 사람이다보니 만나는 사람들이 많지 않다. 친했던 대학 동기들도 멀리 떨어져 살고, 초중고때의 친구들과도 아이를 낳고 키우면서 연락이 뜸해지더니 이제는 소식을 거의 전하지 못하고 있다. 입장이 이러하니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라곤 남편의 지인들, 그리고 동네 아줌마들이 전부이다. 아는 동네 아줌마가 많은 사람들도 있지만,  내가 정기적으로 만나는 동네 아줌마들은 기껏해야 5~7명 정도인 것 같다. 물론 그냥 길을 가다 인사하는 아줌마들이야 훨씬 더 많다. 학교 앞에서 얼굴 트고 인사 나누는 사이 정도는 되니 말이다. 하지만 따로 만나는 사이는 아니니 크게 의미 있는 존재도 아니고, 크게 신경을 쓸 존재도 아니다. 그들에게 내가 그럴테고, 나에게 그들이 그렇다.

     

      솔직히 말하면 나는 동네 아줌마들과의 관계에 처음부터 이렇게 소극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4살때의 첫 어린이집 실패 이후, 5살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가 좀더 적응을 잘 하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아이 친구들의 엄마들과 적극적으로 만남을 가졌다. 하원 후에는 무조건 2~3시간씩 공원에서 노는 아이들, 아이들의 엄마들과 함께 했고, 그 이후의 만남도 자주 가졌다. 아이가 특히 더 친해지고 싶어하는 엄마들에게는 따로 만나 아이들을 놀리면서 커피 타임을 갖기도 했다. 돌도 안된 둘째 아이를 안고, 업고서 말이다.

     돌이 넘은 둘째를 가정 어린이집에 맡기고는 본격적으로 오전 시간은 첫째 아이 친구 엄마들과 수다 타임을 가졌다. 아이들의 하원 후에는 같은 문화센터 수업을 다니고, 거의 매일 집을 옮겨다니며 아이들을 놀게 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남을 이어갔다. 학원도 같이 다니면서 말이다. 가끔은 저녁에 맥주 타임을 갖기도 했다. 그렇게 나와 내 아이가 들어갈 무리가 생겼고, 그 무리 안에 있음에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이런 생활에 점점 지쳐갔다. 살림은 살림대로 안되고, 내 주관은 없어지고, 무리 속에서 내 아이의 못난 부분이 보이기 시작했다. 체력 또한 바닥이 나고 있었다. 그렇게 지쳐 가고 있었다. 그러던 중 내가 모르는 사람이 나를 알고 "00이 엄마죠?"라고 얘기하는 것을 듣고 적잖게 당황한 적이 생기게 되었다. 


     '아~. 내가 무심결에 뱉은 말들이, 내가 모르는 사람들에게까지 번져나가고 있구나.'

라는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친하다고 생각하고, 비밀을 지켜줄 것이라고 막뱉었던 말들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게다가... 나는 이 계산, 저 계산하면서 말을 하는 머리 좋은 스타일이 아니니 내 말이 여기저기 전해졌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이런 무서움을 느끼던 중 큰 사건이 벌어졌다. 같은 무리에 있던 엄마들의 큰 다툼이 일어났다. 친하다고 생각해서 배려 없는 행동을 한 것과 그것을 너그럽게 이해해주지 못했던 마음이 싸움이 되었던 것이다. 이를 중재해 보려고 하였으나, 중재를 하면서도 내 머릿 속으로는 '올 것이 왔구나. 너무 친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문제였을지도 모르겠다.'라는 생각이 들면서 멀어질 각오를 하고 있었다.


     '코로나'라는 좋은 핑계가 생겼다. 이를 계기로 나는 동네 엄마들과의 모임에서 서서히 멀어져 갔다. 내 아이와 남의 집 아이를 비교해서 오는 불편함과 질투에서도 조금은 해방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혼자만의 시간이 많아졌다. 자유로워짐을 느끼게 되었다. 이전에는 다른 엄마들과 시간을 맞춰 뭔가를 해야 했지만 이제는 내 스케줄만 신경 쓰면 그만이었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좋아하지 않은 것만 들여다 보면 됐다. 엄마끼리의 능력 차이를 신경 쓰며 열등감을 느낄 필요도 없고, 더 잘 사는지 못사는지를 놓고 열등감을 갖지 않아도 되니 좋았다.  기분이 좋은 척 애쓰지 않아도 되니 감정에 쓰는 에너지를 줄일 수 있어서 너무 좋았다. 커피를 일부러 마시지 않아도 됐고, 듣기 싫은 남의 얘기들을 듣지 않아도 되었다. 아이들의 학원 이야기에 괜한 불안감을 갖지 않아도 되니 좋았다.  모든게 좋았다. 해방된 것 같아서 좋았다. 

   내 아이를 위하는 척 내뱉는... 내 아이의 능력을 무시하는 듯한 말에 상처를 받지 않아도 되니 좋았다. 다른 집 아이의 장점을 애써 찾지 않아도 되니 참 좋았다. 그 에너지로 내 아이의 장점을 들여다 볼 수 있게 되니 좋았다. 내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줄 수 있는 시간이 생기니 좋았다. 내 아이들과 나만의 데이트를 할 수 있어서 좋았다. 내 아이의 잘못된 행동을 눈치 보지 않고 훈육할 수 있어서 좋았다. 또한 내 아이에게 억울한 사과를 하지 않게 해도 되니 좋았다. 

    나는 내 아이를 위해 동네 아줌마들과 친해져야 한다고 생각했었지만, 실상은 나와 내 아이들에게 해가 되는 관계였고, 힘든 시간을 보냈던 것이다. 지금은 그 때의 그 아이들보다 다른 아이들과 내 아이가 친하다. 친구는 엄마가 만들어주지 않는다는 것을 역력히 보여주는 예일 것이다. 아이는 결국 자기에게 맞는 친구를 찾아간다. 억지로 엄마가 만들어준 친구들이었지만 자신에게는 맞지 않았음을 이제 와서야 이야기했다. 


     물론 가끔은 너무 동네 친구가 없는 것은 아닌가,하고 걱정이 되고 심심하고 외롭기도 하다. 하지만 그럴 때면 아이와 상관없이 만남을 이어가고, 질투의 시선이 아닌 사람 대 사람으로 대하는 동네 아줌마를 만난다. 아이들의 이야기도 많이 하지 않으려고 한다. 왜냐하면 아이 때문에 만난 관계가 아닌 내 의지로 선택한 내게 맞는 동네 아줌마를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 시간을 가지며 나를 성장 시킬 수 있는 방법이 뭐가 있을까,를 고민하며 나를 위한 시간들을 많이 쓰려고 한다.  남의 눈치를 보며 나란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은 것들을 하러 다녔던 시간 말고, 오로지 나에게 맞는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됨이 기쁘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내 삶이 은둔형 외툴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다. 주로 혼자만의 시간을 갖고 있으니 말이다. 혼자서 도서관 가고, 혼자서 장을 보러 가고, 혼자서 운동도 간다. 때때로 혼자서 강연을 신청해서 가기도 하고, 혼자서 서점에 가기도 하고, 혼자서 커피를 마시러 가기도 한다. 예전 같았으면 당장 다른 사람의 눈을 의식했을 것이다. 그래서 억지로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고, 연락 오기를 갈구하기도 했었다. 지금... 전혀 그렇지 않다고는 말 못한다.  여전히 가끔은 눈치가 보인다. 사회성 무지 떨어지는 사람 같이 느껴질까봐.

     그럴 때면 난 중심을 찾으려고 노력한다. 내가 사람을 만나고 찾는 이유가 뭘까?

난 인간 대 인간으로 감정을 교류하고, 공감하며, 위로하고, 함께 기뻐하고, 고민할 일에 진심으로 고민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 위해 만남을 갖는다. 그렇다고 그게 징징거림이 아니라, 부정적인 어두운 이야기만 해당 되는게 아니다. 아이에게 필요한 정보를 얻기 위한 목적 하나로 만나는 만남을 거절할 뿐, 나는 만남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는다. 아직은 그런 사람들을 찾아가고 있고, 내가 나의 색을 찾기 위해 무식하고, 철저하게 나를 나의 세계에 내버려둘 뿐이다. 


       나에게는.... 이런 시간이 참 필요하다. 

       그리고... 이런 시간이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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