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사는 김에 뉴질랜드 Dec 11. 2024
차고에서 자전거를 꺼냈다. 헬멧을 썼다. 그리고 페달을 밟는다.
일본에서 살 때다. 교토의 데마치야나기역 근처에 살았다. 동생과 함께. 성격이 지랄맞고 괴팍하기 짝이 없던 나의 동생은 화를 잘 내기 일쑤였다. 그런 동생과 함께 지냈지만, 즐거웠던 때도 있었다. 교토의 번화가에서 여자들만 출입 가능한 술집을 친구들과 갔다. 입장료를 내면 정해진 시간 내에 술을 한잔씩 먹을 수 있는 곳이었다. 이자카야 같은 분위기는 아니었고, 대학교 앞 해리피아 같은 느낌이다. 다만 거나하게 취한 사람도 없고 남자도 없다. 어쨌든 우리는 한국인 아닌가. 젊었고, 패기 넘치는 20대 여자들이었다. 시간은 정해져 있고 돈은 냈으니 빨리 많이 마시기 위해 애썼다.
다음날 우리는 새벽에 일어나 카모가와 강변을 따라 라이딩을 했다. 전날의 과음을 새벽 라이딩으로 무찌르자는 무모함으로 빠르게 페달을 밟았다.
새벽 공기는 차가웠고, 카모가와강 한쪽에 사는 노숙인의 냄새는 폐를 관통했다. 과음으로 눈병이 난 건지 알 수 없지만 나는 끊임없이 울고 있었다. 무슨 이유인지 모르지만 알레르기로 눈이 빨갛게 충혈되었고 가려웠다. 친구들과 함께 깔깔깔 웃어 대며 자전거를 탔다.
대학교 때 친구들과 나는 가난한 학생이었다. 가끔 번듯한 술집에서 술을 먹을 때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이태원 소방서 옆 한남동으로 내려가는 계단에 걸터앉아 새우깡과 초콜릿과 소맥을 즐겨 먹었다. 늦은 시간에도 이태원은 휘황찬란했고, 가게들에서 흘러나오는 음악과 지나가는 사람들의 소음으로 가득 찬 동네였다. 당시 친구 중에 이태원 트랜스젠더바가 모여 있는 동네에서 자취를 하는 친구와 한남동 달동네 꼭대기에서 자취를 하는 친구가 있었다. 어느 날처럼 계단에서 술을 먹고 있으면 친구들이 한 명 두 명 모여들었다. 이태원에서 셰어하우스에서 지내는 친구는 새로 온 트랜스젠더 언니가 너무 좋다며 이야기를 했고, 한남동에 사는 친구는 천장에 다락방으로 나가는 작은 문이 있는데 그 문이 지난주 부서져 작은 틈이 생겼는데, 그 문틈 사이로 밤사이 고양이가 들어와 한바탕 소동이 났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 먹다 남은 것들을 주섬 주섬 챙겨 한남동 달동네로 걸어갔다. 그 시절 한남동에는 단국대가 있었다. 한남동에는 단국대생들로 가득 찼던 때가 있었다. 지금은 그 자리에 한남더힐이라는 아파트가 생겼지만 말이다. 가끔은 그 동네를 지나갈 때면 지나날의 청춘이 떠오른다. 지금은 감히 들어가 볼 수도 없는 아파트가 생겼지만, 그때의 한남동 단국대 정자에서 막걸리를 먹던 기억도 떠오른다. 어쨌든 야심한 시간 여자아이들은 웃으며 좁고 어두운 길을 끝없이 올라갔고, 마침내 친구의 집에 도착했다. 어떻게 얍실한 철계단을 이렇게 무섭게 달아 놨을 까 싶지만 그 계단을 밟고 올라가 친구방의 창문으로 보이는 뻥뷰는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빛깔과 모든 빛이 모여 우리를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말이다. 친구의 말대로 고양이가 화장실 세면대 안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고양이는 도망갈 생각도 하지 않고, 마치 함께 지내는 동거인 같은 느낌이었다. 며칠 후 친구는 이렇게 말했다.
'야, 그 고양이 때문에 우리 집 세면대가 주저앉았어. 이게 말이 돼? 이해가 되냐? 집주인아줌마가 그냥 쓰라는데 이사 갈까?'
가난한 대학생이 지내는 가난한 집은 고장 나도 주인이 고쳐 주지 않는다. 밤이 되면 빛의 세계로 가득 찬 그곳을 떠날 때 친구는 끝내 울고 말았다. 트렁크 2개, 책가방 1개, 책 10권 정도의 얼마 없는 짐을 친구들과 나눠 들고 한남동 달동네에서 이사를 하던 그때를 생각하면 그림움으로 가득 찬다. 조금만 더 그때의 낭만을 즐길 수 있다면. 뉴질랜드를 떠나오기 전 나는 20평이 넘는 테라스가 있는 80평대 펜트하우스에 살았다. 바다와 도시가 보이는 커다란 집에 3 식구가 살았다. 나의 집도 밤이 되면 도시의 빛으로 가득 찬다. 테라스에서 도시의 빛을 아무리 바라봐도 20대 한남동의 친구집에서 바라봤던 그때의 빛은 없다.
나의 것들로 가득 찼던 그때 그 빛. 아름다운 청춘의 빛을 보았고, 그 빛을 가슴에 새겨 영원히 나의 것으로 남았으니 슬프지도 쓸쓸하지도 괴롭지도 않다.
빛으로 새겨진 아름다움은 영원히 나의 것이다.
지나고 보니 청춘 영화다. 교토에서의 삶은 즐거웠고, 아름다웠고, 유쾌했다. 청춘의 찬란함이 지나가는 줄도 모르고, 그것의 아름다움을 느낄 새도 없이 시간은 흘러 중년이 된다. 가끔 가슴 한편이 시린 이유도 그것이겠지.
대학을 다닐 때 일이다. 학기 중에는 학교 앞 돈가스 집, 카레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방학 때는 그 돈을 모아 배낭여행을 떠났다. 브랜드도 없는 빨간 배낭가방을 샀다. 그 빨간 배낭가방을 메고 처음 떠난 곳은 방콕이다. 공항에 도착하여 처음 맡은 무겁고 뜨겁고 습한 공기의 느낌은 아직도 생생하다. 새벽 카모가와 강변을 달리며 느꼈던 차갑고 가벼운 공기의 느낌도 마찬가지다. 추억은 내가 원할 때 언제든 되살아나 내 몸을 휘감는다. 그것은 언제든 나를 그때의 나로 돌아 가게 만든다. 방콕에 도착하여 숙소를 찾아 짐을 풀고, 호텔 앞에 있던 노점상에서 이름 모를 꼬지와 맥주를 먹었다. 하수구 뚜껑 위에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아 지나가는 사람을 구경하면서. 그때도 괴팍한 동생과 함께 갔다. 한 살 차이밖에 나지 않기에 나의 인생에 함께 한 기억이 많은 지랄 같은 동생이다.
추억은 아름다운데, 함께한 이는 지랄 같다.
나는 여름을 좋아한다. 그것은 변함이 없다. 내가 좋아하는 계절에 내가 원하는 곳으로 떠났던 지난날의 여행은 눈이 시리도록 찬란했던 나의 청춘 기록이다. 삶이란 그런 것 같다.
빛과 공기의 질감에 따라 언제든 그때로 떠날 수 있다. 모든 것 든 기억에 남고, 가슴에 남아 영원히 나의 것이 된다. 나의 딸도 뉴질랜드에서의 삶이 그러하겠지.
나의 딸에게,
타우랑가에서의 삶이 설레고 반가워 뭉클함으로 가득 차 너의 삶에 닿기를.
타우랑가에서의 삶이 좋아하는 옥수수를 먹으며 아무렇게나 이야기해도 즐겁기를.
그리하여 타우랑가에서의 삶이 변하지 않는 사랑으로 남아, 언제든 되돌아올 수 있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