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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원 Jan 20. 2023

나의 아킬레스건

    누구에게나 아킬레스건은 있을 터이다. 어떤 이는 고작 한 개일수도 있고, 어떤 이는 그 이상일지도 모르겠다. 나에게도 아킬레스건이 있다. 나에게 아킬레스건은 친정이다. 정확히 말하면 친정의 경제력과 친정 부모님의 배우지 못한  "무지"이다.

   중학교 때까지는 우리 집이 가난하고, 가난하지 않고를 생각해보지 못했다. 늘 마을에서 큰 소리 내며 당당했던 아빠, 언제나 부지런한 엄마를 보면서 가난의 형편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또한 아주 조그마한 시골, 문명이 늦었던 시골이었기에 거의 대부분이 동일한 직업을 가지고 있었기에 더 생각해보지 않았던 것 같다. 간혹 선생님의 딸과 아들이 부러웠고, 마을에 있는 조그마한 진료소 자녀들이 부러웠기는 했다. 그들의 부모님은 적어도 비린내가 나지 않고, 깔끔한 옷을 입고 일을 하니까 말이다.

   나의 부모님이 배움이 짧고, 또한 가난한 것을 고등학생이 되면서 알았다. 시골 중학교에서 꽤나 공부를 잘했던 나는, 지역에서 이름 있는 사립 고등학교를 가게 되었다. 입학시험이 있었고, 등수에 따라 장학금까지 지급하는 학교였다. 입학하고 보니, 귀티가 나는 아이들이 많아 놀랐던 기억이 난다. 똑같은 교복을 입었지만 옷태가 달랐다. 간혹 그들의 부모님이 학교를 찾을 때가 있었는데, 늘 정장 차림이었다. 여자들도 정장을 입을 수 있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고등학교 입학하고는 늘 가정환경 조사를 명목으로 가정의 형편, 건강보험료, 부모님의 학력 조사, 자가의 유무, 단독인지 아파트인지,부모님의 연봉 등을 물었다. 초, 중학교 때에도 그런 질문은 있었다. 그럴 때면 난 의례 부모님께 "어디까지 졸업했어?"라고  물었다. 부모님의 대답은,

 "국민학교 졸업도 못했는데, 뭘 적어야 한다냐!  그냥 국민학교 졸업이라고 해라."라고 하셨다. 그런데 고등학교에 와서는 그게 참 부끄러워졌다. 에덴동산의 선악과실을 먹은 것처럼 부끄러워지기 시작했다. 그래서 난 "중학교 졸업"이라고 적곤 했다.

    너무도 가난한 집 맏아들인 아빠는 당장 먹고살아야 했기에 소학교 문턱에만 들어섰다고 하셨다. 국민학교에는 얼씬도 못해본 것이다. 학교 경험이라고는 소학교 일주일 공부가 그의 인생에서 전부였다. 한글도 겨우 "가나다라마~차카타 파하"만 배우신 것이다. 아빠보다 더 가난한 집 둘째 딸이었던 엄마는 그래도 외할아버지의 학구열 덕분에 국민학교는 졸업했다고 하셨다.

    그들이 태어날 때부터 함께였던 가난이 죄이지만  그들은 참 열심히 살았다. 배움은 짧지만 잘 살아보기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살림살이가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입구멍에 풀칠하며 매끼를 챙겨 먹을 수 있으니 그 윗세대보다는 더 잘 살게 된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투자도 모르고 열심히 일해서 돈을 버는 게 전부라고 생각하셨기에 크게 살림살이가 나아지지는 않았다. 등기도 없는 시골집을 "자가"라고 적을 수 있어 다행인건가?



     그 못 배우고 가난한 집에서 나는 꽤나 욕심 많고, 공부를 잘하는 딸이었다. 그래서 수도권에서 이름 있는 학교의 간호대학에 들어갔고, 장학금을 받으며 학교를 다녔다. 성적 장학금도 있었고, 가끔은 어려운 가정 학생들에게 일정 성적 이상이면 받는 장학금을 받기도 했다. 난 어려운 형편의 아이들에게 주는 장학금을 받는 게 참 싫었다. 부끄러웠다. 나의 근본을 다 보여주는 것 같아서 말이다. 벗어나고 싶었다.

   특히나 내가 기숙사, 강의실, 도서관, 학교 식당의 일련의 코스로 생활할 때 비싼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민들레 영토를 제 집처럼 다니고, 점심 후에는 벽다방에서 150원짜리 커피를 사치인냥 마시던 나와는 달리, 늘 생과일주스를 사 먹는 동기들을 보면서 참 부러웠다. 아르바이트비로 번 돈을 아껴 쓰기 위해 뚜벅이를 좋아했던 나와는 달리 어떤 아이는 차를 운전하고 오기도 했다. 방학이면 해외여행을 다녀왔다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부모의 직업이 궁금해졌다. 하지만 물어볼 용기조차 나지 않았다. 내 부모의 직업을 물어볼까 봐!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를 우연히 듣게 되었다. 의사, 공무원, 삼성 직원, 지방에서 사업체를 크게 운영하시는 분, 지방 대학 교수, 약사.... 그들 부모들의 직업은 말로만 들었던 성공한 사람들, 배운 이들이 갖는 직업이었다. 그러니 내게, 내 부모님의 학력과 가난은 더 큰 아킬레스건으로 굳혀갔다. 이를 극복하고 감추기 위해, 더 열심히 공부하며 살았던 것 같다. 내 악바리의 근성의 팔 할은 내 부모님이었다.



   어제의 일이다. 남편은 아주 작은 사업체를 운영한다. 꽤나 똑똑한 사람이다. 그래서 30이 갓 넘어서 자기 사업체를 꾸렸다. (어쩌면 내가 이 사람을 선택한 것도 그의 똑똑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내 아이들에게 적어도 아빠의 학력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일을 주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그의 사업체는 코로나 이후로 시들시들해졌다. 다른 곳으로 이동과 동시에 셉의 변경을 도모했다. 그러던 찰나에 남편의 사업장 맞은편 1층 건물 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내려와서 해보시는 것 어떠시냐"라고. 지금과 비슷한 월세를 받으시겠다고!

    열심히 살고 있는 우리에게 하늘이 주신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 주인이 하늘에서 보내준 천사가 아닐까, 생각을 했다!  그런데 여러 가지 문제가 발생했다. 용도 변경의 문제부터 시작한 자질구레하지만 머리 아픈 일들 말이다.  그래도 희망이 있기에 남편과 나는 '파이팅'했다. 그렇게 이런저런 일들을 다 겪고  드디어 계약 이야기가 나왔다.

   하지만 계약을 앞두고 협상을 해야 할 것들이 생겼다. 남편은 시나리오를 작성하고는 집주인을 만나러 갔다. 나도 동행했다. 주인에게 잘 보일 심정에 선물 한 보따리를 안고 말이다. 일이 그렇지만 모든 게 돈과 관련된 문제이다. 상가 주인은 애초에 이야기하셨던 조건이 아니라 더 받으려 하셨고, 용도 변경으로 발생한 비용뿐만 아니라 현시설 철거도 우리가 모두 해결하시길 원했으며, 보증금도 일시로 받길 원했고, 월세 받는 기한도 자신이 원하는 대로 빨리 받길 원하셨다. 월세 역시 1년 5%씩 인상하겠다고 하셨다.

   우리에게는 한꺼번의 지출이나 그들에게는 일시의 수입인 것을 당당하게 요구하셨다. 우리의 사정을 이야기했다. 조금의 협상을 위해서 말이다. 하지만 돌아오는 말은 작은 돈에 연연하지 말라는 충고뿐이었다.(그게 작은 돈이라니....) 그리고 또 한 마디의 말의 하셨다.

  "친정에  도와달라고 해요. 친정 부모님한테 돈 달라고 하면 되지 않나?"


................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하지만 참았다. 화도 나고 억울하기도 했다.

"왜.... 열심히 산 대가가 '돈 없고 힘없는 부모님'으로 되돌이표 되는 것일까?"

"난 왜 이 순간에 치욕스러움을 느껴야 하는 것일까?"

"왜 이 중요한 협상의 마무리를 친정의 얘기로 마무리 짓지 못했을까?"

"왜 이 상식적이지 않은 이 노인의 말에 난 반박하지 못했을까?"


그렇게 나의 아킬레스건으로 인해 남편의 협상마저 실패했다.


   자신의 아킬레스건을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이미 아킬레스건이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친정 부모님의 학력과 경제력 앞에서 힘을 쓰지 못한다.  언제쯤 극복되려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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