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라토너 거북 맘 Dec 11. 2021

'천천히 달리기'는 '경쟁'이 아닙니다.

운동 /러닝 이야기

토요일 새벽 3시 30분, 고요함을 깨는 무자비한 알람의 재촉이 시작된다.

'알았다, 일어난다 일어나.'


요즘 들어 갑자기 확진자 수가 늘고 있는 이 작은 섬에 비상이 걸렸다.

얼마 안 되는 인구에 하루에도 몇십 명씩 확진자가 생기다 보니

아이들의 정상적인 등교는 점점 더 요원해지고

심지어 자정부터 새벽 4시까지는 통행금지까지 실시하고 있다.


그래서 새벽 4시에 집을 나서기로 한다.

30분 동안 부스럭거리며 이것저것 챙기면서 

매주 가는 토요일 새벽 나들이지만 신나게 준비를 한다.

다른 식구들은 아직 깊은 잠에 빠져있는 시간,

냥 자매, 체리와 베리가 엄마를 배웅한다.

"엄마, 조심해서 잘 다녀와냥! 올 때 맛있는 거 사 오는 거 잊지 말고!"

눈에 쌍불을 켜고 지켜보는 녀석들.

또 나가는거냥?

운전을 하고 새벽 도로를 달려 목적지에 도착한다.

두 가지 러닝 어플을 세팅한다. 오늘은 2시간 30분, LSD훈련 코스다.

음악도 세팅한다. 오늘의 선곡은 80년대 유로 댄스 뮤직이다.

드디어 새벽 4시 30분, 나 홀로 소풍이 시작된다.


LSD 훈련은 문자 그대로, long & slow distance.

마라톤 초보자들의 심폐기능과 지구력, 기초체력을 기르는데 아주 좋은 훈련이다.

개인적으로 이 훈련이 내 취향에 잘 맞는 듯하다.

그래서 거의 매주 토요일마다 하고 있는 훈련이다.


남들이 보기에는 혼자 뛰고 있는 것처럼 보이겠지만

사실, 나는 든든한 가이드와 페이스 메이커들과 함께 달리고 있다.

두 가지 러닝 어플을 들으며 달리다 보니

각 어플에서 쉴 새 없이 흘러나오는 '잔소리'가 은근히 장난이 아니다.

그리고 귀에 꽂은 이어 버드에서는 80년대 유로 댄스 뮤직이 계속 흥을 돋워주고 있다.


낮 시간이었으면 오가는 행인들과 차들로 붐볐을 시내 거리가

깊은 산속에 들어앉은 오솔길 마냥 적막하다.

갑자기 아무도 없는 저 도로 한가운데에서

탭댄스라도 추며 브로드 웨이 뮤지컬 한 편 찍어볼까 하는 엉뚱한 발상도 해 보지만

나는 이성적인 아줌마니까, 참고 그냥 지나간다.

새벽 달리기의 묘미는 바로 이 고요함에 있다.


LSD 훈련을 할 때마다 러닝 어플 속의 꾀꼬리 같은 목소리가

쉬지 않고 강조하는 내용이 있다.

바로, '천천히 달리라'는 것이다.


"천천히 달리기는 경쟁이 아닙니다."

"옆 사람과 이야기할 수 있을 정도의 편한 페이스로

천천히 꾸준히 달려 주세요!"

"너무 빠릅니다. 속도를 늦춰 주세요."

"빨리 달리고 싶어도 꾹 참고 페이스를 유지해 주세요!"

"할 수 있습니다. 잘할 수 있어요!"

"좋아요, 지금 너무 좋습니다!"


전문가들이 권하는 이 훈련의 적정 페이스는

자신의 평소 기록보다 30초에서 1분 정도 느린 속도로 달리는 것이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내 맘이다.

내가 좀 더 느리게 달리고 싶다면 더 여유 있게 시간을 세팅하면 그만인 것이다.


보통, 마라톤이나 러닝을 즐기는 블로거나 유투버 들을 보면

거의 대부분, 어떻게 해야 거리를 더 늘릴 수 있는지

어떤 훈련으로 속도를 더 빠르게 할 수 있는지

기록 향상에 관한 정보나 방법에 대한 내용이 많다.


물론, 적잖게 도움이 되고 참고할 사항도 많지만

역시 내 취향은, 즐기면서 천천히 달리는 것이다.

그래서 이 어플에서 하는 잔소리가 꽤 마음에 든다.

"조금만 더 빨리 뛰세요, 힘내세요." 같은 지시 대신에

오히려 자꾸만 천천히 달리라고

천천히 달리기는 경쟁이 아니니까 페이스 오버하지 말고 유지하라고 난리다.


"에이~ 그 정도 뛰었으면 이제 10km는 1시간 안에 들어와야지."

"평균 페이스를 6분 초반대로 끌어올려야지. 인터벌 훈련이나 전력 질주 같은 거 안 해요?"


 '아, 진짜... 여기서도 그놈의 기록과 결과 스트레스라니...'

다른 사람들과 같이 달리면, 여러 가지로 배울 것도 고 좋은 점이 많긴 하지만

희한하게 꼭 거리와 속도 같은 기록이나 결과에 대한 분석과 평가도 빠지지 않는다.

특히나 이곳 러닝 동호회의 한국인 멤버들은 유난히 기록에 신경을 많이 쓴다.

그래서 급기야는 맨날 고만고만한 속도와 거리를 달리고 있는 나에게도 이런저런 훈련들을 권하고

원하면 페이스 메이커가 되어주겠다고 제안도 한다.


'이래서 내가 혼자 뛰는 거라고요.'


물론, 기록이 좋으면 나쁠 건 없다.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더 멀리 달릴 수 있다면

생각만 해도 짜릿하고 신나는 일일 것이다.

이를 악물고 죽기 살기로 달려서

남들보다 먼저 피니쉬 라인을 끊고 들어오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도 모르게 흥분이 되고 하늘을 날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 보면 말이다.


그런데

좀 천천히 달리면 안 되나?

속도나 거리가 향상되지 않더라도 그냥 즐겁게 달리면 안 되는 것인가?

모두가 육상선수나 마라토너가 될 필요는 없으니 말이다.


다른 사람들과 서로 비교하고

이러쿵저러쿵 남의 이야기하는 걸 듣기도 얽히기도 싫어서

골프나 배드민턴, 테니스 등 여럿이 어울려서 하는 운동들을 일부러 멀리하고 있는 나로서는

나만의 완벽하게 소중한 자유와 힐링 타임이 될 수 있는

달리는 그 시간만은 그냥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내게 러닝이란

온전히 나 자신만 생각하고 내 몸과 마음의 소리에만 집중하면서

모든 것을 잊고 초월하며 순수하게 즐기는 소중한 선물 같은 시간이다.


그래서 나는 달리는 중간중간 잠깐씩 멈춰서

바다도 바라보고 좋은 풍경이 있으면 사진도 찍어가면서

소풍 나온 아이처럼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오늘은 돌아오는 길에 매주 토요일마다 열리는 벼룩시장 구경도 했다.

로컬 원주민들이 직접 키운 채소와 과일, 생선은 물론이고 잡다한 옷가지나 장신구 등

없는 것 빼고는 다 있는 소박한 작은 섬의 시장인데 제법 구경하는 재미가 있다.

어두운 새벽 러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엔 이런 즐거움들이 선물처럼 기다리고 있다.


오늘도 성공적으로 LSD 훈련을 마쳤다.

몸안의 수분이 다 빠져나간 듯하다.

특히나 오늘 새벽엔 바람 한점 없이 아직도 어찌나 후덥지근하던지...

한국의 초 겨울 날씨에 러닝을 해보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어쨌든, 2시간 30분, 20km 완주다.(기록에 연연하지 않는다면서요...)

집으로 오는 길엔 어김없이 나를 위한 보상을 해주는 걸 잊지 않는다.

오늘은 특별히 파인애플 망고 스무디와 아이스커피다.

햇살이 유난히 눈부신 토요일 아침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무엇에 쓰는 물건인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