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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 1학년때 그녀

어느 날 대학친구가 전화를 걸어왔다.

by 장시무

문득 관계에 대한 고민이 많아진 요즘,

언제나 함께 했었고, 지금은 떨어져 있지만, 끝까지 함께 해줄 것 같은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sns를 보면 참 많은 사람들이 많은 관계 속에서 행복하게 지내는 것 같아서 부러울 때도 있었다. 성향상, 여러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있는 반면에, 나처럼 몇 안 되는 사람들과 깊거나 얕거나 하는 관계를 이어가는 사람도 있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페북메신저로 전화가 왔다. 대학동기다. 자취생활도 같이 했었다. 그런데 대학 졸업 후 한 번도 보진 못했다. 거의 17년을 연락도 못하고 페북으로만 서로 안부를 훔쳐보던 사이다. 물론 중간중간에 연락할 법도 하지만, 나는 멀리 살고 있고, 그 친구도 애들 키우며 직장 생활한다고 바빴을 터. 그러다 연락이 온 것이다.


20초 정도는 어색함이 흘렀지만, 이내 우리는 옛 시절 이야기 하면서 추억에 젖어간다. 대학시절, 1학년 오리엔테이션부터 만난 사이다. 학기전에 경주 어딘가 호텔을 빌려서 신입생들 대상으로 대학오리엔테이션을 했었다. 같은 방에 배정되어 그때부터 친하게 지내게 되었다.


1학년때, 물론 열심히 놀았다. 그 해방감이란! 남은건 처절한 성적뿐. 그래도 우리에게는 정신차릴 기회가 있었으니, 바로 군대! 엄청난 고생과 추억을 쌓은 후 복학하기 전 연락이 닿았다. 기숙사 신청이 늦어져 자취해야 할 것 같다고. 어렵사리 방 하나를 구했는데 정말 오래되고, 심지어는 곰팡이도 있는 그런 방이었다. 예산도 예산이지만 너무 늦게 알아봐서 다른 옵션이 없었다. 덜컥 계약했다. 한 학기만 일단 살자고. 덕분에 도서관에 더 있게 된건 신의 한수?


나름 재밌었다. 아침에 일어나 대충 아침 차려먹고, 학교 가서 수업 듣고, 운동하고, 점심 저녁 학생식당에서 해결하고, 늦은 밤 도서관에서 집으로. 아주 가끔은 여기저기 놀러 다니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렇게 하루 하루를 마무리 하는 밤, 잠을 청할 때, 토이 '그랬나봐' 를 즐겨 듣곤했다.


'우리는 왜 여자친구가 없을까?' 취침 토론 주제였다. 한참을 논하다가, 얼굴도, 돈도, 실력도, 아무것도 없는 우리를 누가 좋아해 줄까? 하면서 키득키득 웃던 시절이 떠올랐다. 지금 생각해도 참 미래가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런데 이놈은 대학 4학년 때 갑자기 돈 많은 여자 만나서 장가를 가버렸다. 참. 사람일이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기억의 서랍장 저 구석에 넣어둔 거의 잊힌 추억을 굳이 소환해 내고야 말았다.


1학년때 그녀.


그녀도 대학 입학 전 오리엔테이션 때 만났다. 프로그램 중에 하나가 선배들이 다른 과 예비 1학년과 소개를 시켜주는 시간이 있었다. 우리 과는 남자가 많아서 여자가 많은 과 동기들과 만남을 주선해 주었다. 지금 생각하면 대학오리엔테이션 때 소개팅이라니 ㅎㅎ 나름 재밌었다. 그런데, 나는 그때만 해도 여자에 대해 관심도 없고 그냥 친구 사귄다 생각했었다. 서로 소개도 하고, 게임도 하고,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며 학교 가서도 보자, 의례적인 인사 하며 오티는 끝났다. 이제 진짜 대학 1학년 개강이다. 캠퍼스를 지나며 한 두 번 또 만나게 되었다. 그때만 해도 휴대전화를 막 쓰던 때는 아니라서 연락을 할 길이 잘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 내 기숙사 방 문 손잡이에 종이가방 하나가 걸려 있었다. 열어보니, 오티 때 만난 그녀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었다. 모자. 기숙사 식당에서 아침밥을 먹을 때, 머리도 감지 않고 그냥 갔었던 적이 있는데, 모자가 없었다는 것을 물어물어 알게 되고, 직접 사서 누군가를 통해 걸어둔 것이다. 나는 처음엔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랐다. 무슨 의미인지도 모르고, 그냥 선물이니 고맙게 받고, 쓰고 다니기도 했다. 그런데, 지나가다 막상 마주치면 어색하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암튼 그랬다.


그런데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누가 누구를... 그런데 무심하기도 하다고... 뭐 어쩌겠는가? 우리 둘은 그냥 친구인데, 가다 만나면 인사하고, 안부를 묻는 정도인데, 아주 가끔 여럿이 같이 밥을 먹기도 했던 것 같다. 도서관에서 만나면 자판기 커피 한잔쯤 했던 것 같다. 친구처럼 대했던 것 같다. 그냥 친구니까.


통화하면서 알았는데 이 놈이 나 빼고 그녀와 둘이서 바다 보러 갔다 오면서 내 이야기를 많이 했었다고 갑자기 털어놓는다. 고민상담? 니가? 참... 웃긴다.


그렇게 대학 1년의 시간은 지나고, 휴학 뒤 입대하게 되었다. 물론 군대 있을 때, 한 두 번 생각나긴 했다. 참, 면회도 온 것 같다. 참, 편지도 주고받았던 것 같다. 뭐지? 기억이란... 이렇게 불쑥 소환되는 건가? 이래저래 나는 군생활을 마치고, 복학했다. 내 기억으론 복학 며칠 되지 않아서 새 학기가 시작된 캠퍼스 어딘가 어떤 남자와 함께 걸어가는 그녀의 뒷모습을 보았다. 이미 다른 복학생 형과 만남을 가지고 있었고, 나는 너무 철이 늦게 들어버린 것이다. 어색한 한 번의 만남은 있었던 것 같은데, 이미 우리는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그렇게 그녀는 내 기억 속에서 잊혀져 갔다.


그런데 이 놈이 갑자가 그 이야기를 꺼내더니, 그땐 그랬고, 이랬고... 갑자기 아내가 들어올까 봐 약간 긴장되기까지 했다. 스쳐 지나간 인연을 모두 공유하지는 않지 않는가? 그것도 뭐, 사귀었다면 말을 했을 법도 한데, 그런 적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20대 후반 언젠가, 그 어릴 때 기억을 되돌아보면서 그녀가 남긴 선물의 의미를 문득 깨닫게 된 기억이 문득 떠올랐다.


그녀는 모자 이후에도 옷, 그 외 몇 가지를 선물해 준 기억이 났다. 부담스러워서 어떻게 하나 하다가 어느 선배에게 고민을 털어놓았었다.


'마음은 받아줘, 좋아해서 그런 거야. 많이 부담스러우면 마다해도 되지만, 그리 부담스럽지 않은, 하지만 마음이 담긴 선물은, 그녀를 위해서라도 받아줘, 좋은 친구라 생각해'


그 선배도, 나도, 그녀도, 이 친구도 우리 사이가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몰랐다. 그러니 거절하는 상처를 주기보다, 받아주는 마음을 가져 보라고, 그녀를 위해서.

그녀는 그렇게 그냥 좋아서 주고 싶은 마음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게 해 준 사람이다. 20살, 그녀도 나도, 우리 모두가 참 풋풋했던 시절, 순수했던 그때, 사랑이라기보다는, 따뜻한 마음을 알게 해 준 그녀. 지금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다른 건 기억이 잘 안 나는데 이름은 기억난다. 이 놈 때문에 잊었는데 생각난다.

한번쯤은 우연히 만나면 재밌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꼭 만나고 싶다는 건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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